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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97)화 (1,097/1,192)

제1097화

결국 곽도는 내무부에 비었던 은자를 채워 놓았다.

오만 냥이나 되는 새하얀 은괴가 국고로 들어가니 묵용린의 용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또한 허 귀비와의 약속대로 곽도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이틀 후, 사봉봉은 새로운 명세서를 가지고 내무부로 곽도를 찾아갔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곽 대인, 지난번 오만 냥은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건 이번에 또 찾아낸 겁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역시 오만 냥입니다. 이것도 곽 대인께서 메꿔 놓으실 거죠?”

곽도는 화가 나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간교한 장사꾼 같으니! 과연 돈 냄새나는 장사꾼이었다. 자신에게서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몽땅 다 가져가야 직성이 풀린단 말인가?

만약 사봉봉이 황후가 아니었다면, 그는 진작 소매를 걷어붙이고 한바탕 몸싸움을 벌였을 것이다. 도대체 어찌 생겨 먹은 인간이란 말인가? 이렇게 사람을 못살게 굴다니……. 그러나 그에겐 가여운 척을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마마, 잘못 아신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많지 않을 텐데요.”

“곽 대인은 모두 얼마인지 기억나세요?”

곽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이렇게 많지 않습니다.”

“모두 얼마인 것 같으세요?”

“다 합쳐 봐야 오만여 냥입니다.”

“곽 대인께서는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네요.”

사봉봉은 장부를 펴 놓고 그 중 한 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비가 갠 후 상비죽湘妃竹으로 만든 문발은 두 장당 은자 석 냥에 팔렸는데, 이 장부에는 은자 석 냥에 문발 한 장을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네요. 문발 천 장이면 삼천 냥, 여기 적힌 대로 이천 장이면 육천 냥이겠죠? 그리고 또 여기…….”

그녀는 또 다른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견사細絹紗도요. 저희가 궁에 판 가격은 한 필에 은자 여섯 냥이었죠. 그런데 이 장부에는 한 필에 열 냥이라고 적혀 있어요. 천 필이면 사천 냥이 비고, 이것만 합쳐도 일만 냥이네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곽도! 네가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그 목소리의 주인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곽도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세게 박으며 억울함을 고했다.

“황상, 소신은 너무 억울합니다. 통촉해 주시옵소서!”

묵용린은 사봉봉이 또 돈을 걷어 들인다는 소문을 듣고 얼른 달려왔다. 이런 일엔 힘을 보태 줘야 하지 않겠는가?

“억울하다?”

묵용린은 진심으로 분노가 치솟았다.

그동안 내무부가 부당한 이익으로 잇속을 차린다는 건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땔감이나 소금 같은 생필품에 관련된 일이라 일일이 관여하기 귀찮아서 적당히 눈감아 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방금 황후가 자세한 액수를 말하는 걸 듣자 그는 분노가 확 치밀어 올랐다.

자잘한 돈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장부를 멋대로 고친 것도 모자라 은자까지 몇천 냥이나 제 주머니에 넣었다. 몇 가지 품목만 계산했는데도 은자가 몇만 냥 정도 비다니! 그동안 내무부에서 얼마나 많은 은자가 새고 있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감히 억울하다는 소리가 나오느냐?”

묵용린은 바닥에 엎드린 그를 걷어차 버렸다.

“이 장부에 있는 품목들은 사가 상점에 있었던 황후의 손을 거친 것이다. 그녀가 또렷하게 기억하는데 네가 억울할 리가 있겠느냐? 사가 상점과 궁중의 장부를 모두 본 황후가 네놈의 꿍꿍이를 알아채지 못할까?

다른 건 모르겠지만… 황후는 영리하고 능력 있는 것으로는 천하에서 으뜸가는 사람이다. 그 능력은 사가 상호의 이름이 만천하에 퍼질 수 있게 할 정도다. 그런데 황후가 감히 네게 거짓으로 죄를 뒤집어씌운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사봉봉은 묵용린이 소식을 들으면 곧장 달려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곽도가 빼돌린 은자를 되찾는 일에 있어선 의견이 일치했다. 그래서 황제가 그녀에게 힘을 보태 주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묵용린이 자신의 능력까지 칭찬할 줄은 몰랐다.

황제는 아직도 불같이 화를 쏟아 내고 있었다.

“그래도 억울하다면 대리시大理寺에 낱낱이 조사하라고 짐이 명하는 게 좋겠군!”

곽도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새하얗게 질렸다.

만약 대리시가 나서서 대대적으로 사건을 조사한다면 틀림없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매형과 귀비 마마께도 누를 끼칠지 모른다. 만약 좌상과 허 귀비가 무너진다면 그들, 곽가와 허가는 모두 끝장날지도 모른다!

이쯤 되자 그는 엎드린 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황상,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소신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소신이 은자를 반환할 터이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묵용린은 고압적인 태도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목숨을 거둘지 말지는 네가 어찌 행동하는지에 달려 있다.”

“소신은 반드시 황상 말씀대로 행동하겠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은자를 모아 바치겠습니다.”

그제야 묵용린의 안색이 부드러워졌다.

“자네가 그리 말하니 짐이 다시 처결을 고민해 보지. 옥에서 이틀 동안 지내다 장부에 비는 은자를 다 채우게.”

