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5화
묵용린이 말했다.
“유 귀인의 바둑 솜씨가 보통이 아닌 걸 보면 분명 총명한 자거늘… 어찌 이렇게 우둔한 방법으로 황후를 모함하려 하였을까?”
가난청이 웃으며 말했다.
“초나라의 한 가난한 서생이 『회남자淮南子』를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합니다.
‘사마귀는 매미를 노릴 때 나뭇잎에 몸을 숨긴다.’
그래서 서생은 그 나뭇잎을 구하러 가지요. 사마귀가 잎을 붙잡고 매미를 노릴 때, 서생은 그 잎을 꺾었습니다. 하지만 서생이 꺾은 나뭇잎은 아래로 떨어지고 말지요. 나무 아래 쌓여 있던 다른 잎들과 섞인 탓에 서생은 결국 나뭇잎을 몇 말이나 쓸어 담아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 이야기로 일엽장목一葉障目(나뭇잎 하나가 눈을 가려 전체를 보지 못함)이라는 성어가 생겨났습니다. 지금 유 귀인도 이러한 상황과 같지요. 얼마 전까지 항상 황상과 함께 지냈으니 황상께서 자신을 특별 대우 한다고 여겼을 테지요. 그게 이 일을 벌인 첫 번째 이유입니다.”
묵용린이 물었다.
“두 번째는?”
가난청이 말했다.
“두 번째는 황상께서 황후를 싫어하시니 황후의 약점을 황상 손에 쥐여 드리면 황상께서 일의 시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곧장 황후를 벌하실 거라 생각한 겁니다.”
묵용린은 흠칫 놀랐다.
“짐이 황후를 싫어하는 게… 그리 티가 난단 말이냐?”
가난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상께서 황후를 싫어하시는 건 궁 안의 모든 이들이 전부 다 알 것입니다.”
* * *
유 귀인도 자신이 황후의 책임을 성토한 것에 허점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황제가 조금이라도 진상을 조사하려 한다면 금세 사실이 들통날 것이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필사적으로 끝까지 덤비는 것이었다. 누가 증거를 제시하든 그자는 황후에게 매수되었다고 우겨야 했다.
하지만 황제는 분명 이 일을 조사했으면서도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고, 결국 이 일은 평온하게 지나갔다.
묵용청양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사봉봉에게 말했다.
“황형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분명 유 귀인이 꾸민 짓인 걸 알면서도 죄를 묻지 않고 저리 내버려 두다니요?”
사봉봉이 말했다.
“그래도 유 귀인은 며칠간 황상의 총애를 받은 총비니까요. 황상께서 체면을 세워 주시려는 것일 테죠.”
“체면은 개뿔.”
묵용청양이 입을 삐죽거렸다.
“저렇게 멍청한데 총비라니요. 황형의 지능까지 떨어뜨리겠어요. 이 세상에서 황형과 정말 어울리는 사람은 오직 봉봉뿐이에요.”
금천아가 깔깔 웃더니 허리춤에 달린 비수를 꺼내 묵용청양에게 건넸다.
“전하, 소인이 선물로 드릴 테니 호신용으로 쓰세요.”
그녀의 비수는 평범한 비수와는 달라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묵용청양은 온갖 병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손에 딱 잡히는 비수는 본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늘 금천아의 비수를 눈여겨보던 참이었는데 달라고 하기는 민망해서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천아가 먼저 선물로 건네자 묵용청양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너희 주인 칭찬 몇 마디 했다고 비수를 주다니. 앞으로는 매일 와서 칭찬할게. 그럼 비수가 다 몇 개야?”
금천아가 말했다.
“저희 마마께만 잘해 주신다면, 저 금천아가 전부 다 가슴에 새겨둘 것입니다. 비수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드릴 수 있습니다. 제 목숨을 전하께 바치겠습니다.”
“내가 네 목숨을 가져서 무엇하겠어. 네가 잘 가지고 있다가 주인을 모시는 데 쓰렴.”
