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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83)화 (1,083/1,192)

제1083화

묵용린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네가 죄를 지은 걸 알긴 하는구나. 말해 보거라. 어찌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것이냐. 듣자니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묵사발을 만들었다던데. 일척홍의 죄가 극에 달했다 해도, 동월의 율법이 엄히 다스릴 것이었다. 이리 충동적이어서야 짐이 어찌 네게 환경문을 맡기겠느냐?”

영안이 고개를 들고 왕장량과 사희를 바라보자 묵용린은 그들을 내보냈다. 영안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신이 말씀드리려는 죄는 장공주 전하를 잘 지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마터면 공주 전하의 순결이 훼손될 뻔하였습니다.”

묵용린의 동공이 빠르게 수축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영안은 묵용청양이 자신을 미끼로, 일척홍을 잡으려 한 일을 말해 주었다.

묵용린이 탁자를 힘껏 내리치며 호통쳤다.

“감히 공주에게 불경을 저지르다니… 맞아 죽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어째서 그자를 임안에 데려오지 않은 것이냐. 짐이 직접 그자의 숨통을 끊어 놓아야 했는데!”

영안이 말했다.

“이 일은 소문이 나선 안 되기에 신이 황상 대신 처리하였습니다.”

“잘 죽였다.”

묵용린은 자신의 여동생이 그런 더러운 이와 살갗을 맞댄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자를 능지처참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마에 시퍼런 핏대가 설 만큼 화가 난 황제는 방 안을 몇 바퀴나 서성이다 겨우 냉정을 찾았다.

“일어나거라. 이번 일은 용서하지만, 다음에 또 공주가 위험에 처하거든 짐이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

영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황상, 공주 전하가 환경문을 떠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신은 공주 전하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묵용린은 그제야 문득 사희에게 소리쳤다.

“청양을 불러오너라, 지금 당장!”

그도 영안에게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조차 청양을 제어하지 못하는데 영안에게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묵용청양이 남서방에 도착했을 때, 영안은 이미 떠난 뒤였다. 그녀도 묵용린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꾸짖을 때까지 기다렸다.

평소 오만방자한 그녀가 갑자기 온순해지니 황제도 막상 크게 화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남매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묵용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알겠지?”

“알아요.”

묵용청양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생각이 짧아 황형께 걱정을 끼쳐 드렸어요.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다음이 또 있단 말이냐?”

“아… 아니요, 없어요.”

“만약 영안이 제때 구하지 못했다면 어찌 되었겠느냐? 너도 생각해 봤을 것이 아니더냐? 방금 영안의 말을 듣고 짐은 온몸에 냉수를 끼얹은 기분이었다. 네가 그 기분을 아느냐?

청양아, 네게 사고가 나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봉변을 당하는지 아느냐? 그중 가장 먼저 영안이 다친다. 그 애를 죽게 할 셈이냐? 네가 위험을 무릅쓸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떤 기분이실지 생각은 해 보았느냐? 아버지께서 너를 얼마나 아끼시는데… 네게 사고라도 생기면 아버지께서 어찌 사시겠느냐?”

“신매가 잘못했습니다.”

그녀가 잘못을 인정하니 묵용린도 더는 혼낼 수 없었다. 그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환경문에서 나오거라. 거긴 네가 있을 곳이 못 된다.”

“황형.”

묵용청양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환경문이 왜 제가 있을 곳이 못 돼요? 전 사건을 조사하는 게 좋아요. 그간 많은 걸 배웠고요. 황형, 제발요. 계속 환경문에 있게 해 주세요.”

“짐에게 그리 청해도 소용없다.”

묵용린이 말했다.

“영안이 널 원치 않는 것이니… 청하려거든 그 애에게 가서 청하거라.”

영안의 이름이 나오자 묵용청양은 입만 삐쭉거릴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일은 다시 생각해도 아찔했지만, 영안의 미치광이 같던 모습이 더 무서웠다. 그런데 어찌 영안 앞에 찾아갈 수 있겠는가.

