제1101화
묵용청양은 황형이 말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이지 후회하는 것 같았다. 약간의 서글픔을 띠고 있는 게 실망한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탁자에 엎드리며 물었다.
“황형, 누굴 좋아해 본 적 있어요?”
묵용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군왕은 고독한 법이다. 짐은 아무도 좋아할 수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아버지도 황제였는데 어머니를 좋아하셨잖아요.”
“이 황형은 아버지와 달라. 아버지께서는 강산보다 미인을 사랑하셨지만, 이 황형은 강산만 사랑할 것이다. 남녀 간의 정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그는 입꼬리를 씩 끌어 올리며 웃었다.
“짐은 그런 것과 인연이 없다.”
묵용청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하지 않아요?”
묵용린은 씩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
“남첩을 기르겠다고 큰소리치던 네가 그런 감정이 중요하냐?”
“남첩을 좋아할 수 있잖아요.”
묵용청양이 말했다.
“제가 기르는 남첩 중에 하늘을 떠받치는 큰 영웅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묵용린은 그녀의 말을 딱 잘라 부정했다.
“하늘을 떠받치는 대영웅이라면 네 남첩이 될 리 없지 않느냐? 만약 남첩이 되길 원한다면 그는 큰 영웅이라 말할 수 없다.”
묵용청양은 어안이 벙벙했다. 황형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건 뭐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형, 다른 일이 없으면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묵용린이 말했다.
“같이 나가자. 난 가서 성아를 좀 봐야겠다.”
아무래도 남동생이 형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황형은 심리적으로 타격이 꽤나 클 것이다.
“황형, 성아에게 뭘 하시려는 건 아니죠?”
묵용린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뭘 걱정하는 것이냐?”
“성아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을 뿐… 별것 아니에요. 더군다나 녀석은 매일같이 육황숙을 따라다니며 아가씨들 사이에서 놀잖아요. 그런 걸 보면 봉봉에게 순정을 바친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다들 알지만 모르는 척한 거예요.”
묵용린은 그녀의 머리를 툭툭 치고는 약간 흐뭇하다는 듯 웃었다. 막상 성아와 만나면 싸움만 했지만, 중요한 일 앞에선 머리도 잘 쓰고 동생도 도울 줄 알았다.
그가 성아를 찾아가려는 건 현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였다.
만약 대혼 전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는 절대 동생의 사랑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사봉봉은 이미 그의 아내가 되었고, 형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예법은 마땅히 지켜야 했다.
두 남매는 천천히 궁 안을 걸었다. 오후 햇빛이 따가웠지만, 숲길을 걷고 있었기에 더위가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요대궁에 도착하자 묵용청양이 먼저 자기 처소로 들어갔고, 묵용린은 더 앞으로 나아갔다.
무덕궁은 수리를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장인들이 많았지만, 다들 바삐 움직이느라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가 편전으로 막 들어서는데 다른 이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휴, 오늘 내무부에서 왜 향칠香漆을 보내왔지? 황후 마마께서 궁비를 절약한다고 각 궁에 칠은 일률적으로 청칠清漆을 하라고 하명하시지 않았어?”
“뭘 모르는 소리.”
다른 사람 하나가 입을 열었다.
“어제 우리 성 전하께서 직접 봉명궁을 찾으셨잖아. 그랬더니 황후 마마께서는 즉시 향칠을 보내라고 명하셨대요.”
“황후 마마께서는 승덕전의 궁비도 줄이셨는데… 왜 성 전하께는 다르게 대하시는 거지?”
“물론 다르죠. 성 전하와 황후 마마께선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으니 정이 남다르시겠지요. 마마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 전하는 항상 염두에 두고 계세요.”
나무 뒤에 서 있던 묵용린은 한참 가만히 있다가 돌아섰다.
다시 요대궁을 지날 때, 묵용청양이 안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영십구가 뒤따르는 걸 보니 이 녀석이 또 출궁하려는 모양이었다.
“어디 가는 것이냐?”
묵용청양은 뒤를 돌아보더니 깜짝 놀랐다.
“황형, 성아한테 가신 것 아니었어요?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셨어요?”
“가지 않았다.”
묵용린이 말했다.
“갑자기 바둑이 두고 싶더구나. 난청이 가부에 있으니 짐이 다녀와 보려 한다. 너는 어딜 가는 것이냐?”
묵용청양이 대답했다.
“기홍 고고한테 가려고 합니다. 기홍 고고의 다과가 먹고 싶어서요.”
묵용린은 웃으며 말했다.
“고고의 다과가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영안이 보고 싶은 게 아니냐?”
“말도 안 돼요!”
묵용청양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영안과 안월이 함께 술을 마시는 걸 본 뒤로 그녀는 며칠 동안 환경문에 가지 않았다. 영안의 얼굴도 본 적 없었다.
묵용린은 단번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왜? 영안이 네게 뭘 잘못했느냐?”
“아니에요.”
묵용청양은 대충 둘러댔다.
“전 뭐 항상 그 녀석하고 놀아야 하나요? 금언과 소타도 있어요. 요즘에는 소타한테 무술을 가르치는 중이에요. 소타가 얼마나 빨리 배우는데요!”
묵용린은 출궁 시 말이 아닌 어가를 타야 했다. 그는 묵용청양에게 같이 어가를 타고 출궁하자 말했다.
그런데 묵용청양은 거부했다. 그녀는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타는 걸 더 좋아했다.