묵용청양은 별안간 무언가 떠올라 사봉봉을 슬쩍 끌어당겨 조용히 물었다.
“봉봉,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황형이 봉봉을 무서워하는 것 같던데요?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황상께서 절 싫어해서 그렇습니다.”
묵용청양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하는 건 그렇다 쳐도, 분명 무서워하기도 해요. 내가 못 알아볼 줄 알고요? 십칠더러 둘 사이에 끼어 있으라고 한 것도 그렇고요. 꼭 맞을까 봐 겁내는 사람 같더라니까요. 설마 그새 엄청난 무술이라도 익힌 거예요? 그럼 저 좀 가르쳐 줘요.”
사봉봉은 그녀의 기이한 발상에 웃음이 터졌다.
“무술이라니요, 절대 아닙니다.”
그녀는 묵용청양이 계속 이 일을 물고 늘어질까 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한데 전하께선 환경문에서 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며칠간 궁에만 계시는 듯한데 이제 환경문엔 가고 싶지 않으시어요?”
환경문 얘기에 묵용청양은 위험천만했던 일을 사봉봉에게 들려주었다.
사봉봉도 황형처럼 그녀를 꾸짖을 거라 예상했지만, 예상 외로 그녀는 묵용청양의 손을 잡고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전하의 용기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묵용청양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날 알아주는 사람을 봉봉밖에 없네요. 영안이랑 황형… 월규 고고 모두 절 혼냈거든요.”
“저는 오히려 전하께서 용기와 지혜 모두를 겸비했다고 느껴지는걸요.”
사봉봉이 웃으며 말했다.
“결국 전하의 계략으로 도적을 잡지 않았습니까? 황상과 월규 고고께선 전하를 너무 아끼시어 그리 질책한 것이지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 영안은요? 영안도 절 아껴서 그런 거예요? 황형이 죄를 물을까 봐 겁이 난 게 아니고요?”
사봉봉이 말했다.
“황상께서 죄를 물으시는 것보다는 전하의 안위가 더 걱정돼서 그랬을 거예요.”
“정말요?”
“그럼요. 둘은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며 같이 자랐잖아요. 두 사람보다 더 가까운 사이는 없어요.”
묵용청양은 입꼬리를 씩 올렸지만, 입에선 원망이 터져 나왔다.
“그날 영안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차마 영안한테 찾아가지도 못하겠어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금천아가 놀리듯 말했다.
“세상에… 전하께서 무서워하는 사람이 다 있어요?”
묵용청양이 코웃음을 쳤다.
“누가 무서워한대? 그저 그 애를 상대하기 성가신 것뿐이야.”
사봉봉이 말했다.
“영안은 겉으로 보기엔 차가워도 마음은 따뜻하지요. 전하께서 부드럽게 몇 마디 건네시면 금세 화가 풀릴 거랍니다.”
묵용청양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지만, 입으로는 전혀 고집을 꺾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흥, 그 애한테 부드럽게 말하라고요? 귀신이나 퍽도 그리하겠지요. 그럼, 저기 뭐야.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사봉봉이 어찌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할까. 사봉봉은 그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경옥을 불러 옷감을 한 필 가져오라고 했다.
“남의 집에 빈손으로 찾아가는 건 말이 되지 않아요. 이 옷감은 봄에 진상품으로 올라온 강남 비단이에요. 얇고 통풍이 잘 되어서 영 부인이 새 치마를 지어 입으시기에 좋을 거예요.”
묵용청양도 사양하지 않고 비단을 받아 든 뒤, 공손히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고마워요, 황수.”
“어서 가요.”
묵용청양은 비단을 들고 궁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녀를 막은 병사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전하, 황상께서 며칠간 전하의 출궁을 불허한다 하셨습니다.”
