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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79)화 (1,079/1,192)

제1079화

판등은 우선 환경문 요패를 들고 현부를 찾아가서 그들의 도착을 보고했다.

현부 대인은 보살이라도 현신한 것처럼 그들을 환영했다. 그의 열정적인 환영은 끝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과 차로 그들을 대접했다.

네 건의 강간 살인 사건이 터졌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다들 관아의 조치에 불만을 토로하니 현부 대인은 고민이 깊어 밥도 넘기지 못했다. 돈 있는 가문은 호위 무사를 고용했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딸을 외지에 있는 친척 집으로 피신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봉채비를 낮춰 부리나케 딸을 시집보냈다.

사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네 구의 시체는 입관하지 못했고, 모두 의장義莊(매장하기 전에 관을 잠시 놓아두는 곳)에 놓여 있었다.

판등과 산응은 먼저 시신을 보러 가고, 묵용청양에게는 사건과 관련된 문서를 정리하는 일을 시켰다. 그들이 돌아오면 함께 사건의 경위를 분석할 생각이었다.

사실 판등과 산응은 아가씨인 청양이 시신을 무서워할까 봐 호의를 보인 것이었다. 어쨌든 죽은 사람을 보러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묵용청양은 단번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무서워할 게 뭐 있어? 지난번에 목을 매달아 죽은 부인을 봐도 무섭지 않았는데.”

판등과 산응은 지난번 양부에서 보여 준 묵용청양의 태도를 떠올리고는 그들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시신이 두렵지 않다고 하니 결국 모두 함께 가기로 했다.

의장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땅바닥에 시체가 일렬로 놓여 있었다. 흰 천을 들추자 붉은 천이 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묵용청양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게 일척홍의 붉은 천인가요?”

“네, 맞습니다.”

의장의 관리인이 대답했다.

“시신은 발견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놓아둔 것입니다. 현부 대인께서 환경문 대인들께 보여 드려야 한다고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묵용청양이 흰 천을 더 아래로 걷자 죽은 여인의 나체가 여실히 드러났다.

청백의 가녀린 몸, 그런데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그녀는 다시 붉은 천을 벗겨서 죽은 자의 얼굴을 드러냈다. 그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얼굴은 상당히 평온해 보였고 죽음을 앞둔 고통은 찾을 수 없었다. 시신 네 구의 표정은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판등은 눈살을 찌푸렸다. 강간 살인을 당했는데도 이렇게 표정이 평온하다니… 정말 이상했다. 고개를 돌리자 묵용청양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왜 그래요?”

묵용청양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범인이 너무 미워! 꼭 내 손으로 잡아서 토막 내 죽일 거야! 이 여인들의 원수를 갚아 주겠어.”

여기 누워 있는 아가씨들은 모두 그녀와 나이가 비슷했다. 아직은 부모의 무릎에서 사랑을 받을 천진난만한 나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맨몸으로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렇게 꽃 같은 생명을 무참히 짓밟다니… 그녀는 정말 그 흉악범이 증오스러웠다.

현부로 돌아오니 네 건의 사건에 관한 문서가 이미 책상머리에 놓여 있었다.

판등은 우선 청양에게 가서 쉬라고 했지만, 그녀는 단칼에 거절하고 그들과 함께 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산응이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다 큰 아가씨가 밤늦도록 우리와 함께 있어도 괜찮아요? 괜한 소문이 날까 겁나지 않으세요?”

묵용청양이 정색하며 말했다.

“난 아가씨가 아니라고 영안이 알려 주지 않았어?”

그들은 왜 영안이 그녀에게 쩔쩔매는지 얼추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웬수는 생떼를 쓰기 시작하면 도무지 답이 없었다. 그래, 그녀도 자신을 아가씨라 여기지 않으니 그들도 굳이 아우가 한 명 더 생기는 걸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세 사람은 문서를 나누어서 각자 살펴보았다.

산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 일척홍은 먼저 사평에서 몇 차례 범행을 한 후, 다시 통녕으로 가서 또 범행을 저지른 것 같아요. 시체에 붉은 천을 씌우는 것도 강호 떠돌이들의 수법이에요. 첫째, 자신의 표식을 남기고 둘째, 남을 현혹시킬 수 있으며 셋째, 관아를 도발하고 백성들을 불안에 떨게 하려는 거죠. 물을 흐리고, 관리들이 쩔쩔매고 당황한 사이에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 또 다른 범행을 저지르는 거예요.

일단 움직였다 하면 연쇄 범행을 저지르죠. 과거 전조 때도 이런 비슷한 사례가 있었어요. 그때는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 너무 분산되어서 범인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고 결국 미궁에 빠져 버렸지만요.”

판등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이제까지 일척홍이라 불리는 강간범은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그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범행을 저지르는 상습범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다만 제가 보기에 일척홍은 새로 나타난 강간범 같아요. 그는 강간을 하고 나서 여인들을 다 죽였어요. 이건 이제까지 봐 왔던 강간범들과 달라요.

