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7화
현부는 계속해서 영안을 설득했지만, 영안은 손을 내저었다.
“황상께서 주신 한 달이라는 기한은 환경문에 준 것이니 현부 대인과는 상관없습니다. 현부 대인께서 정말 사평성의 안녕을 원하신다면, 일척홍을 잡는 방법밖엔 없습니다.”
“조삼이 일척홍이 아니던가?”
영안이 고개를 저으며 막 입을 떼려는데, 누군가 문 앞에서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그 모습에 현부는 곧장 활짝 웃으며 문턱을 넘어가 그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에서 듣자니 그자는 현부를 장인어른이라고 불렀다. 아무래도 현부의 사위인 듯했다.
영안은 조용히 한자리에 서 있다가 측문으로 돌아 나갔다.
정원에는 산응 패거리가 묵용청양을 에워싸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복도 아래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석양빛 사이로 묵용청양은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활짝 웃고 있었다. 오늘 묵용청양은 살굿 빛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붉은 노을빛에 젖어 유난히 더 아름다워 보였다. 한 시진 전쯤엔 억울하게 눈물만 흘리더니…….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기가 넘치는 사내처럼 보였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그들 곁으로 다가간 영안은 판등이 눈을 가늘게 뜨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가 판등의 어깨를 치며 물었다.
“무얼 보는 것이냐?”
판등이 턱을 들며 말했다.
“안 형, 현부 대인과 같이 있는 자는 누굽니까? 어쩐지 낯이 익은걸요.”
영안도 판등이 바라보는 쪽을 쳐다보았다. 현부는 이제 막 손님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가 말했다.
“현부 대인의 사위인 것 같다. 아마 볼일이 있어서 현부 대인을 찾아온 것 같아.”
판등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생각났습니다. 저자는 위무권관의 소관주 허문헌입니다. 저자가 현부 대인의 사위였군요.”
영안이 물었다.
“저자를 어찌 아는 것이냐?”
“네 번째 사건이 일어났던 전가에서 호위 무사를 고용하지 않았습니까. 그곳이 바로 저자의 권관이었습니다. 그때 저도 조사를 하러 위무권관에 갔었는데, 그때 저자를 보았지요.”
영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현부 대인은 사위을 돌려보낸 뒤, 다시 돌아와 영안과 사건 종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때 영안이 먼저 그에게 물었다.
“방금 오셨던 분은 대인의 사위입니까?”
“맞네, 소관의 사위네.”
사위 얘기가 나오자 현부는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허문헌이라고… 현성에서 가장 큰 권관이 우리 사위 집안 것이네.”
영안이 물었다.
“혼인은 언제 하였습니까?”
“아직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네.”
현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영 부문주, 그건 어찌 묻는 것인가?”
영안이 웃으며 말했다.
“그저 한번 물어본 것입니다.”
현부 대인은 다시 사건에 대한 화제로 돌렸다.
“영 부문주, 만약 시일이 다 되어도 일척홍을 찾지 못한다면 곧장 사건을 종결할 수 있나?”
영안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일은 나중에 다시 말씀하시지요. 저는 아직 볼일이 남아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판등 패거리를 향해 손짓했다.
“가자!”
판등 일행은 우르르 영안을 따라갔다.
홀로 남은 현부 대인은 넋을 놓고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영안은 일행을 이끌고 곧장 주루로 향했다. 별실을 찾은 그는 음식을 주문한 뒤, 묵용청양에게 말했다.
“오늘은 네가 사.”
묵용청양은 두말하지 않고 허리춤에 찬 주머니를 탁자에 던지며 호탕하게 말했다.
“좋아.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 형제들!”
산응은 그 정교하고 예쁜 주머니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에 은자가 몇 개나 들어가겠어요. 다들 배불리 먹게 할 정도는 돼요?”
소제갈은 술부터 찾았다.
“대장, 전 원하는 거 별로 없어요. 좋은 술 한 주전자면 돼요.”
소마가 말했다.
“대장, 난 팔보오리랑 닭고기 요리요.”
판등이 말했다.
“소고기 조림도 몇 근 시키죠.”
산응이 말했다.
“난 돼지고기랑 돼지 내장 볶음.”
묵용청양이 영안에게 물었다.
“넌 뭐 먹을 거야?”
“난 됐어. 이렇게만 시켜도 충분해.”
묵용청양이 영십구에게 물었다.
“십구는?”
영십구가 말했다.
“소인도 괜찮습니다.”
묵용청양은 잠시 고민하다 옆에 있던 점원에게 물었다.
“상어 지느러미랑 해삼 요리도 있나?”
점원은 탁자에 놓인 주머니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다 있습니다. 하지만, 가격이 조금 비싸지요. 상어 지느러미 요리는 한 그릇에 닷 냥, 해삼 요리는 한 접시에 여섯 냥입니다.”
묵용청양이 말했다.
“우선 저 애들이 말한 거 전부 내오고, 여기에 한 사람당 상어 지느러미 요리 한 그릇씩, 해삼 요리는 큰 접시로 하나 주게. 이 집에서 유명한 요리도 몇 개 갖다 주고. 술은 꼭 십 년 이상 된 오래된 명주로 가져오게. 일단은 이렇게만 주문하고… 부족하거든 다시 부르겠네.”
다들 환호를 내질렀다.
“와, 역시 대장 최고!”
점원은 다시 그녀의 주머니를 힐끗거렸다. 값을 치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관리인에게 이들이 음식값을 떼먹고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히 지켜보라고 할 생각이었다.
