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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92)화 (1,092/1,192)

제1092화

사희는 허리를 굽혔다. 심장이 자꾸만 벌렁거렸다. 조금 전 그가 모아 둔 정보를 보고하는데, 황제가 별안간 노발대발하는 탓에 정말이지 놀라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승덕전과 관련된 일은 맞아 죽는다고 해도 더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는 잠시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말씀드린 게 거의 다입니다. 대부분 곽도 대인이…….”

묵용린은 조금 전 화가 치솟아서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곽도가 왜?”

사희가 말했다.

“사가 상호는 황상皇商이라 궁 안의 물건 대부분을 사가 상호에서 들여옵니다. 그러니 가격만큼은 황후 마마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지요.

황후 마마께서 산처럼 쌓여 있던 장부를 한 권, 한 권 살펴보시더니 가격이 맞지 않는 걸 따로 찾아내 정리해 두셨습니다. 모두 다 합해 보니 거액이 빈다는 걸 확인했고 황후 마마께선 그걸 곽 대인에게 채워 놓으라 명하셨지요. 그것 때문에 곽 대인께선 마음이 크게 상하시어 여기저기에 호소하고 다닙니다.”

묵용린은 잠시 황당해하다 이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건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니더냐. 내무부를 징벌해야겠구나. 짐이 모를 줄 알고? 밖에서 들리는 소문엔 일 년 내무부 생활이면 십 년간 은자 눈꽃을 맞는다고 하더군. 참으로 짭짤한 관청이 아니더냐. 곽도가 일을 잘하기에 짐도 눈감아 주고 있었다. 가서 곽도가 메꿔야 할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보거라. 곽도의 목이 날아갈 정도인지 아닌지 말이다.”

사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황제를 일깨웠다.

“황상, 곽도 대인은 귀비 마마의 외숙부이자 좌상의 처남…….”

묵용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황후가 칼을 넘겼으니 본보기로 엄벌을 내릴 좋은 기회지. 그러게 곽도 그자는 왜 그리 애먼 짓을 했단 말이냐.”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서성거리던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석양이 하늘을 피처럼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가 사희에게 물었다.

“귀비는 요즘 어찌 지내느냐?”

“…….”

황상의 귀비이신데 소인이 어찌 알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공손히 말했다.

“분명 잘 지내고 계실 겁니다.”

묵용린이 잠시 고민하다 대꾸했다.

“벽요궁에 소식을 전하거라. 짐이 갈 테니 함께 어선을 들자고.”

사희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소식을 전하러 갔다.

묵용린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도 허설령과 함께 식사한 적이 있었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탁자가 커서 멀찍이 떨어져 앉은데다, 허설령은 사봉봉과 달리 예의가 바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별안간 장사꾼 사봉봉을 떠올린 묵용린은 또다시 땅이 꺼져라 탄식을 내뱉었다.

막 입궁했을 때만 해도 사봉봉은 깍듯이 예를 갖춰, 트집을 잡을 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면 갈수록 간사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약점을 알아낸 뒤 면사 금패 두 개를 빼앗아 가질 않나… 지금은 그의 어선 규율까지 바꿔 놓았다.

밖으로 나간 그는 영십칠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벽요궁에 갈 땐 짐에게 따라붙을 필요 없다. 문 앞만 지키거라.”

영십칠이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예.”

영십칠은 황상께서 황후 마마만 무서워하신다고 생각했다.

* * *

소식을 접한 허 귀비는 믿기지 않았다. 대혼 이후 황제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곱디고운 세 귀인이 궁에 들어 왔으니 그녀는 황제가 자신을 잊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가슴속에 한 가닥 희망은 품고 있었다. 그녀는 귀비였고 아버지의 지위도 높으니 황제가 그녀를 완전히 잊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가 그녀를 기억해 낸 것이다. 고진감래라고, 그녀는 뛸 듯이 기뻤지만 도도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녀가 사희에게 은자 주머니를 상으로 내려 주자 그는 귀비 마마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향을 피우고 깨끗하게 목욕한 그녀는 머리도 단정하게 빗고 화장까지 새로 했다. 또, 자신의 궁전 주방에다 황제가 드실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그녀는 꿈에 그리던 그분이 오시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묵용린이 벽요궁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저문 뒤였다.

허 귀비는 시종들을 이끌고 복도에 무릎을 꿇은 채 황제를 맞이했다.

묵용린이 말했다.

“일어나시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허 귀비는 장포 아래 드러난 황제의 신발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황제가 자신을 부축해 줄 거라 여긴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허공만 스쳤고, 민망함에 얼굴이 화륵 붉어진 그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용린은 사실 인정이 박한 성격이지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제법 그럴싸하게 꾸며 냈다.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귀비, 잘 지내고 계시었소?”

그의 말에 허 귀비는 별안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가 찾아 주지 않는데 그녀가 어찌 잘 지낼 수 있었을까?

복도에 걸린 등불이 은은한 빛을 내뿜는 가운데… 허 귀비의 눈시울에 조금씩 물기가 차올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섣불리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묵용린은 조금 의아했다. 허 귀비가 이렇게나 감동한 것이란 말인가?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란 탁자엔 궁녀들이 차려 놓은 음식이 있었다. 음식이 담긴 순백색 자기 그릇은 불빛에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다.