그녀가 작게 투덜거렸다.

“영안은 그날 절 바닥으로 밀쳤다고요.”

“잘 밀쳤구나.”

묵용린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짐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네 뺨을 쳤을 것이다!”

묵용청양은 입을 움찔거렸지만,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만 네 궁으로 돌아가거라. 우두커니 서서 성가시게 하지 말고.”

묵용린이 말했다.

“당분간 밖에 나갈 생각 말고 궁에 잘 붙어 있거라. 짐이 부르면 곧장 오고.”

묵용청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가 황형의 강아지도 아니고… 부를 때마다 어떻게 곧장 옵니까?”

“아직도 감히 말대꾸를 하는 것이냐?”

묵용린은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짐이 금족령을 내려 요대궁 밖도 나오지 못하게 해 줄까?”

그때, 사희가 들어와 고했다.

“황상, 금화궁錦華宮에서 온 자가 뵙기를 청합니다.”

묵용린에겐 퍽 낯선 궁이었다.

“금화궁이라니?”

“금화궁은 세 귀인이 묵으시는 처소입니다. 알현을 청한 자는 유 귀인을 모시는 소안자小安子입니다.”

묵용린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괜한 일로 방해 받는 게 싫었다.

“할 말이 있거든 왕장량에게 하라 이르거라. 지금 짐이 바쁜 게 안 보이느냐?”

사희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황상, 소안자라는 이가 두 눈이 붉게 물든 채 찾아왔습니다. 유 귀인에게 큰일이 났다더군요.”

묵용린은 그제야 흠칫 놀랐다. 사봉봉이 그를 찾아오지 않은 후로 그 또한 유 귀인을 부르지 않았다. 한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큰일이 났단 말인가?

“들라 하라.”

소안자는 안으로 들어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황상, 부디 저희 마마를 보러 와 주십시오. 병을 앓으신 지 오래인데, 아무래도 곧 사달이 날 듯싶습니다.”

묵용린이 물었다.

“무슨 병이길래 그 정도란 말인가? 태의는 뭐라던가?”

“사실 그리 큰 병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병이 났는데도 태의원에서 오지 않았고 식사 또한 제대로 나오지 않아 차가운 찐빵과 물만 드셔야 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엔 찐빵마저 삼키지 못하시고…….”

묵용린이 벌컥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어찌 삼시 세끼 차가운 찐빵만 먹을 수 있단 말이냐? 너희들은 대체 어찌 노비가 된 것들이냐, 주방에서 따뜻한 음식을 가져오지도 않고?”

소안자가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그… 그것이 황후 마마께서…….”

소안자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 의미만은 분명했다.

안 그래도 화가 나 있던 묵용린은 사봉봉에 대한 말이 나오자 더 성을 냈다.

“황후가 어쨌단 말이냐? 똑바로 말하거라.”

황제가 성을 내자 소안자는 바닥에 엎드려 몸을 바들바들 떨었지만, 더없이 유창하게 말했다.

“유 귀인께선 지난번 봉명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신 후, 가슴에 응어리가 생긴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나셨습니다. 소인이 태의원에 가서 진료를 해 달라고 청하니, 태의원 사람이 오긴 했지만 처방전도 써 주지 않고 가 버렸습니다.

그 후 처소로 보내 주는 음식도 달라졌습니다. 먹다 남은 찌꺼기나 반찬도 없는 찐빵 몇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것도 다 차갑게 식어 버린 것이었지요. 소인이 진작 황상께 찾아오고 싶었지만 마마께선 이런 일로 황상께 불편함을 드릴 수 없다며 참으시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소인이 보기에는 마마는 이미 겉잡을 수 없이 쇠약해지신 것 같습니다. 황상, 부디 한 번만 처소로 찾아와 주십시오…….”

