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6화
황제의 지시서 덕분에 묵용청양은 영십구를 데리고 당당히 출궁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에 올라타 거리를 뚫고 영부로 향했다.
영부의 머슴은 묵용청양을 보자마자 곧장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전하, 오셨습니까.”
묵용청양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비단을 곧장 그에게 던졌다.
“이건 너희 부인 것이네. 도련님은 사평에 갔다지?”
“예, 도련님은 어제 사평에 가셔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알겠다.”
묵용청양은 말을 돌려 성밖으로 내달렸다. 영십구는 소리 없는 괴성을 질렀다. 보나 마나 공주 전하에게 또 당한 것이다! 그는 서둘러 그녀를 뒤쫓았다.
“전하, 소인, 황상께 전하를 잘 모셔 오기로 약조하였습니다. 부디 소인을 함정에 빠뜨리지 마십시오.”
묵용청양은 말에게 다리를 힘껏 붙이며 고삐를 내리쳤다.
“나랑 같이 사평에 가면 되잖아. 돌아와서 황형께서 물으시거든 내가 기절시켜서 데려갔다고 하면 되지.”
영가의 병사를 그리 쉽게 기절시켜서 끌고 갈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체면은 어찌하고……. 하지만 묵용청양을 기절시켜 궁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번엔 도중에 그를 내치는 일은 없겠지.
사평에 도착한 묵용청양은 곧장 사평현부로 달려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영안만 빼고 모두 그곳에 있었다. 다들 그녀를 보자 기뻐 환호했다.
“대장, 안 형이 대장은 이제 돌아오지 않을 거라던데… 정말이에요? 거짓말이에요?”
묵용청양이 웃으며 공수를 했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이렇게 돌아왔잖아?”
산응은 그녀가 낯선 이를 데려오자 그에 관해 물었다.
“대장, 이분은 누구예요? 소개 좀 해 줘요.”
“여긴 내 수행원… 십구라고 부르면 돼.”
소제갈이 영십구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형제는 성이 어찌 되십니까?”
영십구가 입을 열려는데, 묵용청양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우리 집 수행원이니 당연히 황씨지.”
“…….”
왜 성까지 바꿔야 한단 말인가…….
소제갈은 웃음을 터뜨렸다.
“대장, 어찌 그리 이름을 지으셨습니까? 영가군이랑 똑같네요.”
“그렇게 짓는 게 편하고 외우기도 쉬우니까.”
묵용청양이 그들에게 물었다.
“사건도 벌써 다 해결했는데 왜 또 사평에 온 거야?”
“안 형은 아직도 의혹이 남았는지 사건을 종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조사 중이에요.”
묵용청양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누가 일척홍을 때려죽이라고 했나. 산 채로 잡아 뒀으면 증언까지 받아 내고 얼마나 편해.”
말을 마치자마자 저 멀리 문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그녀는 곧장 고개를 숙이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영십구는 영안을 보더니 다가가 예를 갖추려 했다.
“소…….”
묵용청양이 잽싸게 그를 끌어당겼다.
“여긴 환경문 부문주야.”
영십구의 입에서 소주小主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영가군은 영구가 만들었기 때문에 다들 영안을 소주라고 불렀다. 묵용청양의 말에 영십구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릴 뻔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영안이 묵용청양을 훑으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너희 오라버니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묵용청양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날 어쩌지 못하는데… 오라버니가 날 어찌하겠어?”
영안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녀 역시 웃음기를 거두고 영안을 한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사실 줄 게 있어서 온 거야.”
“뭔데?”
묵용청양이 품에서 비단 함을 꺼내 뚜껑을 열고 그에게 들이밀었다.
“네가 이걸 모은다는 걸 알고 특별히 가져온 거야. 어때, 의리 있지?”
영안은 복숭아씨 조각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입에서는 시큰둥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 이유도 없이 아첨하는 건 간신배나 하는 짓인데… 말해 봐. 무슨 꿍꿍이야?”
묵용청양은 함을 그의 손에 밀어 넣고 까치발을 들곤 작게 말했다.
“지난번 일은 내가 잘못했어. 세심하게 생각하지 못해서 네게 걱정을 끼쳤지…….”
“난 널 걱정한 적 없어. 너 때문에 다들 죄를 뒤집어쓸까 봐 걱정한 거지.”
“영안, 고개 들고 내 눈 똑바로 봐 봐.”
영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왜 네 눈을 봐야 하는데?”
“내 눈 보고 말해 봐. 정말 내 걱정은 안 했어?”
영안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별안간 두뇌가 마비되는 듯한 기분이 들자 바로 시선을 피했다.
“됐어, 이미 다 지난 일을 뭐 하러 꺼내. 어서 가. 황상께서 걱정하실 테니까.”
“십구랑 같이 있으니까 걱정 안 할 거야.”
묵용청양이 말했다.
“난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맺는 성격이잖아. 사건이 끝나지 않는 한… 절대 안 갈 거야.”
영안이 비단 함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이거 가져가. 난 필요 없으니까. 넌 이제 더는 환경문 사람이 아니야. 여기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묵용청양은 고개를 숙이고 비단 함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찌 된 까닭인지 ‘넌 이제 더는 환경문 사람이 아니야’라는 말을 듣는데 몹시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듯 아주 씁쓸한 게, 눈물까지 흐를 것 같았다.
영안의 시야에, 그녀의 눈에서 반짝이는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게 들어왔다.
그는 흠칫 놀라 고개를 숙이고 묵용청양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물방울 두 개가 반짝이며 떨어졌다. 그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곁눈으로 바라보니 판등을 포함한 수하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몸을 틀고 그들의 시선을 차단한 뒤, 묵용청양을 방 안으로 데려갔다.
