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2화
그들이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영안은 살짝 의심이 생겼다. 요 며칠은 판등과 산응만 나타나고 묵용청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게 조금 이상했다. 묵용청양의 성격이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판등에게 물었더니 청양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객잔에서 쉬고 있다고 했다. 그는 산응에게도 물었지만, 대답은 똑같았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대답에, 그들이 미리 입을 맞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 묵용청양 그 웬수가 그에게 무언가 암시하고 있다는 게 틀림없었다. 하, 이 웬수 같은 계집애!
* * *
밤공기는 차디찬 물처럼 서늘했다. 밖에서 들리는 야경꾼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검은 야행복을 입은 판등과 산응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른 말도 없이 탁자 위에 켜진 콩알만한 촛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경二更(밤 아홉 시부터 열한 시까지)이 지났으니 한 시진만 더 기다리고 출발해야 했다. 판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삼경三更(밤 열한 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까지 기다리지 말고 반 시진 후에 출발하자.”
산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그렇게 잠시 앉아 있는데 별안간 누가 문을 두드렸다. 깜짝 놀란 판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나다.”
영안의 목소리였다. 안에 있던 두 사람은 마음을 놓고, 산응이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안 형,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영안이 두 사람을 빤히 훑으며 물었다.
“옷이 왜 그래? 어딜 가려고?”
판등이 말했다.
“요즘 너무 잠잠하니 산응이랑 좀 돌아다녀 보려고요. 일척홍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산응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이제 막 나가서 둘러보려던 참이에요.”
영안이 물었다.
“청양은?”
판등이 말했다.
“옆방에서 자고 있어요.”
영안이 말했다.
“불러와.”
판등은 산응과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은 뒤 대꾸했다.
“안 형, 곤히 자는 사람을 어찌 깨웁니까.”
“가서 불러오래도. 물어볼 게 있어.”
오늘 밤, 영안은 유난히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자꾸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 그는 몸을 뒤척이며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묵용청양은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이란 말인가? 그들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으니, 영안은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청양이 방에 없는 것이냐?”
판등은 그가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의심을 품은 이상, 솔직히 털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청양은 요즘 성 서쪽의 작은 집을 빌려서… 거기서 지내고 있어요.”
상황을 깨달은 영안은 안색을 굳혔다.
“아직도 단념하지 않았단 말이냐? 자신을 미끼 삼아 일척홍을 잡는다고?”
판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영안은 당장 그들을 벌하는 대신 매섭게 호통쳤다.
“어서 날 데려가거라.”
산응이 말했다.
“청양이 저희더러 늦은 밤중에나 오라고 하였습니다. 괜히 움직였다간 일척홍이 경계할지도 모르니까요.”
그 말에도 영안이 눈을 부릅뜨자 산응도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거리에는 행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따금 개구리 울음소리만 적막한 밤을 깨웠다. 희미한 달빛 아래로 세 사람의 그림자가 성 서쪽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성 서쪽의 골목은 매우 협소했고 낮은 집들이 여기저기 들어서 있었다. 무척 무질서하고 난잡해 보였지만 판응과 산응은 빠르게 묵용청양이 묵고 있는 집을 찾아냈다.
“저깁니다.”
판등이 조용히 일러 주었다.
영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집을 바라보았다. 밖으로 자그마한 창문이 나 있었고 방 안은 암흑처럼 어두웠다. 만약 여기서 놈을 기다리는 거라면 묵용청양은 분명 잠들지 않았을 것이다…….
천천히 집으로 다가가던 영안이 별안간 미간을 찌푸렸다. 공기 중에 희미한 향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전혀 낯설지 않은 향… 미향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서둘러 두 사람에게 손짓했고 몸을 날려 문을 걷어찼다.
방 안에서 곧장 움직임이 느껴졌다. 흐릿한 그림자가 빠르게 문으로 도망쳤지만 영안은 굳이 따라가지 않았다. 바깥엔 판등과 산응이 있으니 파리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는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 탁자 위에 놓인 촛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곤 빠르게 방 안을 훑어보았다.
침상엔 장막이 정돈되지 않은 채 내려가 있었다. 방금 그자는 침상에서 뛰어나와 도망친 듯했다.
영안은 쏜살같이 침상으로 다가가 장막을 걷어 올렸다.
묵용청양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 중의는 다 풀어 헤쳐졌고 고운 색의 두두肚兜(상체를 가리는 속옷의 하나)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영안의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봐도 묵용청양은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어두운 불빛 아래, 그녀는 유난히 연약해 보였다. 영안은 묵용청양의 이런 모습을 본 적 없었기에 이 상황이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그는 서둘러 그녀의 옷을 잘 여며 주었고 이불도 조심스레 덮어 주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심장이 뛰는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바깥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금세 멈추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심지를 당겨 불빛을 더 밝게 한 뒤, 품에서 환약을 한 알 꺼내 잔에 물을 따르고 묵용청양에게 먹여 주었다. 그리곤 자신도 침상 한쪽에 걸터앉았다. 일척홍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하늘이 다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문이 열리고 판등이 누군가를 밀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산응이 발길질하며 그자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안 형, 포박했어요.”