사실 점원뿐만 아니라 판등과 나머지 일행들도 걱정하긴 마찬가지였다. 청양이 부잣집 딸인 건 알고 있지만 저걸론 턱없어 보이는데.
산응이 그녀의 주머니를 들고 무게를 가늠했다. 주머니는 생각보다 가벼웠고 흔드니 삭삭 소리가 났다. 그가 물었다.
“대장, 은자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영안이 웃으며 말했다.
“그 안에 든 게 은자일 것 같으냐?”
“은자가 아니면… 설마 금자란 말입니까?”
묵용청양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안에 든 금 조각에는 황궁의 표시가 있었다. 금 조각을 꺼내는 순간 그녀의 신분이 탄로 날 터. 그녀는 재빨리 주머니를 빼앗아 오더니 영안에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네가 사.”
“…….”
모든 이들이 할 말을 잃었다.
점원이 관리인에게 투덜거리는데 방금 주문한 아가씨가 내려오더니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어 지느러미랑 해삼 요리는 됐네. 십 년 된 술도 오 년 묵힌 걸로 가져다 주게. 다른 건 그대로 주고.”
점원은 ‘거 봐라. 돈 없을 줄 알았다니까. 돈도 없으면서 그리 주문을 하면 쓰나?’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부끄러운데 점원이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묵용청양은 별안간 당찬 기세가 차올랐다.
“뭘 그리 보는가? 돈 없는데 주문 많이 한 사람 처음 보나?”
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몸을 돌려 계단으로 올라갔다.
점원과 관리인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물론 돈도 없으면서 주문을 많이 한 사람은 본 적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당찬 모습을 보인 사람은 처음이었다.
별실로 돌아오니 영안이 사건에 대해 얘기 중이었다.
“산응은 일척홍이 무예에 뛰어난 사람이라고 했고, 판등은 사평 현지인이라고 했어. 청양은 혼인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일 거라고 했고. 세 사람의 분석을 종합해 봤을 때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이 한 사람 있어.”
묵용청양은 영안이 자신의 분석을 귀담아 들어 주자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녀가 서둘러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누군데?”
“위무권관의 소관주 허문헌. 그는 무술에 능하고 이곳 현지 사람이야. 혼인한 지는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지.”
판등이 말했다.
“하지만… 허문헌은 현부 대인의 사위잖아요. 그자는 아니겠죠.”
“그자인지 아닌지는 조사해 보면 알겠지.”
영안이 말했다.
“그리고 세 번째 사건은 다른 사건과 달라. 죽은 양추영의 오라버니인 양추민은 사건이 벌어진 후, 미향을 쓴 흔적이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잡아뗐어. 어쩌면 범인과 양추영이 서로 아는 사이일지도 몰라. 이 부분도 조사해야 해.”
점원이 음식을 가져왔을 땐 영안이 말을 모두 마친 뒤였다. 다들 떠들썩하게 음식을 먹고 마시며 즐겼다.
술을 마시지 않은 영십구도 자리를 지키긴 했지만, 허리는 줄곧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편안하게 앉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에 비해 그의 자세는 유독 공손해 보였다. 이 모습에 문득 마음이 동한 소제갈은 묵용청양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식사 후, 영안이 계산을 끝내고 오자 다들 웃고 떠들며 밖으로 향했다. 점원은 문 앞에서 그들을 배웅했는데 묵용청양에 대한 인상이 유독 강해서 몇 차례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자 영십구가 곧장 검을 뽑아 그의 목에 가져갔다.
“뭘 보는 것이냐?”
점원은 깜짝 놀라 바들바들 떨며 대꾸했다.
“아… 아무것도 안 봤습니다요.”
묵용청양이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
“십구, 그렇게 겁주지 마.”
영십구는 검을 거두곤 점원에게 눈을 부라린 뒤, 묵용청양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산응이 말했다.
“대장의 수행원 말이야, 엄청 흉포하네.”
소제갈이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대장한테 좀 더 예의 있게 대해야겠어.”
산응이 물었다.
“왜?”
소제갈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수행원이 저렇게 흉포하니까.”
그의 말에 다들 별생각 없이 웃으며 걸어갔다.
* * *
위무권관은 사평현에서 명성이 자자했고 관장, 허세강도 덕망이 높았다. 그는 슬하에 외아들 허문헌을 두고 있었는데, 허문헌은 상냥한 성격에 무술 실력도 매우 뛰어났다.
한 달여 전, 허문헌은 현부의 둘째 딸과 혼인을 치렀다. 부부 사이도 매우 좋아, 둘은 늘 함께 밖을 다니곤 했다. 새색시와 시부모 간의 관계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기에 아무리 조사해도 흠잡을 데 없는 집안이었다.
수집한 정보를 분석하던 영안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치상 허문헌 같은 사람은 범행을 저지를 리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품행도 올바르고 가정 환경도 좋았으며 부자간의 애정도 돈독했다. 혼인 후 부부 사이까지 좋으니 좀처럼 문제 될 게 없었다.
소제갈은 양추영 사건을 조사하다 아주 작은 실마리를 발견했다. 양추영의 아버지와 허세강이 동향이라 양추양과 허문원도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는 것이었다.
양추민은 미향을 쓴 흔적이 절대 없다고 잡아떼니,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전가에서는 위무권관에서 호위 무사를 고용했다. 이 또한 허문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영안은 허문헌에 대한 조사를 계속 이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