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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95)화 (1,095/1,192)

제1095화

월규는 차를 마신 뒤 오래 있지 않고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에게 허 귀비가 고고에 대한 효심을 담은 것이라며 보따리를 챙겨 주었다. 월규는 사양하지 않고 보따리를 받아 들고는 소락에게 넘겼다.

벽요궁을 나오자 소락이 보따리를 위아래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고고, 꽤 묵직합니다.”

월규가 보따리를 훑으며 웃었다.

“주인께서 노비에게 상으로 내린 것이니 받지 않을 수 없지. 잘 갖고 있거라.”

얼마 가지 않아 소락은 월규가 승덕전으로 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고고, 어딜 가시는 겁니까?”

“봉명궁으로 갈 것이다. 황후 마마를 뵈러 가자꾸나.”

봉명궁은 그리 멀지 않았기에 금세 도착했다.

월규를 발견한 금천아는 빠르게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친절하게 말했다.

“고고, 오셨습니까?”

월규가 웃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금천아, 마마께서는 무얼 하시느냐?”

“마마께선 장부를 보고 계십니다!”

“황후 마마께서 고생이 많으시구나. 그래도 네가 푹 쉬시라고 자주 말씀드리렴. 옥체가 상하시면 안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마마께서는 황상을 돕는 일이 곧 본인을 돕는 것이니 전혀 힘들지 않으시대요.”

월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 마마께서 옳은 생각을 하시는구나. 한 식구끼리 편을 가르지 말아야지. 황상께서 마마의 마음을 아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야.”

사봉봉은 안에서 장부를 보고 있었다.

월규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장부를 힐끔거렸다.

사봉봉은 그제야 그녀를 발견하고는 웃으며 맞이했다.

“고고, 오셨어요?”

월규는 탁자에 산처럼 쌓인 장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태후께서 황후가 되셨을 때, 태상황께선 이런 걸 맡기는 것도 안쓰러워하셨지요. 그저 마냥 즐겁게 놀 수 있게만 해 주셨는데. 이러니 다들 제대로 된 부군을 찾아야 한다고…….”

그녀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수습에 나섰다.

“물론 마마와 태후께선 상황이 다르지요. 마마께선 이미 가업을 돌보신 지 오래니까요. 황상께선 마마가 하릴없이 지내면 오히려 병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을 맡기셨을 겁니다. 그러니 황상을 너무…….”

“고고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저도 다 알아요. 황상께서도 제가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이라는 걸 알고 시키셨을 테지요.”

사봉봉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매번 월규 고고는 말을 하다가도 정신이 팔려 딴 길로 새곤 했다. 그녀로선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할 노릇이었다.

월규가 말했다.

“일이 많으시다는 건 알지만 황상께도 관심을 기울여 주세요. 어젯밤 황상께서 배탈이 난 일은 마마께서도 아시지요?”

사봉봉이 대답했다.

“예, 들었어요.”

“황상을 뵈러 다녀오셨습니까?”

사봉봉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요.”

“마마께서 돌봐 드려야 합니다. 이 고고는 다른 건 바라는 게 없고 그저 마마와 황상께서 서로 정답게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황상께서는 성미가 곧은 분이라 이런 부분을 잘 모르십니다. 그러니 마마께서 힘이 닿는 데까지 세심히 챙겨 주세요. 그러다 보면 마마와 황상의 관계도 좋아지실 겁니다.”

사봉봉이 웃으며 말했다.

“요즘 저와 황상은 제법 사이가 좋은 편입니다. 부부는 상대여빈相對如賓해야 한다고, 서로를 손님처럼 극진히…….”

“두 분이 상대여빈이라니요. 얼음장처럼 차갑게 대하시는 게, 상대여빙相對如冰이라고 해야 맞지요.”

월규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태후께서 하시는 것처럼 해 보세요. 황상께 몇 마디 따뜻한 말도 해 보시고 애교도 좀 부리시고요. 말다툼도 좋습니다. 이렇게 서먹하게 지내는 것만 빼고 뭐든 다 좋아요. 두 분이 서로를 어려워하시면 지켜보는 이 고고도 힘이 듭니다.”

그녀는 소락에게서 보따리를 건네받아 펼쳤다. 안에는 전부 좋은 것들만 들어 있었다. 당나귀 아교, 녹용, 제비 집, 인삼 등등…….

월규가 보따리를 사봉봉에게 건네며 말했다.

“마마, 이걸로 보양 탕을 끓여 황상께 보내 드리십시오. 어젯밤 구토를 하셨으니 황상께서는 몸을 보양하셔야 할 테니까요.”

사봉봉이 사양했다.

“제가 고고 걸 어찌 받아요. 도로 가져가세요. 저한테도…….”

“소인한테도 많습니다. 전부 다 황상께서 상으로 주신 것들이지요. 다 먹지도 못할 정도입니다.”

월규는 보따리를 그대로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마, 소인이 한 말 잘 기억하십시오. 오늘 꼭 황상을 보러 가셔야 합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소락이 웃으며 말했다.

“고고, 남의 걸로 인심을 쓰시는 겁니까?”

월규는 사봉봉이 쫓아올까 봐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고고는 그저 황상과 황후께서 하루빨리 사이가 좋아지시길 바라는 것뿐이다. 두 분이 편안히 지내셔야 나도 빨리 남쪽으로 가서 태후를 모시지.”