영안은 손을 휘둘러 침상 장막을 내린 뒤, 그자를 일으켜 세우곤 다짜고짜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주먹질 한 번에, 그자는 입가에 선홍빛 피를 흘리며 애원했다.
“살려 주십시오. 협객님, 살려 주십시오…….”
영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끊임없이 주먹을 날렸다. 판등과 산응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서둘러 영안을 말렸다.
“안 형, 이러다 죽습니다!”
영안은 거친 숨을 헐떡였다. 그의 매서운 눈빛은 꼭 그자를 잡아먹을 듯했다. 영안이 내뿜는 무서운 살기에 판등과 산응도 겁이 나 더는 그를 말리지 못했다.
영안이 주먹을 날릴 때마다 그자는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지만 점차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마치 축 늘어진 마대를 치는 것처럼 둔탁한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때, 침상에 누워 있던 묵용청양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누군가가 맞는 소리에 그녀는 장막을 걷고 뛰쳐나가 소리를 질렀다.
“영안, 그만해. 그러다 죽겠어. 판등, 산응, 어서 저자를 끌어내, 어서…….”
그녀는 서둘러 신발을 구겨 신고 영안을 붙잡았다.
영안은 포악한 짐승처럼 손을 뿌리쳤다. 어찌나 힘이 센지 묵용청양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판등이 놀라 소리치며 그녀를 일으켰다.
“대장, 괜찮아요?”
영안은 그제야 쓰러진 묵용청양을 보고 동작을 멈추었다. 산응이 그 틈에 맞고 있던 자를 끌어냈다.
“안 형, 어서 앉아서 물이라도 한잔 드세요.”
묵용청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영안, 대체 무슨 일…….”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판등이 보내는 눈짓을 보고 영안이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 눈치챘다. 그녀가 말투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영안, 화내지 마. 네가 내 계획에 반대할 게 뻔해서 그랬어. 그래도 일척홍을 잡았잖아?”
그녀는 허리를 숙여, 조용히 누워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기이한 자세로 누워 있는 게 이상하다 싶어 코끝에 손가락을 갖다 대 보니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헉하고 놀라며 소리쳤다.
“죽었어!”
판등이 다가와 살펴본 뒤 영안에게 말했다.
“안 형, 일척홍이 숨을 쉬지 않아요.”
영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일척홍이래?”
묵용청양이 말했다.
“일척홍이 아니면 왜 왔겠어?”
영안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황청양, 네가 우리 모두를 다 죽일 뻔했어.”
말을 마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산응은 통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옆에 있던 판등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지?”
판등이 고개를 저었다. 그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묵용청양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미향에 중독되었으니, 만에 하나 영안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 그녀는 일척홍의 손에 걸려들었을 터. 동월의 장공주가 강간이라도 당했다면 황제는 환경문의 모든 이들에게 장례를 치러 줄 것이다.
* * *
범인이 부문주에게 맞아 죽었다는 얘기에 환경문 문주 노도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영안을 임안성으로 불러들였다.
노도수는 사실 문관으로 칠순이 넘은 나이었지만, 근면 성실하고 덕망이 높아 황제가 특별히 환경문 문주에 앉힌 것이다. 아직은 젊은 영안이 미처 고려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까 봐 노도수에게 환경문을 관장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껏 늘 진중했던 영안이 사고를 칠 줄이야. 범인을 때려죽이다니… 현 조정 관리가 법도를 알면서도 이런 죄를 범한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영안은 노 대인이 떠드는 말을 가만히 들으며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도수는 늘 영안을 대견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손주처럼 여겨 왔다. 나이는 어려도 능력이 뛰어났기에 머지않아 그의 아버지인 영구보다 더 출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영안이 잘못을 벌여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조금 성이 났다.
“자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겠는가?”
영안은 시선을 들어 올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노도수는 수염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나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인정하지 않는다니… 본관을 화나 죽게 할 작정인가!”
영안은 고개를 숙이고 또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노도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본관은 자네를 어찌하지 못하겠네! 직접 황상께 가서 죄를 고하게.”
영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궁으로 향했다.
미리 이 소식을 접한 묵용린도 몹시 궁금해 하던 참이었다. 평소 침착하던 영안이 법도를 무시하고 범인을 때려죽일 수 있단 말인가?
영안이 남서방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황상, 신, 죄를 저질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