묵용린이 냉소를 지었다.

“황후가 후궁을 그리 관리한단 말이지?”

옆에서 그 소란을 지켜보던 묵용청양이 소안자를 걷어차며 말했다.

“말조심 하거라. 황후를 모욕하는 것은 중죄다.”

“소인이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소안자는 발로 걷어차인 김에 더 불쌍한 모습을 자아냈다.

묵용린은 묵용청양에게 눈으로 주의를 주더니 이내 옷자락을 휘날리며 밖으로 향했다.

묵용청양도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무엇 하러 짐을 쫓아오는 것이냐.”

묵용린이 언짢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궁에 돌아가 있거라.”

“황형, 궁에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잘 조사해야죠. 환경문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이 황매가 책임지고 처리할게요.”

당찬 그녀의 말에 묵용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더는 상대하기도 싫었던 그는 곧장 어가에 올라탔다.

왕장량은 묵용청양을 위해 가마를 준비하려 했지만, 공주 전하는 한 손으로 손을 내젓고 다른 한 손은 허리춤에 맨 장검에 올려놓더니 성큼성큼 어가 옆을 따랐다. 그 모습은 마치 위풍당당하고 늠름한 여자 시위 같았다.

금화궁에 도착하니 장 귀인과 양 귀인이 일찌감치 복도에 무릎을 꿇고 황제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묵용린은 그들을 부축해 주는 대신 간단명료하게 일어나라는 말만 전했다.

그는 곧장 주전으로 향했다.

금화궁은 주전과 좌전, 우전으로 나뉘는데 유 귀인이 주전, 양 귀인이 좌전, 장 귀인이 우전을 사용했다.

사이가 서로 좋았을 땐 그들은 함께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자매처럼 지냈지만, 사이가 틀어진 이후엔 좌우전만 자매처럼 지냈다. 주전의 유 귀인은 자신이 우월하다고 여기며 두 사람을 하찮게 생각했다. 그러다 그녀가 병이 나자 양 귀인과 장 귀인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 병문안도 가지 않았다.

묵용린은 유 귀인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못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찌 멀쩡했던 미인이 이런 꼴이 된단 말인가? 초췌한 얼굴에 움푹 패인 두 눈, 화려했던 입술은 생기를 잃은 게 잿빛에 더 가까웠다.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어깨 근처에 어지럽게 헝클어져 있었다. 누가 봐도 병세가 심각해 보였다.

“황상…….”

유 귀인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더니 어떻게든 예를 갖추려고 발버둥 쳤다.

묵용린이 황급히 말렸다.

“몸이 좋지 않으니 누워 있으시오.”

유 귀인은 침상 머리에 기대 눈물을 흘렸다.

“황상, 신첩 더는 황상을 뵙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병이 났으면 고치면 될 것을… 별일 아니오.”

묵용린이 사희에게 분부했다.

“네가 직접 태의원에 가서 유 귀인의 진료를 봐 줄 태의를 데려오너라.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면 짐이 죄를 묻겠다 전하고.”

사희는 알겠다고 대꾸한 뒤 서둘러 태의를 부르러 갔다.

묵용린은 탁자에 놓인 쟁반을 바라보았다. 쟁반에는 찐빵 반쪽이 놓여 있었다. 만져보니 찐빵은 차가웠고 딱딱하게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유 귀인에게 물었다.

“계속 이런 것들만 먹었소?”

유 귀인은 대답 대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묵인이었다.

“주방에 가서 유 귀인에게 따뜻한 음식을 내어 오라고 전하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유 귀인은 몸을 굽혀 묵용린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드니 장공주 전하가 나타나 방 안을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탁자에 있던 찐빵 반쪽도 이쪽저쪽 유심히 살폈다. 어찌나 자세히 살피는지 유 귀인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공주 전하, 찐빵은 어찌 그리 보십니까?”

묵용청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찐빵이 제게 말을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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