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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96)화 (1,096/1,192)

제1096화

옆에 있던 허 귀비는 즉시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은자 오만 냥은 비록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외숙부가 지불할 수 있는 돈이었다. 외숙부가 내무부의 빈 금액을 보태기만 한다면, 황제는 분명 외숙부를 용서할 것이다.

“황후. 그 동안 고생이 많으셨소.”

묵용린이 이어서 말했다.

“이건 고생한 황후께서 드시는 게 좋겠군.”

사봉봉은 몰래 이를 악물었다. 이런 반격이라니! 설마 묵용린이 자기가 먹던 음식을 먹으라고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허 귀비는 황제의 말을 듣고 기뻐했다. 먹다 남은 것을 먹으라고 하는 건 황후의 체면을 대놓고 깎는 처사였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황상이 자신이 먹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사하는 건 느낌이 달랐다. 왠지 뭐라 말할 수 없는 친근함이 느껴지는 것 같달까…….

“황후, 뜨거울 때 드시오. 식으면 효험이 그리 좋지 않다고 하지 않았소?”

묵용린은 사봉봉이 방금 한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녀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제왕이란 무릇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아야 했지만, 그는 눈썹이 살짝 올라간 게 의기양양한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는 뒤끝이 있는 사람이라 복수할 기회를 잡으면 절대 놓치지 않았다.

묵용린은 한가로이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봉봉은 느릿느릿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만 뻗으면 그릇이 닿을 만큼 다가왔는데도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로 그때, 사봉봉이 발을 삐끗하더니 곧장 그를 향해 넘어졌다.

놀란 묵용린은 얼른 일어나 몸을 피했다. 황제가 황급히 도망가는 모습을 보이다니. 그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는 크게 호통쳤다.

“사봉봉!”

사봉봉은 서안에 엎드린 채 배를 움켜쥐고 끙끙 앓았다.

그녀가 아파하는 걸 보자 그 역시 더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아파하고 있는 사람에게 죄를 묻는 건 적절치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황후가 아닌가? 그것도 아주 총명한 황후였다. 조금 전에 그가 슬쩍 눈빛만 보냈는데도 그녀는 필요한 은자의 금액을 허 귀비가 들을 수 있게 흘렸다.

항상 똑똑한 여자를 좋아하던 묵용린이었지만… 하필 그녀는 장사꾼이었다.

당나귀 아교가 담긴 그릇은 이미 땅바닥에 떨어져서 사방으로 튀었다.

사봉봉은 고개를 슬쩍 들고, 차갑게 얼어붙은 묵용린의 안색을 살폈다. 서안을 짚고 일어난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배를 주물렀다.

밖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던 사희와 왕장량이 즉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얼른 궁녀를 불러 바닥을 치우게 했다.

묵용린은 어두운 안색으로 걸어 나가 버렸다.

황제가 나갔으니 사봉봉도 더는 아픈 시늉을 할 필요가 없었다. 배에 있던 손을 내린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황제를 따라갔다.

허 귀비는 그런 황후를 보며 조소를 지었다. 감히 고육지책을 쓰다니… 정말 염치도 없구나.

그런데 황제가 황후를 도깨비 보듯 피하는 모습은 좀 의아했다. 황후가 얼마나 싫길래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두 사람이 물러가겠다고 하자 황제는 손사래를 쳤다.

허 귀비는 너무 서러웠다. 예전에 황상은 그녀를 이렇게 대하지 않았다. 그때도 비록 다정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늘 미소가 있었고 어투도 온화했다. 아무래도 황후가 있어 제게 더 냉랭하게 대하는 것 같아 그녀는 속으로 탄식을 삼키며 물러갔다.

사봉봉은 고개를 슬쩍 들고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황제 역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쩐지 그의 눈빛이 약간 복잡했다. 경고하는 것 같기도 했고, 조금 의아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봉봉이 오늘 온 이유는 묵용린이 아직도 그녀를 두려워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으니 적당히 물러가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렇게 그녀는 빙긋 미소를 짓더니 가 버렸다.

나무 뒤에 있던 금천아는 황후가 오는 걸 보고 재빨리 뛰어나와 물었다.

“허 귀비는 왜 왔죠?”

사봉봉이 대답했다.

“어젯밤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직접 와서 살피지 않으면 어찌 안심할 수 있겠느냐?”

“그럼… 황상께서 당나귀 아교는 드셨어요?”

“드셨지.”

금천아는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곤 복도에 서 있는 황상을 바라보다 되물었다.

“황상께서 그걸 정말 드셨단 말이에요?”

“딱 한 입 드셨다.”

사봉봉이 한 마디 덧붙였다.

“나머지는 내게 하사하셨고.”

금천아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황상께서 당신이 드시던 걸 마마께 먹으라고 했단 말입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사봉봉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네 생각에도 그건 좀 심했지? 음험하고 교활해.”

그녀는 그의 의도를 읽고 내무부에 채워야 할 금액을 일부러 흘렸는데… 그놈은 도리어 반격을 시도했다! 이런 게 음험하고 교활한 것이 아니면 뭐겠는가?

그녀는 금천아에게 물었다.

“왜 나무 뒤에 숨어 있었어?”

금천아가 멋쩍은 듯 웃었다.

“황상께서 나오시는 걸 봤어요. 안색이 별로 안 좋으시던데… 소인에게 괜히 불똥이 튀어 면사 금패를 빼앗아 가시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그건 마마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소인을 위해 얻어 주신 건데 소중히 여겨야죠.”