매우 조심스러운 사람일 거예요. 여자를 죽이는 건 어쩌면 살인 멸구를 하기 위함일지도 몰라요. 죽은 사람 중에 그를 아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통녕 쪽은 안 형이 조사 중이니 우리는 사평에서부터 조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사건을 해결해 본 경험이 없는 묵용청양은 산응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판등의 말에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사건은 오리무중의 늪으로 빠져들었으나 그럴수록 꼭 해결하고 말겠다는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이튿날 아침, 판등과 산응은 묵용청양을 데리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처음 방문한 집은 첫 번째로 강간 살인을 당한 여인의 집으로, 그녀의 이름은 주혜周惠였다.

그녀의 가족은 대잡원에서 살고 있었으며 부친은 미장이로, 사건이 벌어진 날 그는 남의 집 마당 담을 쌓는 일을 하느라 늦은 밤에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녀의 모친은 남동생을 데리고 외삼촌댁에 갔기에 집에는 그녀 혼자였다.

대잡원에는 여러 가구가 함께 살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비명을 지르지 않았기에 아무도 그날의 범행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 나중에 주혜가 지내던 방 창문 밑에서 미약을 태운 흔적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범인이 범행을 저지르는 동안 그녀는 미향에 취해 비명을 지르지 못한 것 같았다.

미향을 쓴 증거를 잡자 산응은 자신의 추론이 옳다고 믿게 되었다. 강호의 고수들만 미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판등은 매우 세심했다. 그는 주혜의 부친이 마당 담을 쌓아 준 집을 조사했다. 사평현 성내에 있는 부유한 집이었는데, 아들이 얼마 전에 장가를 갔기 때문에 주혜의 부친에게 지붕을 수리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의 솜씨가 훌륭하다는 걸 알고 또 불러서 낡은 담장을 보수했다.

주혜의 모친과 남동생은 그날 밤 외삼촌댁에 있었다. 주혜의 외할머니가 며느리와 말다툼을 했는데 죽겠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주혜의 모친이 가서 그들을 화해시켜야 했다. 그런데 친정에서 하룻밤 묵고 집에 돌아와 보니 딸이 윗목에 죽어 있었다. 집안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었고, 이웃들이 그녀를 도와서 관아에 신고했다.

상황 분석을 마친 세 사람은 주혜 부모님의 행적에 별로 수상한 점이 없었기에 바로 다음 집으로 향했다.

두 번째 집에서 죽은 아가씨의 성씨도 주였다. 그녀는 주교아周巧兒라는 아가씨였고 두부 장사꾼의 딸이었다.

그날 밤 교아의 부친도 집에 없었는데, 그는 고향 사람에게 불려 가서 콩을 수확했다. 교아의 모친은 저녁에 방앗간에서 콩을 불리고 콩국을 만들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이 됐는데도 교아가 불도 피우지 않고 식사도 준비하지 않은 것을 보고 그녀는 그저 딸이 깊은 잠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으로 가 보니 딸은 죽은 듯 잠에 빠진 게 아니라 잠을 자듯 죽어 있었다.

묵용청양은 두 사건이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건이 벌어진 밤, 집주인은 모두 출타 중이었다. 만약 남은 두 집도 이런 상황이라면 무언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셋째 집은 양가였고, 죽은 여자의 이름은 양추영楊秋瑩이라고 했다. 그녀의 부친은 국수집 주인장으로, 집안 형편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그날 저녁 그녀의 양친은 모두 집에 있었고 오직 현부에서 근무하는 오빠만 집에 없었다.

양추영의 오빠는 양추민楊秋民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여동생이 일척홍의 손에 죽임을 당하자 잠도 자지 못한 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판등 일행이 왔을 때도 그는 울분과 슬픔으로 가득했고, 두 눈은 핏발이 선 채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판등에게 자신이 미향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범인이 그의 집에선 미향을 피우지 않고 다른 수단을 써 동생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양가에서만 쓰지 않았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판등과 산응은 양가를 다시 한번 답사했지만, 사건이 발생한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났기에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

가장 낙담하는 사람은 묵용청양이었다. 집주인이 모두 출타 중이라는 공통점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양가는 양친이 모두 집에 있음에도 딸이 강간 살인을 당하는 줄 모르고 있었다. 이건 그녀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네 번째 집은 성씨가 전이었고 죽은 사람은 전영용錢映容이라는 여자였다. 그녀가 강간 살인을 당하기 전에 이미 일척홍에 관한 소문이 파다했다. 전가는 부자였기 때문에 즉시 호위를 고용해 딸을 보호했다. 그런데 그들을 고용한 첫날밤에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전 노야는 호위 두 명을 흠씬 두들겨 패서 내쫓았다. 그리고 매일 현부로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현부 대인에게 그의 딸을 살려 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범행 현장을 모두 확인하자 묵용청양의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앞에 두 집은 집주인이 없는 틈을 타 몰래 침입하여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그런대로 전형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뒤에 두 집은 상황이 좀 이상했다.

양추영의 집에서는 미향을 태운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미향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양추영은 왜 나쁜 놈이 방에 침입했는데도 비명을 지르지 않은 걸까? 또 만약 미향을 사용했다면, 양추민은 왜 처음에 그걸 찾지 못한 걸까?

그리고 네 번째 집인 전가는 양친뿐만 아니라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 호위까지 있었다. 하지만 범인은 자유롭게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침음을 삼킨 판등이 입을 열었다.

“전가에서 고용한 호위들을 조사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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