그는 어린 시절 묵용청양에게 강제로 선택된 놀이 동무였지만, 속으로는 그녀를 그렇게까지 배척하진 않았다. 묵용청양은 다른 여인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우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고 성격도 사내들처럼 털털했다. 그녀와 오랜 시간 함께 하다 보니 이젠 그런 모습이 그에겐 퍽 익숙했다. 그런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다니… 그는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왜 울어?”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널 때리길 했어, 욕하길 했어. 이게 황상 귀에 들어가면 나더러 어떻게 살라는 거야?”
묵용청양이 얼굴을 가렸다.
“우린 어릴 때부터 지금껏 같이 커 왔는데, 이제 넌 내가 필요 없잖아…….”
어쩐지 조금 이상한 말이었다. 그가 애써 그녀를 타일렀다.
“청양아,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환경문은 정말 네가 있을 곳이 못 돼. 황상부터 우리 어머니, 월규 고고, 녹하 고고, 가 대인에게도 물어봐. 네가 환경문에 있는 걸 누가 동의하겠어?”
“우리 황수는 동의했어.”
황수라면 사봉봉을 가리키는 것일 터. 영안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침묵을 지켰다.
묵용청양은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흑…….”
영안은 방 안을 서성거렸다. 묵용청양의 울음소리엔 마력이라도 담긴 것인지 자꾸만 그의 마음을 난잡하게 들쑤셨다.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번 그녀를 타일렀다.
“울지 마, 응?”
“흑, 훌쩍…….”
다시 방 안을 서성거린 영안은 그녀 주변을 기웃거린 뒤에야 멈춰 섰다.
“네가 필요 없는 게 아니야. 그저 환경문은 정말 여인이 있을 곳이 아니라고.”
“흑흑…….”
“새로운 권법을 가르쳐 줄게. 이제 됐지?”
“훌쩍, 흑…….”
영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선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알겠어. 그만 울어. 네가 정말 환경문에 그렇게 남고 싶거든 남…….”
묵용청양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고 활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 입으로 말한 거야. 번복은 절대 안 돼!”
눈물 자국 없이 깨끗한 그녀의 얼굴을 본 영안은 자신이 또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그렇지. 어찌 이 웬수가 그리 서럽게 울 수 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데… 지난번처럼 그런 일이 또 생기거든 그때는 두 번 다시 부탁해도 소용없어. 네 그 파렴치한 얼굴로 죽어도 못 떠나겠다면 내가 떠날 테니까. 부문주도 네가 해.”
“절대 그럴 일 없어.”
묵용청양이 넉살 좋게 웃었다.
“난 정원 외 수습 관원이잖아. 이렇게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찌 부문주를 하겠어. 그건 한 사오 년쯤 뒤에 다시 얘기하자.”
영안은 눈을 희번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는 정말이지, 이 웬수와 일각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 * *
묵용청양의 방에 침입했던 사내는 맞아 죽긴 했어도 금세 신분이 탄로 났다. 그녀에게 방을 빌려줬던 노파가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찾아온 것이다. 바닥에 놓인 주검을 본 노파는 입을 막은 채 비명을 내질렀다. 그 사내는 그녀의 일가 조카였다.
여기에 다른 피해자 가족들도 몇 명 찾아와 그를 본 적 있다고 증언했다. 가장 마지막에 피살된 어린 과부는 혼자 살고 있었지만, 죽은 그 사내가 과부에게 장작을 패 주는 걸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이러한 단서들을 한데 모아 정리하니 대략적인 정황이 드러났다.
범인의 이름은 조삼趙三, 늘 남을 속이고 남의 것을 훔치던 자였다. 양친이 세상을 떠난 후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서른을 훌쩍 넘기고도 부인을 얻지 못했다.
그런 그를, 성 서쪽 작은 골목에서 세를 놓았던 그의 종친 고모가 이따금 집안 보수를 맡기느라 종종 불렀다고 한다. 골목을 자주 들락거리다 보니 그는 동네 상황을 훤히 꿰고 있었고, 평소 여인들을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범인이라는 얘기를 듣고도 다들 그리 놀라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사평의 피해자 가족들은 그를 전혀 알지 못했다.
영안은 자신의 추측에 더욱 확신을 가졌다.
일척홍은 두 사람이거나, 사평에 있는 자가 진짜 일척홍일 것이다. 통녕의 조삼은 그저 일척홍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조삼은 자신이 익숙한 지역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성 서쪽 일대를 벗어난 적 또한 없었다. 그러니 통녕의 사건은 종결할 수 있어도 사평의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영안은 수하들을 사평으로 불러 다시 조사를 시작했다.
다만 사평에서 일어난 네 개의 사건 이후, 일척홍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만약 산응이 말한 대로 세상을 떠도는 강호 고수가 저지른 범행이라면, 사평을 계속 지킨다 한들 의미 없는 일이었다.
사평현부는 사건을 빨리 종결시키고 싶어 했다. 어쨌든 한 달이라는 기한이 고작 며칠밖에 남지 않았으니, 사건을 마무리했다고 하면 사평현성의 민심을 달랠 수 있을 터. 피해자의 가족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현부로 찾아와 썩은 채소 껍질 따위를 집어던지는데… 이를 어찌 더 견딜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영안이 종결을 반대했다. 이렇게 사건을 끝내면 일척홍의 정체가 조삼인 것처럼 여겨질 테고, 진짜 일척홍은 더 활개를 치고 다닐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그를 붙잡기란 더 어려워질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