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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89)화 (1,089/1,192)

제1089화

영안의 표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짓궂은 장난을 치려던 것뿐인데 자신이 걸려들 줄이야.

묵용청양은 영안을 한바탕 때리고 나서야 그의 다리에서 떨어졌다.

“난 초조해 죽겠는데 장난이 치고 싶니? 참 부문주다운 짓이다.”

다들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

청양이 너무 화가 나서 인지를 못 하는 것이란 말인가? 저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우선 일어난 뒤에 때려야 하는 게 아니던가? 역시, 그녀도 자신을 여인이라 여기지 않는 듯했다.

영안은 머리를 감싼 채 그녀의 주먹질을 가만히 맞아 주었다. 사실 그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난생처음 품에 여인을 안았는데, 그게 하필 청양 공주라니…….

그때, 현부의 하인이 허겁지겁 찾아왔다.

“영 부문주, 일척홍이 또 나타났습니다. 현부 대인께서 어서 가 보시랍니다.”

순간 모든 이들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인을 따라 현장에 가 보니 외진 골목 담벼락에 시신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이전 사건과는 다르게 피해자는 여인이 아니라 어린 거지였다. 유일한 공통점이라고는 얼굴에 일 척짜리 붉은 천이 덮여 있다는 것뿐이었다.

살해 방법도 이전과는 달랐다. 이전의 피해자들은 몸에 상처 하나 없이 질식사했지만, 이 아이는 목에 칼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고 너저분한 옷 또한 피를 흘려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눈이 감겨 있었지만 시신의 표정은 적잖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구부러진 손가락에 손톱까지 다 부러진 걸 보면, 죽기 직전까지 힘껏 땅을 긁었을 것이다.

판등과 소제갈은 쪼그려 앉아 시신을 유심히 살피더니 영안에게 고했다.

“아직 사후 경직이 진행되지 않았지만, 핏덩이는 굳어 있습니다. 숨을 거둔 지 그리 오래되지도, 그렇다고 금방 사망한 것도 아닌 듯해요. 분명 오늘 새벽쯤 일어난 일일 겁니다.”

영안은 고개를 들고 골목 안쪽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높은 담장에 가려진 탓에 골목은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미간이 움푹 패일 만큼 눈썹을 찡그렸다.

허문원은 감시를 당하느라 분명 범행 기회가 없었을 텐데… 대체 범인은 누구란 말인가? 진짜 일척홍일까? 아니면 일척홍을 모방한 범죄일까?

영안은 소마와 산응에게 현장에 남아 단서를 찾으라고 분부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현부로 돌아갔다.

모든 이들의 안색이 좋지 않자 현부 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영 대인의 추측이 맞은 듯하네. 일척홍은 조삼이 아니었네. 내 추측이 틀렸어.”

묵용청양은 허문헌 때문에 현부의 태도가 의심스러웠다.

“현부 대인, 피해자를 죽인 게 일척홍인 걸 어찌 아세요? 어쩌면 범인은 조삼처럼 일척홍을 모방했는지도 모르잖아요.”

현부는 묵용청양 같은 여인이 사내들과 섞여 다니는 게 퍽 못마땅했다. 그래도 그간 영안의 체면을 봐서 가만히 있었는데 오늘 자신에게 따져 묻는 걸 보니 절로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본관은 영 부문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여인은 말참견하지 말게.”

그의 말뜻은, 너 따위는 감히 말을 섞을 지위가 못 된다는 의미였다.

그가 말을 마치자 스륵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검이 그의 가슴을 겨누었다. 검은 쥔 사내는 살기를 내뿜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현부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의 현부에서 검으로 협박을 당하다니, 이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영안이 호통쳤다.

“십구, 검을 거두게.”

영십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주인은 묵용청양이기에 공주의 명이 아니라면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묵용청양은 한숨을 내쉬며 검을 밀쳤다.

“어제는 주루의 점원을 겁주더니, 오늘은 현부 대인이야? 십구, 너 그냥 돌아가.”

영십구가 검을 도로 집어넣으며 해명했다.

“저자가 아가씨에게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현부 대인이시잖아.”

영십구가 어찌 현부 따위를 안중에 두겠는가. 그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든 감히 아가씨께 불경을 저지르면 소인이 단칼에 죽여 버릴 겁니다.”

묵용청양은 영안을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가 길러낸 사람이니 네가 방법을 생각해라’라는 뜻이었다. 영가군들은 하나같이 고집불통인 게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영안은 눈빛으로 그녀에게 대꾸했다.

‘너만 주인이라고 여기니 나도 모르겠다.’

‘내가 십구를 데리고 오기 싫었던 것도 다 이거 때문이라고. 짜증 나 죽겠네.’

‘어쩔 수 없어. 그러게 누가 그렇게 귀한 신분으로 태어나래?’

두 사람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동안, 영안은 줄곧 무표정했지만 묵용청양은 두 눈썹을 끊임없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퍽 익살스러웠다.

