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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99)화 (1,099/1,192)

제1099화

그는 사실 자신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봉명궁에서 뛰쳐나간 남자가 누구냐고 물어야 할까? 아니면 황후에게 몰래 남자를 만난 적이 있냐고 물어야 할까?

잠시 침묵하던 그는 겨우 내뱉었다.

“황후는 어찌 옷차림도 바르게 하지 않고 짐을 마중 나온 것이오? 옷차림이 이게 뭐요?”

사봉봉은 공손히 대답했다.

“황상께서 너무 급히 오셔서 신첩이 미처 치장하지 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음, 태도가 나쁘지 않으니 잠시 죄를 용서해 주마.’

묵용린이 이내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는데 문득 탁자 밑에 둥근 구슬 두 개가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그건 남자 옷에 쓰는 옥 단추였다.

그는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저게 뭐요?”

경화가 얼른 가서 주웠다.

“황상께 아룁니다. 이건 옥 단추입니다.”

“누구의 옥 단추인가?”

감히 입을 열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남자의 옥 단추가 황후의 처소에 떨어져 있는 걸 무어라 설명하겠는가?

경화는 손에 든 옥 단추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문득 생각났다.

“아… 어제 성 전하께서 왔다 가셨는데 그때 떨어진 것 같습니다.”

묵용린의 눈에도 낯익은 걸 보니 성아의 옥 단추가 맞는 듯했다. 그제야 굳었던 안색이 누그러진 그는 더 이상 묻지도 않은 채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봉명궁을 나선 묵용린은 직진하다 이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곤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꺾었다. 그건 무덕궁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영십칠은 황제 몰래 고개를 가로저으며 따라갔다.

* * *

묵용린이 무덕궁에 도착하자 아랫사람들은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그는 무덕궁을 총괄하는 진두수에게 물었다.

“너희 전하는 어디 갔느냐?”

“황상께 아룁니다. 전하께서는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습니다.”

묵용린이 침전으로 향하자 진두수가 쫓아가며 고했다.

“황상, 그쪽에 있는 주전은 지금 수리 중입니다. 전하께선 편전에서 쉬고 계십니다.”

그는 허리를 굽히며 길을 안내했다.

입구에 다다르자 진두수가 문을 열었다.

묵용린이 귀찮다는 듯 그에게 손을 흔들며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매우 조용했고, 공기 중에는 우아한 목련 향기가 풍겼다. 눈앞에 흰 면사가 산들바람에 흔들리니 마치 파도의 포말 같았다.

묵용린은 그 파도를 천천히 가로질러 침상 옆으로 걸어갔다. 가볍게 장막을 걷자 단잠에 빠져 있는 묵용성이 보였다.

묵용린은 침상 옆에 서서 잠시 침묵에 빠졌다. 갑자기 자신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설마 자신의 동생과 아내를 의심하는 건가? 이렇게 달려와서 직접 확인할 정도로?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우습지도 않다!

막 발길을 돌리려는데 묵용성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묵용린은 발걸음을 멈췄다.

묵용성은 다시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그 말은 너무도 또렷하게 들렸다.

“봉봉.”

묵용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묵용성은 다시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 또렷하게 말했다.

“봉봉.”

그리고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검을 꽉 움켜쥔 묵용린은 장막으로 꽁꽁 싸매진 침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결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숲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검술을 연마했다. 하지만 아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영십칠은 초식마다 약간의 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수히 많은 나뭇잎들이 공중에서 마구 춤을 추듯 흩날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나비 떼가 서로 죽고 죽이는 광란의 혈투를 벌이다 결국 모두 두 날개가 찢겨 추락하는 것 같았다.

폭풍의 중심에 서 있는 묵용린. 그는 용이라도 다스리는 것처럼 위아래로 요동치듯 움직였다. 그의 손에서 장검이 미친 듯 춤을 추자 검광이 별똥별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백광으로 변했다. 그리곤 갑자기 숲을 가르는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퍽.

무언가 나무줄기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만 해도 묵용린의 손에 있던 검이 박힌 것이다.

그 검은 묵용린의 분노가 담긴 듯, 끊임없이 웅웅 떨었다.

* * *

묵용린은 매번 휴목 때마다 동생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일종의 가족 연회인 셈이었다. 오늘 그는 특별히 황후도 초대했다.

사봉봉은 연회에 참석하라는 말을 듣고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따라 황제가 좀 이상했다. 갑자기 검을 들고 봉명궁으로 달려오질 않나… 그러다 아무 이유도 없이 또 가 버렸다.

게다가 또 돌연 그녀에게 함께 점심을 먹자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묵용린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

금천아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황후 마마를 싫어하는 황제가 아침엔 검까지 들고 쳐들어왔다. 무언가를 암시한 것 같았는데… 지금은 또 마마를 연회에 참석시키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순순히 명을 따르다가는 십중팔구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녀는 면사 금패를 꺼내서 사봉봉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또 자신이 지니고 있는 비수도 잊지 않았다.

“마마, 이것들을 일단 가지고 계세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합니다.”

사봉봉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시 가지고 가. 이럴 필요는 없을 거야.”

금천아가 말했다.

