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4화
사봉봉은 추측하기도 귀찮아서 대충 받아쳤다.
“어떻게 됐는데?”
금천아가 허리를 숙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또 병이 나셨습니다!”
사봉봉은 풉 하고 국물을 내뿜었다.
“또 마상풍에 걸리셨다고?”
“마마, 마상풍이랑 웬수라도 지셨습니까? 지난번 일은 다 잊으신 겁니까? 마마께서 또 그 말을 꺼내신 걸 황상께서 아신다면 소인의 면사 금패를 마마께 드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봉봉이 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럼 어떻게 된 건데?”
“듣자니 배탈이 나셨다던데요. 승덕전으로 돌아가 태의를 불러 약을 드셨답니다.”
사봉봉은 또다시 놀라 물었다.
“황상께서 벽요궁에서 음식을 드시고 배탈이 나셨다고?”
이건 결코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괜찮으시다느냐?”
“그건 소인도 모릅니다. 별로 심각하진 않겠지요. 약을 드셨으니 이제 괜찮으실 거예요.”
“벽요궁 쪽은 어떻다지?”
“듣자니 허 귀비가 남은 음식을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였답니다. 금위군에서 조사하러 올지도 모른다고요.”
사봉봉은 조금 의아했다.
“허 귀비같이 신중한 사람이… 어찌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금천아가 고소하다는 듯 말했다.
“누가 알겠어요?”
금천아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내무부의 탐오 사건과 관련이 있진 않을까요? 곽도는 허 귀비의 외숙부니까 외숙부의 처벌을 막으려고 허 귀비가 황상을 독살하려 마음먹었을지도 몰라요.”
사봉봉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허 귀비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짓을 했다면 그녀의 외숙부뿐만 아니라 허씨, 곽씨 가문의 수백 명이 목숨을 잃게 될 거야.”
금천아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시시덕거렸다.
“소인도 그냥 해 본 말입니다.”
* * *
이튿날 아침, 노낙원 의정은 어젯밤 황제가 진료를 받았다는 보고에 유 의승의 뺨을 두 차례나 쳤다.
그는 의료 책자로 유 의승의 얼굴을 내리치며 말했다.
“아무것도 적지 않다니! 넌 대체 무엇 하는 놈이냐? 황상께서 재채기만 하셔도 큰일이거늘. 배가 아파 구토를 하셨는데도 원인조차 묻지 않았다고? 넌 네가 뭐든 다 고칠 수 있는 신선이라 생각하느냐? 아니면 사희 공공이 부르러 왔을 때 머리를 두고 따라간 것이냐!”
노 의정은 의술이 뛰어난 만큼 욕하는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그는 한번 욕을 퍼붓기 시작하면 상대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를 때까지 쉬지 않고 공격했다.
기력이 다 빠질 만큼 욕을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그는 황제가 조회를 마쳤을 때쯤 승덕전을 찾아갔다.
묵용린은 대신들과 정무를 논의 중이었기에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바깥에 서서 황제가 자신을 불러 줄 때까지 기다렸다. 높게 솟은 태양이 그의 등을 축축하게 적셨지만 차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왕장량은 그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황제에게 들어가 고했다.
황제는 그제야 그를 불러 맥을 짚게 했다.
노 의정은 정신을 집중해 황제의 맥을 짚은 뒤, 어젯밤 일을 상세히 물었다.
그의 질문이 성가셨던 묵용린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물렸다.
황제의 기분이 나빠 보이자 노 의정은 오히려 한숨 돌렸다. 화를 낼 기력이 있는 걸 보니 황제의 옥체는 건강한 듯싶었다.
승덕전을 나온 그는 복도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모퉁이를 도는데 분주히 다가오는 월규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쪽으로 비켜서며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넸다.
월규도 어젯밤 황제가 배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남서방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온 정신을 황제에게 쏟은 채 걸어가던 그녀는 누군가 말을 걸자 화들짝 놀랐다. 다름 아닌 노 의정이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
“황상께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그렇소.”
노낙원은 조급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황제를 염려한다는 걸 깨달았다.
“고고, 걱정하지 마시오. 방금 황상의 맥을 짚었더니 옥체 무탈하시오.”
월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진 않았다.
“황상께선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노낙원이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선 지금 대신들과 정무를 논의 중이시오. 정신도 더없이 맑으시오. 어젯밤 약을 드시고 편안히 주무셨다고 하오. 아침에 기침하셔서는 해삼 죽 한 그릇, 올방개 떡 두 접시, 소고기 내장 볶음 한 접시에 양유까지 한 잔 드셨다고 하셨소. 안색도 정상이고 목소리 또한 평소와 다름없이 우렁차셨소.”
월규는 그제야 마음을 푹 놓았다. 황제를 방해하지 않으려 돌아가려는데 노낙원이 말을 걸었다.
“고고의 안색이 좋지 않소. 간밤에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오?”
월규가 말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좀 무겁습니다. 밥을 먹고 잠시 낮잠을 자면 괜찮아질 겁니다.”
노낙원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고고께 맥을 짚어 드리겠소.”
그 말에 월규는 당황했다. 복도에서 맥을 짚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분명 시답잖은 말이 오갈 것이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별일 아닐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세웠다.
“그럼 전 다른 일이 있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시어요.”
뒤에서 노낙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고께 더위를 식혀 주는 약을 지어 조만간 보내 드리겠소.”
