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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93)화 (1,093/1,192)

제1093화

허 귀비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솔직히 대답했다.

“아, 네. 신첩, 평소에도 이렇게 먹습니다.”

묵용린이 건드리지도 않은 음식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런 것들은 버려지는 것이오?”

허 귀비가 확실하지 않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낭비라는 생각 안 드오?”

묵용린이 말했다.

“고생해서 만든 음식을… 한 입도 먹지 않고 버리다니.”

“…….”

궁에서는 늘 이렇게 하지 않았던가. 어찌 그녀에게만 잘못을 지적한단 말인가…….

“지금은 국고가 넉넉지 않으니 귀비가 솔선수범하여 남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오.”

“예, 황상.”

허 귀비가 고개를 숙여 답했다.

“신첩, 황상의 말씀 잘 새겨듣겠습니다. 사치스러운 것을 삼가고 솔선수범하여 다른 자매들의 본보기가 되겠습니다.”

묵용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 귀비의 순종적인 태도가 퍽 마음에 들었다.

묵용린이 벽요궁으로 찾아온 것은 허 귀비의 잘못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 이제 할 말은 다 했으니 자리에서 일어나도 되었지만, 그래도 위로의 말은 건네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그녀의 외숙부에게 칼을 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조용히 앉아 있자 허 귀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황상, 차가 식었으니 신첩이 황상께 차를 다시 내어 드리겠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묵용린은 건성으로 짧게 대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차가 묵용린 앞에 놓였다. 향긋한 차 향에 묵용린은 감탄하며 말했다.

“좋은 차군.”

허 귀비가 단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첩이 친정에서 가져온 찻잎입니다. 고산차지요. 매년 봄과 가을에 찻잎을 따서 부드러운 잎만 덖어 만듭니다. 황상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신첩이 내일 승덕전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묵용린이 웃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소. 짐에게도 찻잎은 많소. 만약 찻잎이 부족하거든 짐이 귀비에게 보내 주겠소.”

허 귀비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 인사를 올렸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녀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황상, 시간이 늦었으니 차를 다 드시면 바로 주무시지요.”

묵용린은 그녀의 시선에 어쩐지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는 내면의 불안을 감추기 위해 말없이 차를 마셨다.

허 귀비는 어떻게든 황제를 남게 하리라 다짐했다.

그녀가 금령에게 눈짓을 하자 금령은 조용히 나가며 문을 꼭 닫았다.

그녀는 남들에겐 도도했지만 황제 앞에서 도도함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어떻게든 몸을 낮추어 황제를 기쁘게 하면 그만이었다.

시집을 오기 전, 집안의 처첩들은 아버지를 구슬리는 데 능숙했다. 그들은 아버지의 어깨를 주무르거나 애교를 부리며 어떻게든 아버지를 자신의 방으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늘 그 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지금 그녀에겐 그들이 했던 방법밖엔 없었다.

그녀는 작은 은 가위로 초의 심지를 길게 뽑은 뒤, 황제의 뒤로 돌아가 두 손을 그의 어깨에 가볍게 올려 두었다. 안마를 해 주기 위해서였다.

묵용린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려다가 다시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번엔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두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핏줄이 불거질 만큼 힘껏 주먹을 쥐었지만 결국 ‘웩’ 하는 소리와 함께 구토를 하고 말았다.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대체 짐에게 무얼 먹인 것이오…….”

허 귀비는 화들짝 놀라서 황급히 소리쳤다.

“여봐라, 어서 안으로 들거라. 황상께서 구토를 하셨다!”

묵용린은 계속 구토를 쏟아 내며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 입 다무시오!”

바깥에서 대기하던 왕장량과 사희는 비명 소리를 듣고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금령도 따라 들어가고 싶었지만, 번개처럼 나타난 영십칠이 그녀의 앞을 막는 탓에 그러지 못했다. 영십칠의 눈빛이 어찌나 서늘한지 절로 몸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였다.

왕장량과 사희는 황제를 부축해서 서둘러 승덕전으로 향했다.

허 귀비는 문 앞까지 나와 어둠 속으로 점점 멀어지는 어가를 바라보았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매번 이리 뜻대로 되지 않는단 말인가…….

그녀가 문에 기대어 있자, 금령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마마, 어찌 된 것입니까?”

허 귀비는 정신을 차리곤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대체 짐에게 무얼 먹인 것이오…….”

별안간 안색이 하얗게 질린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금령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마마, 어찌 이러십니까?”

허 귀비가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

“치운 음식은 어디에 두었느냐?”

“주방에 있습니다.”

“누구도 손대지 말라 이르거라. 본궁… 본궁이 직접 가서… 봐야겠다.”

금령의 부축을 받아 주방으로 향한 그녀는 기다란 은침으로 음식을 찔러 보았지만 은침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허 귀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아랫사람들에게 분부했다.

“이 음식은 일단 이렇게 두거라. 나중에 누군가 검사를 하러 올 수도 있다.”

시종들은 질겁한 표정을 지은 채 불안에 떨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귀비의 안색이 좋지 않고, 황제가 급히 떠난 걸로 봐선 분명 무슨 사달이 난 듯했다.

묵용린은 승덕전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희에게 분부했다.

“태의를 들라 하라.”

사희가 물었다.