“이럴 필요가 없다니요! 이른 아침부터 검을 들고 찾아왔던 황상이에요. 아침엔 사람이 많아서 손을 쓰지 않았던 거죠. 이번에는 마마만 부르신 걸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불길해요. 이건 모두 호신 용품이니 꼭 가지고 가세요.”

사봉봉은 구리거울을 바라보며 머리에 장신구를 꽂았다.

“누가 감히 이런 것을 가지고 황상을 만나러 가니? 비수를 가지고 갔다간 그가 나를 죽일 구실을 만들지 않아도 될 거야.”

금천아도 비수를 품고 승덕전에 들어가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다시 비수를 거두고 말했다.

“그래도 금패는 가지고 가세요. 마마께서 안 가지고 가겠다고 하시면 소인을 죽인다고 하셔도 꼭 따라갈 겁니다.”

사봉봉은 할 수 없이 금패를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승덕전으로 가니 묵용청양과 묵용성이 함께 있었다. 사봉봉은 슬며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나아가 예를 취하자 묵용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예를 푸시오.”

그녀가 인사를 마치자 두 전하도 그녀에게 예를 취하며 다정하게 황수라고 불렀다. 묵용청양은 사봉봉과 오랜만에 만났기에 끝없이 재잘거렸고, 묵용성은 가만히 있다가도 수시로 말참견을 했다. 세 사람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니 아주 우애가 좋아 보였다.

한참을 지켜보던 묵용린은 왠지 자신만 외톨이인 것 같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는 가만히 묵용성을 관찰했다. 그리고 묵용성의 시선이 한순간도 사봉봉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걸 발견했다. 그 시선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그도 묵용성이 육황숙에게 풍류와 호방함을 배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청출어람일 줄 몰랐다.

묵용성과 사봉봉이 어릴 적부터 정이 두텁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땐 어린아이였기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두 사람의 모습이 그의 심기를 묘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남녀 사이에 직접 물건을 주고받는 것도 삼가야 하는 것이 예법인 것을… 왜 괜한 오해를 피할 생각이 없는 것일까? 맏형수에게는 모친의 예를 다해야 할 터인데, 저렇게 빤히 쳐다보다니… 이건 말도 안 된다!

그는 묵용성을 끔찍이 아꼈다. 그의 남동생은 어릴 적부터 성격이 말랑말랑해서 청양보다 더 조신해 보였다. 그는 성아가 서너 살이었을 때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부끄러움이 많아 금세 얼굴을 붉히곤 했다. 용모도 수려하고 점잖아 항상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또 귀신도 꺼리는 공주라 불리는 여동생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그가 나서서 해결해 주곤 했다.

태상황과 태후가 강남으로 떠난 후, 그는 줄곧 묵용성을 돌보았다. 무술을 배우게 다그치기도 하고 학문에 정진하도록 신경도 썼다. 또, 아우가 감기에 걸려 아프다는 소리만 들리면 그는 밤새 아우의 침상 곁을 지키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묵용성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단 말인가?

묵용린의 침울한 기분 때문일까? 대전 안엔 한기가 돌았다.

그와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묵용청양이 제일 먼저 추위를 느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아랫사람들에게 명했다.

“창문은 다 열어 놓거라. 햇빛은 강한데 방 안이 서늘하구나.”

오직 사봉봉만이 황제의 안색이 어둡다는 걸 알아차렸다.

사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황제의 안색이 달라졌다는 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부부이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서로를 적대시하는 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그의 감정 변화에 매우 민감했다.

다행히 금방 식사가 차려졌기에 모두들 편청偏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는 월규가 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월규 고고는 사봉봉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제대로 되었네요. 가족 연회에 어찌 황후 마마의 자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황후 마마, 얼른 황상 곁에 앉으십시오.”

묵용린은 얼른 손가락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황후는 저기에 앉으시오.”

지금은 손에 검도 없었기에 그녀를 옆에 앉히는 게 조금 불안했다. 차라리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더 나았다.

사봉봉은 두 곳 모두 내키지 않았다. 그의 옆은 숨이 막혔고, 맞은편에 앉자니 고개를 들 때마다 그가 보여 역시 내키지 않았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결국 맞은편에 앉았다.

원탁 하나에 네 사람이 둘러앉았다.

묵용린을 제외한 세 사람은 또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묵용청양이 있는 자리이니 도저히 심심할 틈이 없었다. 묵용린은 대화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평소와 안색도 같았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월규 고고는 그들이 사이좋게 있는 모습을 보자 너무 좋았다. 그녀는 황후에게 음식을 집어 주고, 또 황제에게도 한 젓가락 집어 주며 바쁘게 두 사람을 살폈다.

묵용청양은 한참을 기다려도 월규 고고가 음식을 덜어 주지 않자 기분이 상했다.

“고고는 황형과 황수만 좋아하세요? 저랑 성아는 주워 온 애들인 거죠?”

월규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우리 공주 전하! 다른 사람은 다 주워 왔어도 공주 전하는 아닐 겁니다. 태후 마마의 어릴 때 모습과 이렇게 똑같으신데요.”

묵용청양이 물었다.

“어머니께서도 어린 시절에 ‘귀신도 꺼리는 사람’이라는 소릴 들으셨어요?”

묵용린이 호통을 쳤다.

“무엄하다!”

묵용청양은 혀를 날름거릴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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