월규가 물건들을 떠넘기고 도망가자 사봉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와 묵용린을 맺어 주기 위해 월규 고고는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금천아가 물었다.

“마마, 정말 황상을 뵈러 승덕전에 가실 거예요?”

사봉봉이 대답했다.

“본궁이 월규 고고의 수고를 헛되게 할 수는 없어. 가 봐야지.”

금천아는 고개를 숙이고 보자기 속에 든 보양 음식을 바라보았다.

“쯧쯧, 정말 좋은 것들이네요. 월규 고고께서 애장품을 다 내놓으셨네요. 마마, 황상께 뭘 고아 드려야 되죠?”

사봉봉이 당나귀 아교를 가리켰다.

“이걸로 하자.”

금천아가 더듬거렸다.

“…당나귀 아교요? 마마, 정말 황상께 당나귀 아교를 고아 드릴 거예요?”

사봉봉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느린 걸음으로 복도로 나가 승덕전 방향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황제를 겁주러 가지 않았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황제를 조금 쉬게 하기 위해서였다.

황제에 관한 일에 대해선 그녀도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적막한 구중궁궐에서의 삶이 앞으로 창창하니 하나도 조급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월규 고고가 특별히 찾아와 요청하니, 그녀의 마음속에 황제의 비밀을 알고 싶은 호기심이 또다시 꿈틀거렸다. 한동안 풀어 줬으니 이제는 밧줄을 좀 당겨야겠다.

* * *

하지만, 승덕전에서 허 귀비를 만날 줄은 몰랐다.

전각 한가운데 서 있는 허 귀비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한없이 가련했다.

반면 묵용린은 서안 뒤에서 미간을 찡그리고 앉아 있었다.

푹 고아진 당나귀 아교를 받쳐 든 사봉봉은 걸음을 멈춰선 채 난감해했다. 만약 여기에 그녀가 있는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봉봉은 대혼을 치르기 전부터 묵용린이 좋아하는 사람은 허설령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 여겼기에 자신이 때를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신첩은 귀비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황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 신첩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그녀가 몸을 돌려 다시 나가려는데, 묵용린이 얼른 입을 열었다.

“거기 서시오.”

사봉봉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선 한참 조용했다.

허 귀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더 안쓰러운 모습을 보였고, 사봉봉은 더욱더 난처해졌다.

묵용린 또한 당황했다. 그렇게 말 잘 듣고 착한 허 귀비가 승덕전으로 달려올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감히 그를 찾아오다니, 여인이란 원래 혼인하기 전과 후가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하긴, 어젯밤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허 귀비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두렵고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몇 마디 위로를 건네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일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허 귀비는 다행히도 사봉봉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자 자리를 피했지만 어색해진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무슨 핑계를 대고 허 귀비를 돌려보낼까 고민하던 중, 사봉봉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녀는 귀비를 보더니 돌아가려 했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황후를 불러 세웠다. 후회막급했지만, 이미 입을 연 이상 황후에게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손에 든 게 무엇이요?”

그가 묻자 사봉봉이 대답했다.

“어젯밤에 황상께서 속이 불편하셨다고 하길래 몸을 보하시라고 보양식을 좀 끓여 왔습니다.”

그녀는 그릇을 들고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천천히 다가오자 묵용린의 심장이 점점 더 격렬하게 박동했다. 하지만 그는 침착한 척 말했다.

“서안 위에 올려놓으시오.”

사봉봉은 명령대로 그릇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황상, 뜨거울 때 드십시오. 식으면 효험이 떨어집니다.”

묵용린은 사실 먹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들을 다 물리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물러가라는 명도 적절치 않았다.

그는 결국 그릇을 들고 작은 숟가락으로 한 입 떠먹었다. 맛은 달콤하면서도 조금 느끼했다.

“이게 뭐요?”

그가 물었다.

“당나귀 아교에 복숭아꽃의 꿀을 좀 섞었습니다. 달콤하지 않습니까?”

묵용린은 경악했다.

지금 달콤한 게 중요한가?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 사봉봉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짐에게 당나귀 아교를 먹이려는 것이오?”

사봉봉이 설명했다.

“『강목십유綱目拾遺』라는 서책에는 당나귀 아교가 보혈에 좋고, 간을 보양하며 기력을 북돋고 근육을 이완시킨다고 했습니다. 또한 정력을 더하며 신장을 튼튼히 한다고…….”

황제의 안색이 점점 나빠지자 그녀는 그가 오해할까 두려워 급히 설명을 마무리했다.

“주로 보혈하고 간을 보양하는 약재입니다.”

허 귀비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황후가 지금 스스로 화를 자초하려는 것인가? 황후가 만든 폭풍전야의 살벌함이 멀리 있는 그녀에게도 느껴졌다.

사봉봉을 바라보는 묵용린의 눈빛이 점점 매서워졌다.

하지만 사봉봉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살짝 시선을 내린 채 온순한 척했다.

허 귀비는 황제가 곧바로 황후에게 물러가라고 호통칠 거라 생각했지만 묵용린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께서 이렇게 발걸음을 한 건 또 다른 일이 있기 때문이지 않소?”

사봉봉이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한 사람은 위엄이 넘치는 냉혈한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기세가 대단했고, 다른 한 사람은 상대의 매서운 기세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신첩, 또 한 가지 아뢸 일이 있습니다.”

사봉봉이 계속 이어서 말했다.

“내무부에서 비는 은자를 계산했습니다. 대략 오만여 냥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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