“노 의정을 부를까요?”

묵용린이 고민하다 대꾸했다.

“아니, 의승醫丞이면 된다.”

사희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빠르게 태의원으로 달려갔다.

결국 유 의승이 황제를 찾아왔다. 평소 황제의 잔병은 늘 의정이 돌보았고 저 같은 조무래기들은 고작 조수나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의 부름을 받아 그는 조금 얼떨떨했다.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유 의승이 조심스레 물었다.

“황상,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묵용린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 괴로움은 형용할 방법이 없었지만, 그는 기지를 발휘해 배탈이 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태의에게 진찰을 받지 않으면 의심을 살 터. 그래서 사희에게 속이기 쉬운 말단 의승을 불러오라고 한 것이다.

그가 힘없이 말했다.

“짐의 배가 조금 불편하구나. 이것저것 섞어 먹어서인 듯하니 약을 처방해 다오.”

유 의승은 알겠다고 대꾸한 뒤, 약상자를 열어 한참을 뒤지다가 자그마한 병을 꺼냈다. 이내 그는 그 병에서 새까만 환약 세 알을 꺼낸 뒤, 공손히 말했다.

“황상, 위장을 치료하는 약입니다. 물과 함께 삼키십시오. 만약 계속 불편하시거든 다시 신을 불러 주십시오.”

묵용린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옆에 앉아 있던 왕장량이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의승. 우선 돌아가십시오. 소인이 황상의 복약을 시중들겠습니다.”

왕장량은 이내 사희를 불렀다.

“의승을 배웅해 드리거라.”

유 의승은 엄청난 대우를 받는 듯한 기분에 연신 황송해하며 그럴 필요 없다고 대꾸했다. 황제를 모시는 이들은 전부 막강한 세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한데 어찌 공공에게 배웅을 받을까.

오래 머무를 수 없던 그는 서둘러 약상자를 매고 바깥으로 나가 찬바람을 쐬다가 별안간 정신이 들어 자신의 뺨을 때렸다.

황제를 진찰할 땐 상세하게 기록을 남겨야 했다. 어디에서 무얼 드셨는지… 배가 어떻게 아픈 것인지… 혹 위가 아프신 건 아닌지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아픈지도 중요했다. 바늘로 찌르듯 아픈 것인지, 휘젓듯 아픈 것인지. 또 계속 아픈 것인지 드문드문 통증이 오는 것인지도 기록으로 남겨야 했다.

이 모든 것들을 명확히 기록했어야 했는데.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맥조차 짚어 보지 않고 약부터 내밀었다. 그것도 궁녀나 태감들이 배가 아플 때 먹는 상비 위장약을…….

그는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길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지금 당장 번개를 맞아 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일 노 의정이 이 사실을 알면 절대 그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 * *

승덕전 안에 있던 묵용린은 화를 삭이지 못해 약병과 찻잔을 깨부쉈다. 그것도 모자라 청화 자기까지 집어 던지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그는 성질을 부리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 밤 일은 그를 너무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 노력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군왕으로서 이런 것 하나 제어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지금 궁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전부였다. 아직까지는 온갖 핑계를 대며 그들을 거절할 수 있다지만… 삼 년 후 수녀 선발로 수많은 여인들이 입궁했을 땐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어찌 천하의 모든 입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는 남녀 간의 일에 관심 없었다. 그저 황제로서, 왕위를 계승할 자식을 반드시 얻어야만 했다.

그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그간 느껴 보지 못한 실망과 절망이 솟구쳤다.

* * *

사봉봉은 근래에 밤늦게까지 장부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금천아가 아무리 타일러도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금천아는 할 수 없이 야식을 만들어 사봉봉에게 가져다주었다.

사봉봉은 장부 한 권을 다 읽고 난 뒤, 시큰거리는 목 주변을 어루만졌다.

금천아는 야식으로 만든 새알심탕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사봉봉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마마, 이제 그만 푹 쉬십시오. 황상께서 분부하신 일이라지만 어찌 그리 목숨을 걸고 매달리십니까?”

사봉봉이 말했다.

“황상을 위해서가 아니야. 우리 사가 상호를 위해서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도 알다시피 황상께서 날 황후로 책립하신 건 우리 사가 상호의 돈 때문이야. 그러니 궁 안에서 새는 돈은 틀어막고 거둬들일 수 있는 건 다 찾아내야지. 그렇게 아끼다 보면 큰돈이 모일 테고 국고도 다시 풍족해질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리 상호의 돈도 지킬 수 있잖아.”

금천아는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마께서는 그런 계획이 있으셨군요. 저는 황상께서 마마께 못되게 구시니 마마께서 목숨 걸고 일하시는 건 줄 알았습니다. 마마께선 정말 천하에서 가장 총명한 분이십니다.”

사봉봉이 탄식을 내뱉었다.

“천하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은 황상의 곁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지.”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더는 주무를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곤 금천아가 만들어 온 야식을 먹기 시작했다.

금천아가 말했다.

“마마, 오늘 황상께서 벽요궁에 가셨습니다.”

사봉봉은 아무 말 없이 먹는 데에만 전념했다. 그녀는 관심 없는 일엔 그닥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근데 어떻게 되셨는지 아십니까?”

금천아가 일부러 뜸을 들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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