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090)화 (1,090/1,192)

제1090화

여름밤의 어둠은 짙지 않아, 코앞까지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은 쟁반처럼 둥근 달이 높이 걸려 있고 별들도 촘촘히 박혀 있었다. 푸른빛이 맴도는 하늘 아래로 나무 그림자와 가옥의 윤곽도 제법 뚜렷하게 보였다. 거리에선 야탁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뒤이어 야경꾼의 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날씨가 건조하니 불씨를 조심하시오…….”

야경꾼이 지나간 뒤, 누군가 순식간에 현부 관아로 들어섰다. 그는 이곳 환경에 퍽 익숙했고 관아를 지키는 보초도 없어서 빠르게 후원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후원에는 곁채가 나란히 이어져 있는데, 사평현 관리들은 대부분 현지인이라 자택에서 지냈고 이곳을 쓰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검은 인영은 나무 아래에 서서 한참 동안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방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어렴풋이 방 안에서 코를 고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는 소리 없이 발걸음을 옮기며 계단을 올라갔다.

앞의 두 곁채를 지나간 그는 세 번째 곁채 입구에 멈춰 섰다. 이내 창호지에 침을 묻혀 살짝 구멍을 냈다. 안을 들여다보니 온통 암흑이었다. 하지만, 침상에 누워 있는 그림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품에서 자그마한 관 통을 하나 꺼내더니 창호지에 난 구멍에 끼우고 입김을 훅 불어 넣었다.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고 밤바람만 살랑거렸다. 이따금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릴 뿐, 여느 날과 같은 여름밤이었다.

잠시 가만히 서 있던 검은 인영은 조심스럽게 빗장을 열고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침상에 있는 이를 향해 휘둘렀다.

비수를 휘두른 순간, 그는 곧장 이상한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부드럽게 베이는 게 아니라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설마 뼈를 베었단 말인가?

그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순간, 방 안이 환해졌다. 누군가 탁자에 놓여 있던 촛불을 켠 것이다.

그는 황급히 자신이 칼을 휘두른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사람이 아니라 껍질이 베어져서 노란 속살이 훤히 드러난 호박이 있었다.

“어찌 자네가 여기에?”

놀라 소리를 지른 사람은 이제 막 문 앞에 도착한 현부 대인이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질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묵용청양은 현부를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저 멀리 환하게 불이 켜진 현부의 모습이 보이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더욱더 속도를 높였다.

아이가 있는 곁채에 도착했을 때, 순간 현부 대인과 부딪칠 뻔했지만 다행히 영안이 그녀를 붙잡은 덕에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묵용청양이 손을 허리에 얹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 어떻, 어떻게 됐어. 자, 잡았어……?”

영안이 고갯짓을 하자 그녀의 시선도 움직였다. 그곳엔 웬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현부 대인이 말했다.

“위무권관의 권법사, 양광승이라네.”

판등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전가에서 고용한 호위 무사이기도 하고요.”

묵용청양이 말했다.

“그럼 저 사람이 일척홍이야? 허문헌이 아니라?”

현부 대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어찌 본관의 사위를 끌어들인단 말인가? 양광승이 위무권관에 속해 있다고 해도, 그가 한 짓은 자신이 책임져야지. 위무권관이랑은 상관없네.”

영안이 말했다.

“본인이 일척홍인지 아닌지는 저자가 직접 말할 겁니다.”

양광승은 아까부터 놀라 넋을 놓은 상태였다. 설마 이게 다 함정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허문헌은 그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했지만, 누군가 자신이 사람을 죽이는 걸 보았다기에 덜컥 겁이 나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한 사람을 죽이나 두 사람을 죽이나 죽인 건 매한가지 아니던가. 죽여서 입을 막기만 하면 그는 안전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영안 패거리는 기한 내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임안성으로 돌아갈 테고 그렇게 되면 사평현도 다시 태평해질 터. 이제 두 번 다시 일척홍의 뒤를 캐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말해 보시오. 누가 일척홍이오?”

영안이 또다시 물었다. 양광승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그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당신이 일척홍이오?”

양광승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허문헌이 일척홍인가?”

“…….”

현부 대인이 펄쩍 뛰며 성을 냈다.

“영 부문주, 그런 말을 할 땐 증거가 있어야 하네. 일척홍이 우리 사위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어찌 그럴 수…….”

영안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양광승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어린 거지 소년만 죽였소. 그것도 허문헌이 시켜서. 사형은 면하게 도와줄 수 있으니 잘 생각하시오. 허문헌 대신 죄를 뒤집어쓸지 말지.”

양광승은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다, 다 알아냈군요…….”

“당신이 일척홍이 아니란 거 알고 있소. 전씨 아가씨 사건을 계기로 허문헌은 당신을 공범으로 만들었지. 그리고 거지 소년을 죽인 게 당신의 뜻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이미 다 알아냈소.”

현부 대인은 계속 고함을 내질렀다.

“대체 그런 걸 언제 알아냈길래 왜 본관은 모른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모함하다니! 그것도 아주 멀쩡한 사람을! 내 대리시에 이 일을 고할 것이네. 아니, 황상께 이 일을…….”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포효가 끝나자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 정말 목숨만은 살려 줄 건가요?”