사봉봉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니… 다행이구나.”

* * *

허 귀비는 사람을 보내 곽도에게 즉시 입궁하라 일렀고, 그가 도착하자 그에게 자신이 들은 정보를 알려 주었다.

“외숙부, 황상께서 직접 본궁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외숙부께서 그 돈을 다시 메꿔 놓으시면 황상께서도 내무부의 부패를 더는 따지지 않으실 거예요.”

곽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황후가 오만여 냥이라고 말했습니까?”

황후가 내무부의 장부를 살펴보기 시작한 뒤, 그는 수중에 있던 은자를 전부 모으고 골동품이나 그림 같은 것들도 모두 헐값에 처분했다. 그러자 그 총액이 오만 냥이었다. 어떻게 황후가 이 금액을 알아맞힐 수 있었지?

곽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허 귀비는 답답한 마음에 그를 다그쳤다.

“외숙부, 은자 오만 냥… 낼 수 있는 거죠?”

곽도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전 재산이 바로 오만 냥입니다. 그걸 다 내놓으면 이 외숙부는 무일푼이 됩니다. 그러면 귀비 마마의 외숙모와 사촌 자매들은 어떻게 합니까? 곽부에 입이 얼마나 많은데, 먹고살 돈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 귀비가 그를 타일렀다.

“외숙부의 녹봉이면 식구들이 먹고 입는 데는 문제가 없잖아요. 빨리 내무부에 돈을 채워 놓으세요. 목숨을 보전하는 게 중요하죠. 청산은 남겨 둬야 땔나무 걱정이 없다고, 태풍은 피하고 후일을 도모해야 해요. 잃은 돈은 다시 방법을 생각해 찾아오면 되잖아요.”

곽도는 허 귀비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렇게 큰돈을 내놓자니 좀 망설여졌다. 제 주머니에 든 은자를 내주는 게 생으로 살점을 베어 내는 것보다 더 아팠다.

허 귀비가 다그쳤다.

“외숙부!”

결국 곽도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은자를 모아서 내무부 차액을 채워 놓겠습니다.”

그제야 허 귀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외숙부가 욕심을 부려 일이 힘들어질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너무 분해서…….”

곽도는 눈빛을 번뜩였다.

“도저히 그냥 못 넘어갑니다.”

허 귀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궁도 이 원한은 그냥 못 넘어가요. 이번에는 우리가 운이 나빴어요. 하필이면 사봉봉에게 걸려서! 그녀는 사가 상호의 소주인장이기에 과거에 기록했던 장부까지 뒤져서 계산한 거예요. 그걸 하나하나 다 찾아내다니!”

곽도가 말했다.

“이번 일은 이 외숙부의 탓도 있습니다. 애당초 장부를 하나 더 기록했어야 했는데. 사봉봉은 장사꾼이니 은자에 아주 민감할 겁니다. 그렇게 많은 은자를 보고 욕심내지 않을 리 없죠.”

“외숙부.”

허 귀비가 그를 일깨웠다.

“그녀에게 은자로 트집 잡는 건 아무 소용없어요. 사가는 국고에 버금갈 정도로 은자가 많아요. 얼마든지 은자를 내놓을 수 있어요. 황상께서 그녀를 황후로 세운 이유가 사가 상호의 은자 때문이에요. 다른 데부터 손을 대야 해요.”

그러자 곽도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렇다면 마마의 말씀은…….”

허 귀비는 냉담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한 마디 했다.

“악독한 황후는 동월의 체면을 깎아내릴 거예요.”

* * *

묵용린은 온종일 마음이 뭔가 허전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듯한 이상한 기분이 저녁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혼자 서재에 앉아 차를 마실 때 비로소 그것이 뭔지 뇌리에 번쩍하고 떠올랐다. 그는 오늘 사봉봉의 언행을 검은 책자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책상 맨 아래에서 책자를 뽑아냈고, 붓에 먹물을 적셔 장사꾼 여인의 악행을 기록했다. 비로소 그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차를 마시던 그는 낮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그는 사봉봉과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봉봉은 그의 눈빛만 보고도 그의 뜻을 알아챘다.

그는 예전에 묵용청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늘 아래 사봉봉만이 그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와 사봉봉 모두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그는 그저 우스갯소리로만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사봉봉은 황후의 역할도 그런대로 잘 하고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냥 괜찮은 정도일 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싫지 않았다면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부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명은 조정에서 문무를 섭렵하고, 다른 한 명은 후궁에서 똑똑하고 능력 있게 내조하여 둘이 함께 손잡고 동월을 부강하게 만드는 한 쌍의 부부…….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그녀가 너무 싫었다. 정말 끔찍하게 싫었다.

그녀는 당나귀 아교를 먹지 않기 위해 일부러 서안에 부딪쳤다.

온몸에 돈 냄새가 진동하는 장사꾼 여인네 주제에 감히 고귀한 황제가 먹던 걸 꺼리다니! 정말 개가 웃을 일이지! 제 분수도 모르고!

그는 그녀의 뺨을 한 대 쳐야 이 울분이 가실 것 같았지만,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그의 약점을 알아낸 그녀는 지금 어느 때보다 기고만장해져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그는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찻잔을 든 채 넋을 놓고 있어 그는 찻물이 식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이 여자에게 이렇게 당할 수는 없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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