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8화
주어진 기한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영안은 거의 매일 밤을 새우며 사건을 조사했다. 자꾸만 자신이 무언가를 놓친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정신을 집중하며 자료를 보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묵용청양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영안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사내 방엔 왜 온 거야?”
“잠이 안 오니까.”
묵용청양은 책상 앞에 앉아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사건 얘기나 하자. 이제 겨우 사흘 남았잖아. 사흘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황형이 네 목을 칠지도 몰라.”
영안이 눈을 희번덕였다.
“황상께선 명군이시거든.”
“명군도 종종 어리석게 행동할 때가 있지.”
묵용청양이 턱을 괴고 한 손으로 찻잔을 흔들었다.
“며칠 전에 궁에서 사건이 하나 터졌는데, 귀인 한 명이 황후를 모함하려고 했었어. 너도 알다시피 황형은 봉봉을 싫어하잖아. 안 좋은 선입견도 있고 말이야. 사건에 허점이 그렇게나 많은데 황형은 보지도 않고 귀인 말만 듣더라니까. 그 귀인도 참 웃겨. 그렇게 낮은 신분으로 황후를 넘어뜨리려 하다니. 참 기상천외한 발상이지.”
영안이 별안간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
“그 귀인 말이야, 참 기상천외하다고.”
“그 앞에.”
“신분도 낮은데 황후를 넘어뜨리려 한다는 말?”
“그래, 그거야. 신분 차이.”
영안이 물었다.
“넌 허씨네와 현부 대인의 신분 차이가 크다고 생각해?”
묵용청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현부는 사평의 부모라고 할 수 있는 관리 대인이고… 허씨 집안은 권법관을 운영하지만 권력이나 재력 측면에선 좀 떨어지겠지.”
“그럼 왜 현부에서 딸을 허씨 집안으로 시집보냈을까?”
“허문헌이 젊기도 하고 장래도 유망해서 그런 거겠지.”
“허문헌은 훗날 아버지의 권법관을 물려받아야 해. 학자나 부자와는 거리가 멀지. 그런데도 왜 그자를 마음에 들어 했을까?”
묵용청양이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겼다.
“현부 아가씨한테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영안이 물었다.
“현부 댁 아가씨를 본 적 있어?”
“낮에 판등 애들이랑 위무권관에 갔을 때 봤어. 아주 예쁘던데?”
“그것 말고 다른 건 없었어?”
묵용청양이 망설이며 고개를 저었다.
“손이랑 발도 멀쩡히 다 있고, 다리를 저는 것도 아니야. 말도 잘하던데. 크게 눈에 띄는 건 없었어.”
“그럼 왜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거라고 말한 거야?”
“…….”
네가 하도 몰아세우니까 그렇게 대꾸한 거지. 묵용청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영안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가 숨어 있었던 거야.”
“그게 뭔데?”
영안은 조금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묻지 마.”
“도대체 뭐길래 물어보지도 말라고 해?”
묵용청양은 더 궁금해졌다. 영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엔 한 줄기 붉은빛이 맴돌았다.
“뭔데.”
묵용청양이 그의 목을 잡고 흔들었다.
“얼른 말하라고.”
영안은 목이 마구 흔들리는 탓에 책상을 꽉 붙들어야 했다. 그녀의 손은 새하얗고 가늘었지만 힘은 무지막지했다. 제법 아플 정도였다.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한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좀 점잖게 굴 수는 없어?”
묵용청양이 입을 오므리며 대꾸했다.
“뭐, 네가 맨날 난 여인이 아니라며. 말해 줄 거야, 말 거야? 네가 말 안 해 주면 소제갈한테 갈 거야. 그 앤 분명 알겠지.”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안이 곧장 그녀를 붙잡았다.
“애들한테 물어보지 마.”
“그럼 어서 말해 줘.”
영안은 잠시 침묵하다 민망한 듯 입을 열었다.
“순결…….”
“네 말은… 현부 댁 아가씨가 혼인 전에 순결을 잃어서 신분이 낮은 집으로 시집을 갔다는 거야?”
묵용청양이 눈을 번득이더니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생각했던 거랑 똑같잖아? 일척홍이 붉은 면사포를 남기는 건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심사가 뒤틀려서 그런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영안에게 물었다.
“사내한테 순결이 정말 그렇게나 중요해? 만약 네 부인이 혼인 전에 순결을 잃었다면 넌 네 부인을 죽일 거니?”
“…….”
자꾸만 재촉하듯 물어보는 묵용청양을 바라보며 영안은 난처하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 마디만 더 물으면 널 죽일 수도 있어…….
* * *
영안은 판등과 산응에게 계속해서 허문헌을 조사하게 했다. 그리곤 소제갈과 소마를 현부의 둘째 딸에게 보냈다.
현부 대인은 장蔣씨로,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었다. 두 딸들은 모두 외모가 훌륭했는데, 그중에서 큰딸 장쟁蔣筝은 도성의 정사품 지주知州에게 시집을 가서 관리 집안의 안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둘째 딸 장란蔣蘭은 현성의 권법사에게 시집을 갔다. 누가 봐도 두 자매의 신분 차이는 너무 컸다.
소제갈은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라, 재빨리 장란의 유모 아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곤 한바탕 술을 마시며 친분을 쌓은 뒤 유모의 아들에게서 실정을 알아냈다.