묵용청양은 그제야 황형이 화가 나서 그녀의 출궁을 금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비단을 어깨에 짊어진 장공주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몇몇 시종들이 대신 비단을 들어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거절한 채 승덕전으로 찾아갔다.
승덕전에 다다른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단 아래에 서 있는 영십칠에게 물었다.
“십구는?”
영십칠이 말했다.
“병영에 있습니다.”
“그러면 가서 좀 불러 줘. 본 전하가 일이 있어서 찾는다고.”
영십칠이 꿈쩍도 하지 않고 대꾸했다.
“소인은 근무를 서는 중이라 움직일 수 없습니다.”
묵용청양은 눈을 번득였다. 황제 곁의 모든 시위는 전부 다 고집불통이었다. 영구부터 영십칠까지… 그들에겐 오직 황제뿐. 다른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사희를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사희는 금세 영십구를 데려왔다.
묵용청양이 말했다.
“나랑 같이 황상을 만나러 가자. 눈치껏 행동하고 함부로 입을 놀려선 안 돼.”
“…….”
어째 또다시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듯한데…….
상주서를 읽고 있던 묵용린은 곁눈으로 묵용청양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찌 또 온 것이냐?”
묵용청양이 제법 진지하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황형, 오늘은 기홍 고고의 생일입니다. 잠시 출궁하여 옷감 한 필을 선물로 드리고 오겠습니다. 제가 혼자 나가면 황형께서 마음을 놓지 못한다는 거 잘 압니다. 그래서 특별히 십구를 데려갈 생각입니다. 선물을 드리고 난 뒤엔 곧장 돌아오겠습니다.”
묵용린이 붓을 내려놓았다.
“기홍 고고의 생일이라? 어찌 짐은 모르는 일이냐?”
“그저 매년 오는 생일이니 그리 큰일도 아니지요. 영 대인도 그래서 언급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이라고?”
묵용린은 그녀의 말을 바로 믿을 수가 없었다.
“짐의 기억으로는 이리 이르지 않았는데.”
“오늘 맞습니다.”
묵용청양이 확신하며 말했다.
“며칠 전에 영안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곧 기홍 고고의 생일이니 집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고요.”
“영안은 어제 사평에 갔다.”
“그래요?”
묵용청양이 말했다.
“그럼 오늘 분명 돌아올 겁니다.”
묵용린은 기홍의 생일이 여름이라고 기억하고 있었지만 정확한 날짜까진 알지 못했다. 그는 잠시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네가 갈 것 없다. 짐이 사람을 보내 다녀오라고 하마.”
“안 돼요, 황형.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기홍 고고랑 녹하 고고는 친고모나 마찬가지라고요. 군신 사이처럼 다른 이를 보내지 말아요. 여기 십구 좀 보세요. 황형이 마음을 놓지 못할 게 뭐가 있어요?”
묵용린은 영십구를 흘기며 말했다.
“네가 강남에서 돌아올 때 십구가 널 놓치지 않았더냐. 짐이 어찌 마음을 놓겠어?”
영십구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황상, 소인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엔 황상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하겠습니다.”
묵용린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를 빤히 바라본 묵용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반드시 장공주 전하를 안전히 모셔 와야 한다.”
“예, 황상.”
묵용청양은 황형이 그녀의 출궁을 윤허한다는 걸 듣고도 기뻐 날뛰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황형, 기홍 고고한테 선물은 따로 보내지 않을 거예요?”
묵용청양이 말했다.
“보석함을 보내야겠다.”
“에이, 기홍 고고가 평소에 장신구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닌데요. 고고는 아기자기한 소품 같은 걸 좋아한다고요. 복숭아씨에 조각을 새겨 넣은 공예품 같은 건 어때요?”
묵용린은 깊게 고민하지 않고 대꾸했다.
“그래, 그렇다면 그걸로 하지. 네가 짐 대신 안부 좀 잘 전해 주거라.”
그는 사희에게 조각품을 가져와 묵용청양에게 전해 주라고 분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