“그렇대도.”

이번엔 묵용청양이 대답했다. 그녀가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장담하지.”

양광승은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영안을 바라보았다. 영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인이 그리하겠다면 그리될 것이오.”

양광승은 바싹 마른 입술을 할짝대며 이를 악물었다.

“일척홍은 허문헌입니다.”

영안이 눈을 감았다. 역시 그의 추측이 옳았다. 일척홍은 허문헌이다.

현부 대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네. 그럴 리 없어. 어찌 우리 사위가 그럴 수 있단 말이냐. 말도 안 되고말고…….”

영안이 양광승에게 물었다.

“허문헌은 왜 당신에게 거지 소년을 죽이라 한 것이오?”

“통녕의 조삼이 붙잡힌 뒤, 그도 이제 손을 떼려 했습니다. 조삼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고요. 하지만, 대인께서 사건을 종결하지 않으시고 암암리에 그를 조사하시는 바람에 그는 화를 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누군가를 죽여서 대인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일척홍이 아직 사평에 있다는 걸 알려 주려 했습니다. 황상께서 정하신 기한이 다가오니 그 안에 일척홍을 잡지 못하면 임안에 죄를 고하러 가야 할 테니까요.

그런데 대인의 수하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는 탓에 그는 직접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판을 짤 시간도 없으니 제게 아무 거지나 찾아 죽이라고…….”

소제갈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문헌은 모르고 있었나 보네요. 안 형은 우리가 그자를 조사 중이라는 걸 일부러 더 알렸어요. 그자가 다시 손을 쓰게 압박하려고.”

묵용청양은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

“안 그래도 내가 그랬잖아. 판등한테 왜 그리 대대적으로 조사를 시키냐고. 그게 다 일부러 압박하는 거였구나.”

하지만, 영안은 웃을 수 없었다.

“내가 한 수 잘못 계산한 셈이지. 거지를 죽일 줄은 몰랐거든.”

순간 다들 입을 굳게 다물었다. 영안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가자, 위무권관에서 진짜 범인을 잡고 사건을 종결해야 하니까.”

현부를 나오자 동녘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지며 대지를 밝혔다. 어두운 남색 빛이던 하늘이 맑게 걷히자 어느 때보다 호연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묵용청양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비록 한숨도 못 자긴 했지만, 정신은 유난히 맑았다. 수일간의 고생 끝에 마침내 범인을 잡아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생각을 하니 감격스러웠다.

그녀는 가장 앞서가는 영안을 바라보았다. 환경문 부문주인 그는 매서운 눈매와 예리한 통찰력뿐만 아니라 악한 자를 징벌하고자 하는 뜨거운 피까지 가졌다. 그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진짜 일척홍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억울하게 죽은 여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정의를 실현했다.

그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말로 표현한 적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소꿉동무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 * *

위무권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살아 있는 허문헌을 잡진 못했다. 죗값을 치를 게 두려웠던 그는 권법관 복도에 목을 매달아 이미 자결한 뒤였다.

허 부인과 새색시는 하늘이 무너질 듯 울부짖었고 허세강은 어두운 표정으로 한쪽 계단에 앉아 있었다. 다른 권법사들은 어찌 된 일인지 내막을 알지 못했기에 다들 멍하니 지켜보았다.

대문 앞엔 환경문 사람들이, 그들 뒤로는 현부 관아 사람들이 우르르 서 있었다.

바닥에 놓인 허문헌의 시신에 현부 대인은 남아 있던 일말의 희망마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그가 비틀거리자 뒤에 있던 관아 하인이 그를 부축했다. 창백해진 그는 하인에게 몸을 기댔다.

묵용청양은 현부 대인의 모습을 보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어쩌면 현부 대인이 순결을 잃은 딸을 강제로 허문헌에게 시집보내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는 늘 원인이 있고 또 그에 따른 결과가 생기는 법이니까.

불현듯 그녀는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생의 굴곡을 겪더라도 마음에 티끌이 없으면 한평생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다는 말. 안타깝게도 허문헌은 이 이치를 알지 못해서 가슴속에 어둠을 남겨 두었고 결국엔 남과 자신을 해치고 말았다.

사건이 해결되자 사평의 백성들은 더는 공포에 떨지 않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피해자와 허문헌 가족들이 진정으로 평온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일이 지나야 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묵용청양과 환경문 사람들은 임안으로 돌아왔다. 다들 기뻐하는데 영안의 표정만큼은 유독 어두웠다. 묵용청양은 그가 어린 거지 소년의 죽음에 계속 마음을 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부 다 본인 탓이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그녀는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영안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근심에 잠겨 있을 때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판등 일행과 잠시 얘기를 나누다 고개를 돌리니 홀로 자신의 방에 있던 영안이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갔느냐고 묻자 다들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녀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대체 왜 웃는 거야?”

여전히 아무도 대꾸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공주 전하는 조금 까칠한 편이라 평소처럼 잘 참아 주지 않았다. 그녀가 곧장 소리쳤다.

“십구, 검!”

영십구는 스르륵 장검을 뽑아 들고, 웃고 있는 무리를 향해 매섭게 겨누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