알고 보니 장란은 혼인 전, 좋아하는 연극배우가 있었다. 그녀는 사흘이 멀다 하고 연극을 보러 갔는데 나중엔 마음이 통해 그와 밀회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배우는 결국 제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그녀를 범하고야 말았다.
현부 대인은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 성을 냈고 그 연극배우를 사평에서 쫓아낸 뒤, 허씨 집안에 혼담을 넣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둘째 딸을 시집보낸 것이다.
물론 허씨 집안에서는 이러한 속내를 알지 못했다. 현부 대인이 사돈을 맺자는 말에 그들은 곧장 꽃가마를 대령해 둘째 아가씨를 며느리로 들였다.
묵용청양은 소제갈의 말에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영안에게 말했다.
“와, 우리 생각이 맞았어. 이제 내가 분석해 줄게. 장란 아가씨가 순결을 잃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은 다 속일 수 있어도 허문헌만은 속이지 못해. 혼인 초야인데 새신부가 피를 흘리지 않으니까 그는 그녀가 순결하지 않다고 여긴 거지.
하지만 현부 대인 권세에 감히 혼인을 물릴 수 없을 테니 이를 갈고 피를 토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러다 결국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견디다 못해 심사가 뒤틀린 거고.”
말을 마친 그녀는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영안이 칭찬해 주기만 기다렸다.
소제갈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와, 대단한데요, 대장!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느네요!”
묵용청양은 읍하며 겸손한 척 말했다.
“다 우리 형제들이 도와준 덕에 조금 는 거지.”
하지만 영안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고작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이다니, 허문헌 그자 너무 약해빠진 거 아니야? 그것도 무술을 익힌 사람이 말이야. 무술인은 보통 사람들보다 의지가 아주 강하다고.”
묵용청양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말은 내 분석이 틀렸다는 거야?”
“전체적으로 봤을 땐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아직은 결정적인 동기가 부족해.”
“뭐가 부족한데.”
묵용청양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정해진 기한까진 고작 이틀 남았다고.”
그녀의 말에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제의 말은 곧 천자의 뜻이라 한 번 뱉으면 도로 주워 담을 수 없었기에 다들 최종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고 해서 목이 날아가진 않겠지만, 분명 벌이 내려질 것이었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묵용청양은 더 초조해졌다.
“영안, 말해 봐. 이제 어쩔 거야?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잖아. 뭐라도 방법을 생각해 내야지.”
“기다려.”
“기다리라고?”
묵용청양이 물었다.
“뭘 기다려?”
그때, 안으로 들어온 판등에게서 허씨 집안의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의 허 부인은 사실 허문헌의 생모가 아니었다. 십여 년 전, 첫 번째 부인은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 도망쳤다고 했다. 당시 이 일은 사평현을 떠들썩하게 흔들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조금씩 잠잠해졌다. 그 후 허세강은 새로 부인을 맞았다. 새 부인은 시집을 온 뒤에도 아이를 낳지 않고 허문헌에게 사랑을 쏟으며 좋은 모자 관계를 이어 나갔다.
영안은 찌푸렸던 미간을 활짝 폈다.
“그래, 이거였어. 허문헌의 어머니가 떠났을 때, 허문헌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었겠지. 다들 뒤에서 손가락질하며 온갖 유언비어를 쏟아 냈을 테고. 그 일은 허문헌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거야. 절대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그때부터 그의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한 거야. 정조를 지키지 않은 여인을 혐오했겠지. 그런데 자기 신부마저 그랬다는 생각에 그만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어때?”
소제갈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문헌에게 제기된 의혹을 하나하나 따로 보면 지극히 정상이지만, 한데 모아 보면 혐의가 아주 커요. 살해 동기도 있고, 범행을 저지를 조건도 충분하고요.
권법사라 강호에 있는 이들과 왕래도 잦을 테니 미향을 손에 넣는 것도 쉬웠을 거예요. 양추영과도 청매죽마니까 면식범인 셈이죠. 전가에서 고용한 호위 무사도 그들 권법관 소속이니 더 쉽게 내통했을 거예요.
그리고 첫 번째 사건의 피해자인 주혜의 아버지는 그날 밤, 허씨 집안으로 담장을 수리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죠. 두 번째 사건의 피해자인 주교아의 집도 위무권관에 두부를 대 줘서 서로 아는 사이예요.”
“그럼 뭘 더 기다려?”
묵용청양이 재촉하며 말했다.
“얼른 위무권관으로 가서 허문헌을 붙잡고 사건을 마무리해야지. 이러다 허문헌이 소문을 듣고 도망치면 어떡해?”
“도망 못 쳐요.”
판등이 말했다.
“산응과 소마가 지켜보고 있거든요.”
영안이 물을 따라 마시며 말했다.
“모든 분석은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인도, 증거도 없는데 어떻게 붙잡아?”
“그럼 어떡해?”
분명 범인이 떡하니 있는데도 붙잡을 수 없다니. 묵용청양은 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애꿎은 머리카락만 잡아당겼다. 그러자 잘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풀리며 엉망으로 흘러내렸다. 마치 난폭한 아기 고양이 같은 모습이었다.
영안은 그녀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묵용청양이 종종걸음으로 제 곁에 가까이 왔을 때 슬쩍 발을 걸었다.
묵용청양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해 그대로 영안을 끌어안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방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서로를 안은 채 바닥에 포개어 앉아 있는 영 부문주와 묵용청양을 모든 이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