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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98)화 (1,098/1,192)

제1098화

허장우는 철부지 같은 처남을 보고 있노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두말 않고 우선 한바탕 꾸짖었다.

“황후가 사가 상호의 소주인장이라는 걸 알았으면, 너는 미리 가짜 장부를 만들어 대응했어야 했다. 그녀에게 진짜 장부를 제출하다니, 자네가 진정 제정신인 게야?”

곽도는 매형 앞에서 얌전히 꾸짖음을 들을 뿐이었다.

“산처럼 많은 장부를 가져갔으니 지레 지쳐서 나가떨어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설마 그 많은 걸 하나하나 다 들여다보며 검사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만 해도 장부만 봐도 골치 아픈데… 어린 여인이 무슨 재주로 그걸 다 보겠습니까?”

“그런 재주가 없으면 사가 상호의 소주인장이 되었겠는가?”

허장우는 이어서 말했다.

“원래 자네에게 궁에서 귀비의 손과 발이 되라 하려 했네. 그런데 오히려 저들에게 꼬투리를 잡혀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나와 귀비가 황상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네. 괜한 오해를 만들지 않기 위해 자네를 두둔할 수도 없단 말일세.”

곽도는 매형의 노성에 감히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허장우의 안색을 힐끔힐끔 살피며 입을 열었다.

“매형, 황상께서 저에게 궁궐 보수에 관한 일을 담당하라 하십니다. 이건 도대체 무슨 뜻인지…….”

허장우는 그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감히 또 삐뚤어진 생각을 하는 것인가? 황상을 위해 성실히 목숨 바쳐 일하고 더 이상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말아야 하네.”

곽도는 머리를 감싸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매형.”

허장우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곽도는 은자 쓰는 걸 좋아하는 귀족의 나쁜 습성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아마 최근 몇 년 동안 내무부에서 긁어모았던 은자는 이미 다 써 버렸을 터. 이번에 다시 국고에 채워 넣은 은자 십만 냥은 여기저기서 긁어모으고 친지들에게도 조금씩 빌려 겨우 모은 것이었다. 그의 수중에 은자가 하나도 없으니 예전에 쓰던 수법이라 한들 못 쓰겠는가?

“이번에 보수할 궁전들은 어딘가?”

곽도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곳들뿐입니다.”

허장우의 시선이 무덕궁武德宮 위를 스쳐 지나가자 눈빛이 반짝였다.

황제가 대혼하기 전, 그는 사봉봉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사가가 흠천감을 매수한 이유. 그는 그 이유가 사봉봉이 외간 남자와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전, 그의 부인이 유취각琉翠閣에 가서 장신구를 구경하며 가게 안주인과 잡담을 나누었다고 했다. 그때 그 안주인이 실수로 이런 말을 흘렸다.

원래 사봉봉은 묵용성과 혼인할 줄 알았지 황상과 혼인할 줄은 몰랐다는 것이었다.

유취각 옆엔 사가 상점의 분점이 있었기에 안주인과 사앵앵은 꽤 친하게 지냈다. 그러니 그 말이 신빙성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 말을 들은 그의 부인은 깜짝 놀라 몰래 수소문을 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성 황자와 사봉봉이 친하게 지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성 황자는 사봉봉을 보기 위해 자주 사가 상호를 찾아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정보를 알게 되자 허장우는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을 감출 수 없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째서 사앵앵은 사봉봉과 성 황자를 이어 주지 않은 것인가? 사봉봉만 아니었더라면 그의 금지옥엽인 딸아이의 앞길 또한 순탄했을 텐데. 만약 저들이 일찍 혼사를 올렸더라면 모두 다 기쁘지 아니한가?

* * *

무덕궁을 수리한다는 말에 묵용성이 궁에 머무는 시간은 조금 길어졌다. 원래 그는 황제가 대혼을 치른 뒤, 육왕부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었다. 아마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질 거라 여긴 탓이리라.

일반적으로 궁전을 수리하는 건 벽화를 다시 칠하고, 나무 안에 벌레가 있는지 살피고 균열이 생긴 부분을 보강하며 오래된 나무를 교체하는 작업이었다. 또한 바닥에는 초칠을 하고 창호지를 교체하며, 지붕 위에 올린 기와까지 점검한 뒤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궁에 있는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소유한 것에 대해 굉장히 예민했다. 심지어 궁전을 수리하는 장인들에게 무덕궁에 있는 물건들을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했고, 아랫사람의 일 처리가 마음에 차지 않아 굳이 자리를 지키곤 했다.

새로 칠한 대홍 포주抱柱(굵은 기둥)를 본 묵용성은 피처럼 새빨간 포주 주위를 한 바퀴 돌다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총관인 진두수陳斗水를 불러서 물었다.

“이곳의 기둥들은 매년 향칠香漆을 했는데… 올해는 왜 향칠을 하지 않는 것인가?”

향칠이란 옻에 향료를 섞어 기둥을 칠하는 걸 말했다. 향칠을 하면 칠이 마른 후에 옻 냄새 대신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 성 황자는 이 칠을 굉장히 신경 쓰기 때문에 무덕궁 곳곳은 향칠이 되어 있었다.

진두수가 대답했다.

“내무부에서 이걸로 칠하라고 지정했습니다. 소인이 가서 물어보니 궁비를 삭감하려는 황후 마마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안 그래도 사봉봉을 만나고 싶었는데 그간 별다른 구실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생기자마자 그는 두말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봉명궁으로 찾아간 그는 사봉봉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황수, 잘 지냈어요?”

