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1화
산응은 조금 화가 났다. 묵용청양이 처음 영십구를 데려왔을 때 그는 형제가 하나 더 생겼다고 여겼다. 한데 저 형제는 잘 어울리지도 않을 뿐더러 늘 쌀쌀맞았고 그들을 무시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 여기가 누구 구역인 줄 알고 감히 검을 뽑는 거야?”
영십구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미간엔 짙은 주름이 생겨 있었다.
소제갈은 큰일이 날 것 같은 예감에 서둘러 그들 가운데에 서서 상황을 수습하고자 활짝 웃으며 영십구에게 말했다.
“그저 농담이니 진담으로 여기지 마시게.”
그리곤 재빨리 묵용청양에게 말했다.
“안 형은 아마 청이각에 갔을 거예요.”
묵용청양은 그의 말에 더 기분이 상해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영십구는 검을 거두고 성큼성큼 그녀 뒤를 따랐다.
한참 동안 지켜보던 판등이 말했다.
“난 아무리 봐도 십구가 평범한 수행원은 아닌 것 같아.”
소제갈이 말했다.
“역시, 눈썰미가 좋다니까.”
판등이 말했다.
“뭐랄까, 강호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무사 같달까?”
“…….”
소제갈은 속으로 ‘눈썰미는 개뿔’ 하고 중얼거렸다.
산응이 말했다.
“어쩐지. 죽은 사람처럼 온몸이 냉랭하더니만.”
* * *
묵용청양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본인도 알지 못했다. 그저 좀 짜증이 나서 아무렇게나 거리를 걸었다. 더운 날씨 탓에 몸엔 온통 땀이 맺혔고 목도 말랐다.
별안간 걸음을 멈춘 그녀는 오른편에 그리 크지 않은 누각을 발견했다. 누각 현판에는 ‘청이각’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미 오후가 되었기에 청이각 안에서 연주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영십구를 보며 말했다.
“목말라. 들어가서 차나 한잔하자.”
영십구는 입을 움찔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그녀 뒤를 따랐다. 그는 몽달에서부터 태상황을 따라 강남으로 갔고, 공주 전하의 암위로 배정되었다. 지금까지 공주 전하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녀는 말한 건 반드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점원이 손님을 맞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다가와 인사를 건넸는데, 여인이 손님으로 오자 조금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판을 깰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 탓이었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사내의 모습에 점원은 그제야 안도했다.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손님, 아래층으로 모실까요, 아님 위층 별실로 모실까요?”
묵용청양은 고개를 돌려 무대를 훑었다. 무대 위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과 금빛이 섞인 붉은 치마를 입고 나풀나풀 춤을 추는 무희가 있었다. 가냘픈 허리가 음악에 맞춰 흔들리자 치맛자락도 가볍게 휘날렸다. 반짝이는 그녀의 춤사위는 무대 아래에 있는 손님들의 눈을 황홀하게 했다.
묵용청양이 물었다.
“오늘 안월 아가씨 연주는 없는가?”
점원이 웃으며 말했다.
“안월 아가씨는 오늘 손님이 오셔서 늦은 밤에야 연주와 노래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말을 뱉으며 위쪽을 힐끔거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영안의 모습이 보였다. 난간 쪽에 앉은 그는 안월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순간 묵용청양은 심장이 저릿해져 시선을 거두고 위층의 별실을 바라보았다.
“저기 빈방이 있는가?”
“예, 있습죠.”
점원은 공손히 길을 안내하며 묵용청양과 영십구를 위층 별실로 데려갔다. 묵용청양이 들어간 별실은 영안과 마주 보고 있는 방이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점원에게 죽렴부터 내려 달라고 말했다. 점원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가씨, 오늘은 저희 가게 명기인 모란이 춤을 추는 날입니다. 안 보실 겁니까?”
묵용청양이 물었다.
“이곳 명기는 안월이 아닌가? 모란이라니?”
점원이 설명했다.
“둘 다 명기입니다. 각자의 기예가 서로 다르지요. 손님들, 차는 어떤 걸로 드시겠습니까?”
“차는 됐고, 좋은 술로 한 주전자 가져다주게.”
영십구는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아깐 차나 한잔 하자더니… 어찌 차가 술로 바뀌었을까?
점원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점원은 금세 술과 안줏거리 몇 가지를 가지고 왔다.
묵용청양은 식탁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영십구가 눈에 거슬렸다.
“앉아서 나랑 한잔 마셔.”
영십구는 공주에게 술을 한 잔 따라 주었다. 근무 중에는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규율이 있었기에 자신의 잔은 채우지 않았다. 묵용청양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죽렴을 슬쩍 밀어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안월이 주전자를 들고 영안에게 술을 따라 주고 있었다. 주전자를 쥔 손 모양은 유난히도 요염해 보였다. 술을 따른 뒤, 안월은 술잔을 영안에게 건넸다. 술잔을 받아 든 영안이 무어라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웃는 모습은 또 어찌나 청아한지 분위기까지 절로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묵용청양은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내 엄지와 중지를 가볍게 모아 안월의 손동작을 따라 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쳇, 이게 뭐라고. 나도 할 수 있는데.”
그녀는 이번엔 손을 들어 올리며 소맷자락으로 입을 가리더니 영십구에게 물었다.
“어때? 예뻐?”
영십구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대꾸했다.
“예쁘십니다.”
“남자들은 다 이런 걸 좋아해?”
영십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묵용청양은 짜증이 났는지 술을 들이켰다. 연거푸 석 잔이나 마신 뒤에야 술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튀긴 콩을 한 움큼 집어 입에 털어 넣고는 와그작와그작 소리를 내며 씹어 먹었다.
