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4화
방 안에 있던 이들이 전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주 전하가 지금 무슨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이란 말인가?
묵용린이 불만 섞인 얼굴로 눈을 부릅떴다.
“허튼소리! 유 귀인은 몸이 좋지 않으니 놀라게 하지 말거라.”
“허튼소리가 아니에요.”
묵용청양이 찐빵 반쪽을 소매에 넣으며 말했다.
“다들 안 들리면 그만둬요. 내가 가져가서 천천히 들어 볼 테니까.”
그녀가 해괴한 말을 진담처럼 하자 몇몇 궁녀들은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놀랐다.
묵용린이 유 귀인에게 물었다.
“이곳 상황을 황후는 모르는 것이오?”
유 귀인이 울며 읍소했다.
“지난번 신첩의 숙부 일로 황후 마마와 신첩의 사이가 조금 어색해졌습니다. 마마께서 후궁의 업무를 관장하시니 금화궁의 일도 알고 계시겠지만, 신첩에게 이리 하셨습니다. 신첩이 조금 억울한 건 괜찮지만, 황후 마마께서 이리하시다 황상의 명예를 훼손할까 걱정입니다…….”
묵용린이 그녀를 위로했다.
“걱정하지 말고 푹 쉬시오. 태의가 금세 진료를 하러 올 테고, 주방에도 짐이 분부를 해 놓았으니 오늘부터 차가운 찐빵을 먹을 일은 없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황상.”
유 귀인은 침상에 엎드려 감사 인사를 전했다. 너무 울어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은 마치 누명을 다 씻은 사람처럼 보였다.
묵용청양이 침상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병이 난 뒤, 황후께 알릴 사람을 보낸 적 있나요?”
유 귀인이 고개를 저었다.
“신첩이 어찌 감히 그리했겠습니까.”
“황후께서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감히 못 할 게 뭐가 있어요?”
묵용청양이 코웃음을 쳤다.
“알려 주지도 않고서 황후가 어찌 이런 일을 다 알겠어요? 날마다 귀인을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닌 것을요.”
“황후 마마께선 후궁을 관장하십니다. 이렇게 큰일을 알지 못하신다면, 직책을 다하지 못하시는 것이지요.”
“하, 지위도 낮은 귀인이 병이 난 게 그렇게 큰일이란 말이에요? 본인이 고하지도 않고 황후를 탓하다니. 천하를 다스리는 황상도 귀인이 아픈 걸 몰랐어요. 왜 황상껜 불만이 없는 거죠? 황후는 만만한가 봐요?”
“청양!”
묵용린은 참다못해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이 틈에 밖으로 나가고 싶기도 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유 귀인을 보고 있자니 더는 자리를 지키기 힘들었다.
밖으로 나온 묵용린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 명을 내렸다.
“봉명궁으로 갈 것이다.”
마음 같아선 사봉봉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사태가 심각하니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사봉봉을 찾아가 그의 태도를 분명히 밝혀야 했다. 물론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그는 영십칠을 불러 조용히 분부했다.
“봉명궁에 들어가거든 짐 곁을 지켜야 한다. 황후가 짐에게서 다섯 발자국 이내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단 말이다. 알겠느냐?”
영십칠은 황제의 명이 조금 이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 명 받잡겠나이다.”
묵용린은 어가에 오르다가 묵용청양이 자신의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무엇 하러 짐에게 그리 가까이 붙는 것이냐?”
묵용청양이 뻔뻔하게 웃으며 작게 물었다.
“황형, 왜 봉봉을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봉봉의 미색을 당해내지 못할까 봐 그래요?”
묵용린은 수치심에 성이 나서 그녀를 밀쳤다.
“묵용청양, 또 이리 불경하게 행동했다간… 짐이… 짐이 곤장을 칠 줄 알거라!”
묵용청양은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황형은 명군이시잖아요. 사소한 원한으로 곤장을 치신다면 어찌 뭇사람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겠어요?”
봉명궁에 도착하니 묵용린을 맞이하기 위해 사봉봉이 복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묵용린은 멀찍이 서서 말했다.
“일어나시오. 안에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사봉봉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
묵용린이 영십칠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가 곧장 황제 앞을 가로막았다.
“마마, 먼저 안으로 드시지요.”
사봉봉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당연히 황상께서 먼저 드셔야지.”
“마마께서 먼저 드시지요.”
사봉봉이 묵용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상?”
묵용린이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먼저 들라면 먼저 들면 되지… 어찌 그리 말이 많은 것이오?”
묵용청양이 그의 뒤를 비집고 나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도 황형 앞으로 갈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사봉봉을 끌어당기며 화기애애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묵용린은 커다란 의자에 앉았고 영십칠이 가까이에 서서 그를 지켰다. 아무리 봐도 조금 이상해 보이는 자리 배치였다. 꼭 누군가의 접근을 막기 위해 영십칠이 그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사봉봉은 묵용린의 속내를 훤히 꿰고 있었기에 고개를 숙이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묵용린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황후, 어째서 유 귀인에게 그리 모질게 대한 것이오?”
그는 죄를 따져 물으러 온 기세로 말했지만, 사봉봉은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
“신첩,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첩이 왜 유 귀인을 모질게 대하겠습니까?”
“유 귀인이 병이 났는데 어째서 태의를 보내 주지 않은 것이오? 어째서 음식도 제대로 보내 주지 않고 매일 식어 빠진 찐빵만 보낸 것이오?”
“황상께선 신첩이 그리한 것 같으십니까?”