판등이 소제갈에게 조용히 말했다.

“안 형이랑 대장이랑 둘이서 뭐 하는 거야?”

“뭔가를 얘기하는 거 같은데.”

“말은 안 하잖아.”

“눈빛으로 통하는 거지.”

판등이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손발이 잘 맞는단 말이야?”

소제갈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안 그럼 어찌 소꿉동무라고 말하겠어.”

묵용청양은 영안과 한바탕 눈빛을 주고받은 후에 결국 영십구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호되게 꾸짖었다.

보통 다른 집 수행원들의 경우, 주인의 심기를 건드렸을 때 쩔쩔매는 게 보통이었는데 영십구는 아니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정원에 서서 가슴을 활짝 편 채 주인 아가씨의 질책을 듣고 있었다.

판등이 혀를 쯧쯧 찼다.

“역시 누가 대부호 집안 아니랄까 봐. 수행원도 기개가 넘치네.”

영안은 고개를 돌리고 묵용청양이 영십구를 꾸짖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어찌나 과장되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썹을 치켜세운 게 마치 누가 봐도 화가 잔뜩 난 사람 같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작아서 꼭 모기가 앵앵거리는 것 같았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영십구마저 그녀의 입 모양을 집중해서 봐야 겨우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공주 전하는 한바탕 겁을 준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십구, 날 공주라고 생각하지 말고 좋은 형제라고 생각해. 환경문에서 같이 사건도 조사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응?”

영십구는 묵묵히 고개만 숙였다. 부디 자신이 해독한 말이 틀렸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현부는 문밖의 상황을 보고 조금 혼란스러웠다. 일척홍이 또다시 나타났고, 내일이 이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인데… 걱정도 되지 않는단 말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응과 소마가 돌아와 조사한 내용을 보고했다.

두 사람은 사건 현장 일대를 수색하다가 범인이 살인을 저지르는 걸 목격한 증인을 찾았다고 했다. 또 다른 어린 거지였다.

그 말에 영안은 곧장 정신을 가다듬고 물었다.

“증인은 어디 있는데?”

“데려왔어요.”

산응이 후원을 가리켰다.

“우선 후원에 데려다 주었죠. 너무 놀라 얼이 빠져 있어서요. 찐빵 두어 개랑 장아찌를 챙겨 주고 오는 길이에요. 조금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 물어보는 게 좋겠어요.”

영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조금 기다려 보자.”

하지만, 마음을 추스르는 데는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영안 일행이 어린 거지를 찾아갔을 때, 그는 낯선 사람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경계심이 가득 담긴 아이의 눈빛을 보니 차마 사건에 관해 물어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물어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 묵용청양이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어린 거지에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게 해서 대답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영안이 물었다.

“범인을 제대로 봤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아는 사람이니?”

아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전에 본 적 있니?”

아이는 잠시 망설였다. 어디서 본 적은 있는데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영안이 다시 물었지만 아이는 계속 고개를 저었기에 그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우선 하룻밤 푹 쉬게 하고 내일 감정을 추스르면 다시 묻는 게 좋겠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영안은 현부에게 몇 마디 당부를 한 뒤, 일행을 데리고 객잔으로 돌아왔다. 묵용청양이 온 후로 그 또한 현부에서 객잔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이 웬수를 직접 지키고 있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였다.

이날은 많은 이들이 잠 못 드는 밤이었다. 내일이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만약 일척홍을 잡지 못하면 영안은 수하들을 데리고 임안으로 가 죄를 고해야 할 것이다.

묵용청양 또한 몸을 뒤척이며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목격자인 아이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지만, 어쩐지 불안했다. 만약…….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아 장포를 걸친 뒤 침상에서 내려갔다. 영안을 찾아가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영십구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녀가 한밤중에 사내의 방으로 찾아간다는 걸 태상황께서 아셨다면 분명 노발대발하실 터. 그런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의 주인이 이렇게 자유분방한 공주인 것을.

묵용청양은 영안의 방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문득 의아해졌다. 영안이 죽은 듯 자고 있진 않을 텐데.

이번엔 판등의 방문을 두드렸다. 역시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 이것들이…….

그녀는 어둠을 향해 손짓했다.

“십구.”

그녀가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손짓하자 영십구는 조금 섬뜩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묵용청양이 고개를 돌리더니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왜 내 뒤에 있는 거야?”

“전 계속 이곳에 있었습니다.”

“영안이랑 나머지 애들은?”

영십구는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라 침묵만 지켰다.

“내가 묻는 말 안 들려? 어서 말해.”

묵용청양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나한테 미움 사면 안 좋을 텐데. 내가 워낙 뒤끝이 있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영십구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소주와 환경문 사람들은 현부에 갔습니다.”

묵용청양이 눈을 몇 차례 깜빡이더니 별안간 자신의 머리를 세차게 내리쳤다.

“아, 알았다! 누군가 아이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하는구나!”

그녀는 황급히 아래층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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