묵용린은 진수성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봉봉이 어선 규율을 바꾼 일이 떠오른 탓에 그의 안색이 별안간 어두워졌다.

허 귀비는 황제의 안색이 좋지 않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황상,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신첩이 잘못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묵용린은 손을 내젓고 자리에 앉아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허 귀비는 직접 황제에게 음식을 덜어 주었다. 은어를 한 국자 뜬 그녀는 묵용린 앞에 접시를 놓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이 음식을 좋아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신첩이 특별히 주방에 미리 준비해 두라고 분부하였지요. 어선방과 맛이 다른지 한번 드셔 보시지요.”

접시를 건네던 그녀는 묵용린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 바람에 순간 은은한 향이 묵용린의 코를 자극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그는 그제야 허 귀비가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담담히 몸을 옆으로 옮겼다.

“예전에 귀비와 식사를 할 땐, 귀비가 짐의 맞은편에 앉았던 것으로 기억하오. 고개를 들면 귀비를 볼 수 있었는데, 어째서 오늘은…….”

허 귀비는 곧장 그의 뜻을 이해하고는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속으로 실망을 금치 못했다. 맞은편에 앉았을 때야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사이라 조신하게 행동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혼사를 치른 부부인데 함께 앉지도 못한단 말인가?

허 귀비가 자리를 옮기자 묵용린의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는 허 귀비가 사봉봉보다 훨씬 대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밥을 절반쯤 먹었을 때, 묵용린이 한담을 하듯 입을 열었다.

“황후가 후궁을 정비하는 일을 귀비도 알고 있소?”

허 귀비는 안 그래도 오늘 황제에게 이 일을 얘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먼저 말을 꺼내 주니 그녀 또한 말하기 더 수월했다.

“신첩도 대강 들었습니다.”

“귀비는 어찌 생각하시오?”

“신첩은 예전부터 황후 마마께서 능력이 좋은 분이라고 들어왔습니다. 사 주인장을 도와 사가 상호를 아주 잘 돌보신다고요. 후궁의 업무 또한 아마 금방 손에 익히실 겁니다.”

묵용린은 그녀의 말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허 귀비는 전체적인 국면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황후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내무부에서 그리 많은 은자가 새는 것까지 알아내다니. 짐은 좀 뜻밖이었소. 내무부의 대총관을 맡고 있는 곽도의 일처리가 퍽 마음에 들었건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도 못 했소. 그가 도맡고 있는 와중에 이렇게 많은 돈이 빌 줄이야…….”

허 귀비는 깜짝 놀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황상, 신첩의 외숙부는 절대 법을 어기고 뇌물을 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황후 마마께서 잘못 아셨을 겁니다.”

묵용린이 고개를 저었다.

“황후가 상점을 돌본 게 몇 년인데… 엄청난 금액을 직접 다루던 사람이오. 이 정도 돈을 어찌 잘못 계산했겠소. 걱정할 것 없소. 아직은 누가 그 돈을 슬쩍한 것인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니 말이오. 짐은 곽도를 믿소. 게다가 귀비의 외숙부가 아니오? 정말 이 일이 곽도와 관련이 있다면… 돈을 토해 내면 되오. 짐도 그리 난처하게 할 생각까진 없소.”

허 귀비는 계속 무릎을 꿇은 채 작게 흐느꼈다.

“황상, 내무부는 음식과 옷감 같은 작은 것부터 크게는 제사와 어선까지…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을 관리해야 합니다. 신첩이 목숨을 걸고 장담하건대, 신첩의 외숙부는 절대 황상께 죄를 저지를 분이 아니십니다. 내무부에서 탐욕을 부린 자가 있다면 신첩의 외숙부가 빨리 알아채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디 황상께서 낱낱이 밝혀 주십시오…….”

묵용린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무표정으로 말했다.

“귀비, 짐이 명백히 조사하라고 분부할 테니 그만 일어나시오. 우리 동월의 선조들께선 후궁의 여인은 정사에 간섭할 수 없다고 가르치셨소. 게다가 귀비 또한 입궁한 이상, 황가의 사람이오. 앞으로는 섣불리 남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장담하지 마시오.”

허 귀비는 순간 저 깊은 곳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황제가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러 온 이유는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곽도에게 은자를 도로 메꿔 놓으라고 전하는 게 첫째였고, 둘째는 황제의 칼끝이 누구에게 향하든 궁비인 그녀는 간섭해선 안 된다는 뜻이었다. 더욱이 남을 위해서 사정해선 안 된다는 것 또한 경고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기에 황후를 흉보려던 말도 어쩔 수 없이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신첩, 잘 알겠습니다.”

묵용린은 한쪽에서 시중을 들던 금령에게 말했다.

“네 주인을 일으켜 드리거라.”

허 귀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입맛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황제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상, 더 드시지요.”

“배부르오.”

묵용린이 탁자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은 거의 건드리지도 않은 것 천지였고, 손을 댔다고 해도 극히 일부만 먹었을 뿐이었다.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귀비, 평소에도 늘 이렇게 먹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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