곽도의 안색이 또다시 창백해졌다. 감옥에 들어가라니. 태어날 때부터 호강하고 살았던 그가 어찌 옥중 고통을 견딜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더 용서를 빌지 못하고 어림군御林軍에게 끌려갔다.

곽도가 끌려가자 실내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묵용린은 사봉봉과 일각도 함께 서 있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가 그를 대신해 국고를 채워 주고 있었으니 예의상 몇 마디는 건네야 했다.

그는 코끝을 만지작거리다 먼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수고하셨소, 황후.”

사봉봉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황상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건 신첩의 본분입니다. 전혀 수고스럽지 않습니다.”

묵용린은 발걸음을 떼다 말고 그녀에게 불쑥 한 마디를 건넸다.

“짐이 곽도 건을 어찌 처결할 것 같소?”

사봉봉은 미소를 지었다.

“황상께서 대노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으니 은자 오만 냥은 금방 국고로 들어올 것입니다. 곽 대인에 대한 처결은… 신첩 생각에는 목숨에 대해 염려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묵용린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떻게 알았소?”

“황상께서 엄벌을 내리시려 했다면 처음부터 대리시를 내세워 이 일을 철저히 파헤치셨겠지요. 하지만 그리하면 이 일에 연루된 사람이 줄줄이 나올 것이고, 또 그 여파가 얼마나 오래갈지 황상께서는 이미 마음속으로 짐작하시고 계십니다.

신첩의 짧은 소견으론 곽 대인이 은자만 토해 낸다면 황상께선 그를 따로 처결하지 않으시리라 짐작합니다. 어쨌든 곽 대인은 귀비 마마의 외숙부이니 체면은 봐주시겠지요.”

말을 마친 그녀는 마치 그의 칭찬을 기다리는 것처럼 빙글빙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순간, 그의 입에서 칭찬이 나올 뻔했다. 사봉봉은 그의 심중을 그대로 꿰뚫었다. 그가 필요한 건 은자였다. 그런데…….

감히 장사꾼의 딸이 군심君心을 함부로 알아맞히다니…….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죄를 물어야 할 일이었다. 그는 가난청을 제외한 다른 이가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걸 아주 싫어했다.

하지만 왠지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고수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동류의식이 싹트는 것 같았다. 그가 싫어했던 이 장사꾼은 말 한 마디 듣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았고 또 그와 호흡도 잘 맞았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매우 이상했다.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조사할 것이 있겠소?”

사봉봉이 대답했다.

“은자를 십만 냥이나 벌었으니 그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을 너무 벼랑 끝까지 떠미는 건 별로 좋지 않습니다. 황상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묵용린은 속으로 헉하고 놀랐다. 감히 이젠 그와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다음 할 일은… 궁중의 불필요한 지출을 삭감하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면 또 은자를 상당량 절약할 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사봉봉은 훌쩍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저것 좀 봐. 자기 이야기가 나오니 듣기 싫다고 가 버렸어!’

* * *

승덕전으로 돌아온 묵용린은 복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자신이… 사봉봉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던 제가… 그녀와 내무부 관아에서 편안하게 담소를 나눴다니. 그는 그 사실에 심기가 복잡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그녀와 나눴던 이야기를 토대로 문제를 면밀히 생각할 수 있었다.

며칠 후, 모든 건 사봉봉의 말대로 흘러갔다.

황제의 진노가 두려웠던 곽도의 가문에선 신속하게 은자를 모아 왔고 그 덕에 가문의 가주를 감옥에서 꺼내 올 수 있었다.

감옥 생활은 이틀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곽도는 괴로움에 견딜 수가 없었다. 감옥은 어둡고 습했으며 온갖 해충들이 그를 공격했는데, 그 고통은 차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딱딱한 침상은 물론이고 위에 깔려 있는 짚 깔개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간지럼이 일었다. 그리고 변기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그는 잠에 들 수 없었다.

권문세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자란 그가 어디서 이런 일을 겪어 보았겠는가? 겨우 이틀에 불과했지만, 그는 그 안에서 일 년을 보낸 것 같았다.

다시 만난 하늘을 우러러보며 그는 장탄식을 내뱉었다.

그가 고생하며 애써 끌어 모은 돈은 이렇게 다시 국고에 귀속되었다.

그는 사실 자세히 계산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그가 횡령한 돈이 진짜 십만 냥이 되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많은 돈을 횡령하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두아竇娥(누명을 쓰고 죽은 희곡의 주인공)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건 모두 그 천한 장사꾼인 사봉봉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녀가 장부를 들쑤시지만 않았더라면 그가 이런 지경에 빠졌겠는가?

그는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았다. 비록 황제가 그의 목을 치지는 않았지만 대신 내무부 대총관 자리에선 파면시켰다. 위풍당당했던 곽 대인이 내무부에서 일하는 소관사로 좌천된 것이다. 하지만 하는 일은 전과 똑같았고, 또 부당한 이익을 취할 수도 있는 자리였다.

사실 그는 좀 어리둥절했다. 황제가 이렇게 한 건 그에게 주는 일종의 보상일까? 아니면 그가 다시 욕심을 부리는지 시험에 들게 하는 걸까?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좌상을 찾아갔다. 그리곤 매형에게 미궁에 빠진 자신에게 해야 할 바를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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