“황수는 영안에게 내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했는데… 황수가 틀렸어. 지금은 안월이라는 저 애랑 더 가까워.”
술을 너무 급하게 마신 탓일까? 그녀는 얼굴도 발그레지고 눈망울도 초롱초롱했다. 생기가 더해지는 얼굴과는 반대로, 기분은 자꾸만 서글펐다.
“어릴 때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지금은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고 옛 친구를 버리네. 걱정이 생겨도 다른 여인을 찾아가 털어놓고 말이야. 내가 아니라…….”
잠시 뒤, 그녀가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놈, 부인을 들였다고 어머니는 나 몰라라 하는 꼴이라니.”
술을 많이 드셔서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셨군.
* * *
유 귀인은 오랜 시간 치료한 끝에 조금씩 몸을 회복했다. 그러나 원기가 많이 상한 탓에 그녀의 건강은 예전만 못했다. 계단을 오를 때면 두 번은 쉬어야 했고, 숨도 끊임없이 가쁘게 몰아쉬었다. 특히 벽요궁의 계단은 유난히 길고 가팔라서 마치 드높은 곳으로 오르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문 앞의 소태감은 유 귀인의 모습에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귀비에게 고했다.
“마마, 유 귀인이 오셨습니다.”
허 귀비는 오색찬란한 호갑투를 어루만지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안으로 들라 하라.”
허 귀비는 당초 몇 마디 말로 유 귀인을 구슬려 자신의 패로 만들었다. 유 귀인은 그리 똑똑하지 못하니 결국 파멸할 패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황제는 그녀에게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끝나 버리자 그녀는 적잖이 실망했다. 하지만 감히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아직은 황제의 속내를 알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유 귀인은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굽히고 인사를 올렸다. 허 귀비는 그녀를 슬쩍 부축하며 안색을 살폈다.
“안색이 많이 좋아졌네요, 아우님.”
유 귀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몸은 많이 나아졌지만, 황상께선…….”
유 귀인 역시 황제의 뜻을 알 길이 없었기에 상황을 판단하고자 허 귀비를 찾아온 것이었다.
허 귀비는 궁녀에게 차를 내오라고 분부한 뒤,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일은 이미 지나갔으니까요. 이번에 황후를 끌어내리진 못했지만, 황상께선 아우님을 질책하지 않았어요. 그건 황상께서 아직 아우님을 마음에 두고 계신단 뜻일 거예요.”
유 귀인은 허 귀비의 말에 불안했던 마음이 마침내 가라앉았다. 그녀는 조금 민망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 놀리지 마시어요. 황상께서는 분명 이번 일로 신첩에게 실망하셨을 거예요. 제가 사려 깊지 못하다고 탓하실 테지요.”
“황상 쪽은 걱정하지 말아요.”
허 귀비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말했다.
“하지만, 황후 쪽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보통이 아닌 것 같으니까요.”
유 귀인은 궁에 틀어박혀 요양에만 힘썼기에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왜요? 무슨 일 있었나요?”
허 귀비가 냉소를 지었다.
“황상께서 황후에게 후궁 정비를 맡기셨는데… 내무부까지 정비하려고 하더군요. 보아하니 본궁의 외숙부를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 같아요.”
유 귀인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황후가 곽 대인을요?”
곽도 대인은 귀비 마마의 외숙부이자 좌상의 처남이었다. 탄탄한 뒷배를 가진 인물을 감히 황후가 건드리려는 것일까?
* * *
쾅!
성이 난 묵용린은 책상을 내리치며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곽도가 아니라 짐에게 대항하려는 것이다!”
황제의 분노에 방 안의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고 몸을 낮췄다. 그 누구도 차마 숨을 크게 내쉬지 못했다.
황후 마마의 간이 이 정도로 클 줄 누가 알았을까? 황제의 어선 규율을 바꾸다니. 그간 동월은 황제의 점심상에 열여덟, 저녁상에는 스물네 가지의 음식을 올렸다. 그렇게 사치스럽다고 말할 수 없는 가짓수였다. 하지만 황후는 그 수를 반으로 줄여 버렸다. 점심상엔 아홉, 저녁상엔 열두 가지 음식만 올라갈 수 있게 말이다.
묵용린은 음식이 줄어든 것에 화가 난 게 아니라 치욕스러운 기분에 화가 났다. 황제인 만큼 그는 체면을 지켜야 했다. 황제의 식상에 올라가는 음식 가짓수가 많은 이유는 그가 대신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장사꾼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 위세를 부리다니!
묵용린은 잿빛처럼 어두워진 얼굴로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관자놀이가 자꾸만 욱신거렸다. 그가 더더욱 화가 났던 지점은 이 여인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약점을 사봉봉이 쥐고 있으니 말이다. 묵용린은 그녀 앞에 설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는 자리에 앉아 책상 맨 아래에서 작은 책자를 꺼냈다. 그리고 붓을 들고 휘황찬란한 필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자는 그가 사봉봉의 과실을 적어 두는 용도였다.
사실 그는 혼사를 치른 날부터 그녀를 폐위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태상황이 반대할 수도 있으니 지금부터 증거를 모아 둘 생각이었다. 사봉봉이 황후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만 증명할 수 있으면 태상황을 설득해 그녀를 황후의 자리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글을 다 쓴 그는 책자를 다시 제자리에 끼워 넣었다. 그리곤 무릎을 꿇고 있는 아랫사람들을 바라보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일어나거라.”
그는 다른 이들을 모두 내보내고 사희만 남겼다.
“계속 얘기해 보아라. 황후가 또 무얼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