사봉봉도 웃으며 대꾸했다.

“네,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전하께서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도 잘 지냈어요. 육황숙을 따라서 종일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며 많은 것을 배웠어요.”

사봉봉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무슨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린단 말인가? 아마 기녀를 데리고 술을 마시러 다녔을 것이다. 육왕야는 재주가 좋아서 재능이 뛰어난 기녀를 데리고 술 한잔하며 노는 걸 좋아했다.

성 황자는 그를 따라다니며 확실히 많은 걸 배웠다. 그가 은근한 눈빛을 흘리면 분명 수많은 아가씨들의 마음을 홀릴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성 전하는 언제나 어린 동생일 뿐이었다.

두 사람이 한참 동안 잡담을 나누던 중, 묵용성은 비로소 봉명궁을 찾은 이유가 떠올랐다.

“황수, 지금 제 궁전을 보수 중입니다. 그런데 원래는 향칠을 했는데 이젠 궁비를 절감해야 한다며 못 하게 하던데요.”

사봉봉은 놀라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저를 찾으신 이유가 그거였군요? 전하께선 어렸을 때부터 늘 세심하셨지요. 향칠을 하시려면 사람을 내무부로 보내서 받아 가시면 됩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묵용성은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다정한 눈길로 사봉봉을 바라봤다.

“역시 황수께서는 저를 아껴 주시는군요.”

옆에 있던 금천아는 전율을 느꼈다.

‘맙소사! 과연 성 전하께서는 육왕야의 가르침을 받았구나. 저 달콤한 눈빛 좀 보라고! 우리 마마가 아니시면 누가 저 눈빛을 견딜 수 있을까?’

* * *

이튿날은 휴목休沐으로 조정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묵용린은 부지런한 황제이기에 습관적으로 일찍 일어났다.

그는 검을 들고 궁전 뒤에 있는 작은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매일 새벽마다 비가 오지 않는 한 이곳에서 수련했다.

여름 햇살은 일찍부터 나뭇가지와 잎 사이로 부드럽게 내리비치고 있었다.

묵용린이 막 숲에 들어왔을 때, 갑자기 먼 곳에서 하얀 무언가가 아주 빠르게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연기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것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건 봉명궁 방향이었다. 묵용린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이렇게 이른 새벽녘에 누가 봉명궁에서 나왔고, 왜 또 도망갔을까?

그는 영십칠에게 물었다.

“방금 누군가 뛰어가는 것을 보았느냐?”

영십칠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지만, 정확히 보지는 못했다.

“사람 그림자가 달려가는 것 같긴 했는데… 아마도 소공공인 것 같습니다.”

묵용린은 태감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태감들은 흰 장포를 입지 않았다.

묵용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뽑고 수련을 시작했다. 아침 바람이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가 팔을 펼 때마다 검 끝에서 검광이 마치 한 송이의 빙련氷蓮처럼 눈부시게 피어났다.

흰 장포가 휘날리고 발끝은 가볍게 땅을 차고 날아올랐다. 학처럼 가벼운 몸이 장검을 휘두를 때마다 나뭇잎이 춤을 추듯 흩날렸다. 커다란 나비가 나뭇잎 사이로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그는 나뭇가지 끝에 서 있었다.

영십칠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나뭇가지 끝에 멈춰 선 묵용린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나뭇가지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볍게 휘청거렸고, 그 역시 같이 흔들렸다.

조용히 착지한 그는 갑자기 검을 들고 봉명궁으로 향했다.

영십칠은 그가 도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사봉봉은 막 일어나 세수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황제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미처 겉옷을 입을 겨를도 없이 머리카락도 풀어 헤쳐진 채 그를 맞이하러 나가야 했다.

묵용린은 이번엔 검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사봉봉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시오.”

사봉봉의 눈에 검이 먼저 들어왔다.

‘설마 묵은빚을 청산하러 온 건가?’

금천아는 잔뜩 긴장한 채 한 손을 천천히 허리춤에 꽂힌 비수로 가져갔다. 만약 황후 마마께 털끝이라도 손을 댄다면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묵사발을 만들고 말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미동도 없이 사봉봉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앞에 있는 아가씨의 얼굴엔 화장기가 없었다. 그저 반들반들한 얼굴을 드러낸 채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흑단같이 검고 긴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늘어져, 앙증맞은 턱이 눈길을 끌었다. 사봉봉은 마치 깊숙한 규방에 숨어 있어야 할 소녀 같았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사봉봉이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지금은…….

그래도 아직은 예쁘다고 하기엔 부족했지만, 겨우 참고 봐 줄 용모는 되는 것 같았다.

그의 눈길이 아래로 향했다.

그녀가 겉옷을 입지 않고 있었기에 흰 홑겹 옷 아래로 그녀의 체형이 보였다. 그 차분하고 유약한 몸매를 본 묵용린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사봉봉은 유약함이라는 단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묵용린이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자 사봉봉은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황상, 이렇게 일찍 어인 행차이신지…….”

묵용린이 검을 들어 올리자 뒤에서 누군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건 금천아였다.

사봉봉이 눈짓으로 그녀를 제지하자 금천아도 평온을 찾았다.

묵용린이 검을 들고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서자 흥미롭게도 사봉봉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황제의 안색은 조금 누그러졌다. 비록 한 걸음일 뿐이었지만, 주도권이 다시 그에게 돌아온 느낌을 받았다.

‘역시, 짐은 그 시절의 위용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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