결국 남매는 따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사람은 어가를 타고 가부로, 다른 한 사람은 말을 타고 영부로 향했다.
황제의 출궁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가부 사람들은 그가 온 것을 보고 다들 깜짝 놀랐다. 모두 얼른 대문을 열고 나와 그를 안채로 안내한 후에야 예를 올렸다.
묵용린이 가동과 녹하를 일으켜 세우자 가소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녀는 동글동글한 얼굴을 치켜들고 예쁘게 웃었다.
“황제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오니까 우리 부가… 그게 뭐였지? 으리으리해지다?”
제 말이 이상했는지 가소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기 오라버니를 올려다봤다.
가난청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추한 집이 빛나는 것 같다고 하는 거야.”
“맞아! 맞아, 맞아. 누추한 집이 빛나는 것 같아.”
녹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밖에서는 제발 네 오라버니 동생이라 하지 말거라. 장원랑한테 이런 바보 같은 여동생이 있다는 게 소문나면 어찌하느냐?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온종일 무술에만 몰두하니… 네가 남자아이였다면 궁중에서 심부름이라도 하라고 하겠지만 아가씨가 무술을 익혀 무얼 하겠느냐? 잘못하면 시집도 못 갈지 모른다!”
가소타는 기분이 나빴다.
“청양 언니도 무술을 배웠는데 왜 어머니는 저만 가지고 그러세요?
가동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분은 장공주 전하시잖니……. 네 어머니가 어찌 뭐라 말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실랑이를 하는 틈을 타 묵용린은 가난청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난청이 그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워낙 애늙은이 같았기에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다. 더구나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기 때문에 예전에도 묵용린은 조정에서 무슨 걱정거리가 생기면 가난청을 찾아 바둑을 두며 기분을 풀곤 했다.
* * *
한편, 기홍은 묵용청양이 대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반겼다.
“전하께서 하루 이틀이면 틀림없이 오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전하를 위해 어제 또 간식을 만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오셔서 드시기만 기다리는 중이었죠.”
묵용청양은 기홍의 팔을 껴안으며 물었다.
“고고,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기홍은 그녀의 손을 토닥거리며 웃었다.
“전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아주 좋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바깥쪽 곁채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영안, 얼른 나와 보렴! 청양 전하께서 오셨어.”
영안은 공주가 온 걸 진즉 알아차렸다. 묵용청양이 오기만 하면 집 안이 들썩거렸기 때문이다. 그녀가 온 것을 모르기가 더 어려웠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다정다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묵용청양에게는 더더욱.
그는 어머니의 부름이 있고 나서야 심드렁한 모습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바깥에서 묵용청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고, 뭐 하러 영안을 불러요? 저는 고고를 보러 왔어요. 그 녀석을 보러 온 게 아니에요.”
영안의 발걸음이 문가에 멈춰 섰다. 순간 그는 진퇴양난이었다.
사평에서 돌아온 후, 묵용청양은 며칠 동안이나 환경문에 오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오지 않는 건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어제 어머니는 청양 공주가 며칠 후에 올 거라고 했다. 그는 오늘 휴목이었지만 외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웬수가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목소리를 들어 보니 어째 그에게 좀 냉담한 것 같았다.
영안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가 요즘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한 적이 있었나? 예전엔 항상 그녀가 그를 쫓아다니기 바빴는데. 갑자기 달라지니 그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화원 정자의 돌 탁자 위엔 기홍이 만든 다과 찬합이 놓여 있었다. 커다란 원탁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대추색으로 칠한 커다란 원형 찬합 위에는 정교한 도안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화초 덩굴 가지, 가산 기석 그리고 인물화도 있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연을 날리는 모습, 미인이 부채질하는 모습, 그리고 낚시하는 노인과 두건을 두른 청년들이 축국을 하는 모습 등등… 모두 생동감이 가득했다.
묵용청양은 한참 동안 그림을 쳐다봤다.
“고고, 이것들은 어디서 난 거예요? 정말 예뻐요.”
“사 주인장께서 보낸 겁니다.”
기홍이 말했다.
“지난번에 제가 다과를 좀 보냈거든요. 그랬더니 이렇게 멋진 찬합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듣자니, 남쪽 어느 지방에서 가져온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임안성 성내에서는 유일한 것이래요.”
그녀는 찬합 뚜껑을 하나씩 열었다.
뚜껑을 열어 보니 안쪽엔 검은색 금테가 둘러져 있었고 부채꼴 모양의 작은 칸들이 나뉘어 있었다. 가운데 작은 원에도 형형색색의 다과가 담겨 있어서 너무 보기 좋았다.
묵용청양은 한참 동안이나 보기만 했다. 너무 아까워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기홍은 그녀의 모습이 재미있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손수 다과 한 조각을 집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주었다.
“어서 드셔 보세요. 고고가 전하를 위해 특별히 만든 겁니다.”
입을 벌려 그대로 다과를 받아먹은 묵용청양은 감동한 눈으로 기홍을 바라보았다.
“진짜 맛있어요.”
그런데 곁눈으로 한 사람을 발견한 그녀는 순식간에 얼굴이 굳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영안은 묵용청양에게서 소원함을 느꼈다. 그는 코를 만지며 속으로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내 집인데 내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해?
기홍은 아들이 온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전하와 대화를 나누고 있거라. 나는 가서 식사를 준비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