월규는 그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 옆에 있던 소락이 몰래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고고, 지난번에 소인이 뭐라 하였습니까. 노 의정께서 고고를 유독 세심하게 챙겨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월규가 손을 뻗어 그녀를 꼬집었다.
“망할 계집애, 그 얘기 한 번만 더 꺼내 봐.”
소락은 시시덕거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얼굴이 화끈거린 월규는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다. 노낙원은 아직도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너무 민망했던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소락을 뒤쫓았다.
“망할 계집, 거기 안 서?”
고개를 돌려 노 의정의 모습을 확인한 소락은 더욱 크게 웃었다.
궁에 들어온 지 겨우 이삼 년밖에 되지 않은 소락은 위중청을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월규가 위 의정 때문에 머리를 틀고 시집을 가지 않겠다는 뜻을 표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알기에 위중청에 대한 그녀의 인상은 좋지 않았다.
반면에 노 의정은 아주 괜찮은 사람 같았다. 성격도 진중하고 배려심도 깊어 보였다. 월규 고고가 노 의정과 함께한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월규는 묵용린과 관련된 일은 뭐든 중요하게 생각했다. 황제가 벽요궁에서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났다는데… 황제가 추궁하지 않는 게 그녀는 내키지 않았다. 어쨌든 허 귀비는 황제가 마음에 두었던 여인이 아닌가. 노비인 그녀가 귀비를 질책할 순 없지만 아주 조금 일깨워 주고 싶었다.
결국 그녀는 소락을 데리고 벽요궁으로 향했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허 귀비는 얼굴이 수척해졌다. 거울 앞에서 한참 동안 치장을 했지만 눈 밑의 검은 그림자는 가릴 수 없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오전 내내 기다렸지만 어제 저녁 식사를 조사하러 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의아하게 여기던 찰나… 어린 궁녀가 안으로 달려와 고했다.
“마마, 월규 고고가 오셨습니다.”
허 귀비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도한 성격인 그녀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모든 이들에게 냉담하게 대했다. 하지만 월규는 달랐다.
월규는 태후께서 궁에 남겨 둔 유일한 심복이었기에, 효심이 깊은 황제가 그녀를 웃어른처럼 대하며 남다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걸 허 귀비 또한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속으론 월규를 보잘것없는 노비라 여길지라도 차마 불손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월규가 무릎을 굽히고 예를 갖추자 허 귀비는 서둘러 그녀를 일으켰다.
“고고, 이리 예를 갖추시지 마세요.”
그녀는 월규를 부축해 의자에 앉히고는 자신도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궁녀에게 차를 내오라고 분부한 뒤, 월규에게 웃으며 물었다.
“고고, 오늘은 어인 일로 벽요궁을 찾아 주셨습니까?”
월규도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귀비 마마를 한동안 뵙지 못한 듯하여서요. 마마,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본궁은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 고고께서 걱정해 주시는 덕분이지요.”
“잘 지내신다니 좋습니다.”
월규는 말을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듣자니 황상께서 어젯밤 귀비 마마의 궁전에서 음식을 드시고 배탈이 나셨다지요?”
그 말을 들은 허 귀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상께서 식사하러 오신다는 소식에 본궁이 특별히 주방에 정성껏 요리하라는 분부를 내렸습니다. 한데 어쩐 일인지 황상께서는 음식을 드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토를 하셨지요. 본궁도 놀라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혹여 조사를 받아야 할까 봐 음식은 버리지 않고 계속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듣자니 황상께서 승덕전으로 돌아가신 뒤, 태의를 불러 약을 지어 드시고는 편안하게 숙면을 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조반도 맛있게 드셨다고 하셨고요. 그런 걸 보면 별 탈은 없는 것 같은데… 황공한 마음에 찾아뵈려 해도 정무에 방해가 될까 봐…….”
월규가 말했다.
“귀비 마마, 안심하십시오. 방금 노 의정이 다녀갔는데 황상께선 더없이 건강하시다고 합니다. 지금은 대신들과 정무를 논의하는 중이십니다.”
허 귀비가 곧장 합장하며 말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황상께서 무탈하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월규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귀비 마마께서 이리 걱정하실까 봐 소인이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이제 안심하십시오. 다만…….”
허 귀비는 월규의 미소와 예를 갖춘 말투 덕에 마음을 놓으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다만’이라는 말에 그녀의 마음은 또다시 두근거렸다.
월규는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황상의 옥체는 금보다 더 귀중한 법입니다. 잔병치레만 하셔도 큰일입니다. 태후께서 남쪽으로 가시기 전, 소인에게 황상을 잘 돌봐 달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소인은 그 명을 받들어 제 마음을 다해 황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다행히 황상께서는 어려서부터 체격이 건장하셨고 이제 한창일 나이라서 다른 건 달리 걱정되지 않습니다. 다만 드시는 음식만큼은 늘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요, 귀비 마마?”
허 귀비는 그녀의 말을 듣는 내내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월규 고고란 자는 결코 얕잡아 봐선 안 될 사람이구나.’
그녀는 두 눈을 내리깔고 새색시다운 모습을 보였다.
“고고 말씀이 옳습니다. 본궁도 반드시 이 점을 기억하겠습니다.”
월규도 허 귀비가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몇 마디 건넨 걸로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