“이미 그리하지 않았소.”
“신첩이 정말 유 귀인을 그리 대하려 했다면… 그리 공개적으로 했을까요?”
사봉봉이 고개를 저었다.
“신첩이 정말 그리 우둔했다면 사가 상호는 진작에 무너졌을 겁니다. 황상의 눈에 신첩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 간사한 상인이지 않습니까?”
“…….”
묵용청양은 묵용린의 말문이 막힌 걸 보자 웃으며 박수를 쳤다.
“황후께서 맞는 말씀만 하시네요. 황후가 바보도 아니고 황형한테 그런 꼬투리를 잡히겠어요? 제가 보기엔 오늘 일은 유 귀인이 꾸민 짓이에요.”
그녀가 소매에서 찐빵을 꺼내 들었다.
“황형도 만져 봤듯이 이 찐빵은 차갑게 말라비틀어졌어요. 하지만, 지금은 여름이에요. 하루 이틀 내버려 둬도 말랑할 텐데…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는지 돌덩어리가 따로 없네요. 보아하니 불길에 말렸다가 차가운 물에 한동안 담가 둔 것 같아요.”
사실 묵용린도 이미 알고 있었다. 딱딱하게 마른 찐빵을 만지면서 그 또한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리 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사봉봉이 어찌 말하는지 보고 싶었다. 한데 묵용청양, 이 웬수가 환경문에서 좀 배웠다고 자꾸만 잘난 체를 하다니… 정말 밉살스럽기 짝이 없었다!
묵용청양은 또다시 소매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봐요, 말랑말랑한 팥떡이에요. 방금 유 귀인의 서랍에서 몰래 가져온 거죠. 이렇게 맛있는 떡이 있는데 어찌 그런 찐빵을 먹겠어요?”
묵용린이 말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유 귀인이 일부러 병이 난 척했다?”
“제법 그럴싸하던걸요.”
묵용청양이 말했다.
“지금은 정말 병이 났을 거예요. 처음엔 꾀병이었으니 태의도 처방을 내려 주지 않았겠죠. 그러다 정말 병이 난 거고요. 못 믿겠으면 태의를 데려와 물어보세요.”
그녀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유 귀인도 참… 이렇게 연기를 해 봤자 자기만 고생이지. 이득이 될 건 하나도 없는데.”
묵용린이 사봉봉에게 물었다.
“유 귀인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신첩이 전혀 몰랐다고 말한다면 황상께서는 또 이 일로 신첩을 깎아내리시겠지요.”
사봉봉이 웃으며 말했다.
“귀인의 맥을 봐 준 태의가 저에게 찾아와 별일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무탈하다고 하니 신첩도 더는 마음을 쓰지 않았지요. 음식 같은 경우는 각 궁의 시종이 주방에서 직접 받아 가는 방식입니다. 주방에서는 그들이 달라는 대로 음식을 나눠 주지요. 유 귀인이 왜 그렇게 찐빵을 좋아하냐 물으신다면 신첩도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묵용청양은 대놓고 웃음을 터뜨렸고, 묵용린은 그녀가 참으로 능수능란한 말솜씨를 가졌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어찌하여 유 귀인을 말리지 않은 것이오?”
“황형, 왜 그렇게 억지를 부려요.”
묵용청양이 끼어들었다.
“그럼 황후가 유 귀인한테 찾아가 이러지 말라고 애원이라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번엔 금천아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사봉봉도 입술을 오므리며 웃었다.
묵용린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황후는 웃는 것도 퍽 단정하다고 생각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 눈망울에 걸린 웃음기까지… 마치 봄바람이 불어와 호수에 잔잔히 물결이 이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이 딴생각을 했다는 것에 괴로워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황후, 유 귀인의 행실을 전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조금도 관여하지 않다니! 황후의 어진 마음은 다 어디로 갔소?”
묵용청양이 또다시 끼어들려 했지만, 사봉봉이 막아섰다.
“황상, 신첩은 황후지 그녀의 어머니가 아니며, 유 귀인 역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아닙니다. 그녀 또한 후환을 예상하고 감당할 능력이 있을 겁니다. 신첩은 후궁의 모든 이들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달변가인 묵용린도 사봉봉 앞에선 말문이 막혔다. 그도 이게 싫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누가 간사한 상인 아니랄까 봐… 그녀는 말을 할 때도 물 샐 틈이 없었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말할 게 없었던 묵용린은 어가를 타고 자신의 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어느 한쪽 말만 믿을 생각은 없었기에 왕장량에게 이 일을 조사할 것을 분부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왕장량이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태의가 처음 금화궁에 갔을 때, 유 귀인은 병이 난 상태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처방전을 내리는 대신 편히 쉬라는 말만 해 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로 유 귀인은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않은 탓에 정말 병이 났다. 태의가 이미 다녀가 진료를 마쳤으니, 약과 끼니만 잘 챙기면 닷새 안에 병이 나을 거라 했다.
주방에서는 매일 따뜻한 밥과 음식을 준비했고, 각 궁의 시종들이 찬합에 음식을 담아 갔다고 했다. 그 많은 음식들 중 유 귀인의 시종이 찐빵만 가져간 거라 주방과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다.
묵용린은 손을 내저어 왕장량을 물렸고, 혼자 탁자 앞에 앉아 깊은 고민에 잠겼다.
가난청은 금화궁에 함께 가진 않았지만, 이미 어찌 된 일인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황제가 조용히 앉아 있자 그가 물었다.
“황상,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