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7화
영안이 입은 호청색 장포는 소맷부리에 대나무색으로 수를 놓았고, 옷자락에는 은은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옷차림은 무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묵향을 풍기는 문인 같았다.
묵용청양은 묵용성이 이런 위선적이고도 풍아한 멋을 좋아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녀가 추측하기로 저 옷은 십중팔구 녹하 고고가 직접 만들었을 것이다. 녹하 고고는 계속 성아에게 옷을 지어 주었고, 여유가 있을 때면 가난청과 영안에게도 옷을 지어 주곤 했다. 녹하 고고가 만든 장포는 모두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영안은 휘어진 나무 아래까지 와서 팔짱을 끼고 한가롭게 서 있었다.
자, 기다리는 사람이 왔으니 이제 멍하니 앉아 있지 않아도 된다. 영안 혼자 멍청하게 기다리라지!
그녀는 탁자에 앉아서 구련환을 가지고 놀았다. 놀다가 지치면 다과를 먹고 차를 마셨다.
다과를 몇 개 먹고 차를 반 주전자 정도 마신 그녀는 다시 일어나 창가 앞으로 갔다. 영안은 아직도 휘어진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가 왜 그녀를 올려다보며 웃고 있는 거지?
묵용청양은 얼른 옆으로 숨어서 창문을 닫았다. 창문 틈새로 슬쩍 내다보니… 어라? 그새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녀는 재빨리 창문을 열고 사방을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묵용청양은 두 눈을 비볐다.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질 수 있지? 영안이 하늘을 날 수 있다 한들 그렇게 빨리 사라질 수는 없을 텐데…….
얼른 뛰어 내려가서 그를 찾으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며 조소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봐, 누굴 그렇게 찾는 거야?”
너무 놀란 묵용청양은 고함을 지르며 돌아섰다. 그러자 낄낄거리고 있는 영안이 보였다.
영안은 혀를 내밀며 물었다.
“귀견수로 유명한 전하께서 왜 이렇게 간이 작아지셨나?”
묵용청양은 화가 나서 주먹을 휘둘렀다.
영안은 가볍게 그녀의 주먹을 감싸 쥐며 경멸이 섞인 비웃음을 지었다.
“몇 년 못 본 사이에 실력이 확 줄었는데?”
묵용청양은 성난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시치미를 뗐다.
“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영안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네가 불러서 왔잖아?”
“내가 언제…….”
영안은 자신은 뭐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피식 하고 웃으며 말했다.
“좋아.”
묵용청양은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언제부터 내가 한 줄 알았어?”
“처음부터.”
“서신을 받았을 때?”
영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신을 받자마자 알았지.”
묵용청양은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어디에 허점이 있었는데?”
“허점이 많아도 너무 많았지.”
영안은 손가락을 꼽으면서 그녀에게 친히 알려줬다.
“첫째, 서신을 전달한 아이는 환경문 근처에 사는 아이였어. 그 아이가 어떻게 안월을 알지? 둘째, 서신에 향을 너무 많이 뿌렸어. 안월은 그렇게 짙은 향은 쓰지도 않아. 셋째, 환경문은 은밀한 조직이기에 대문 앞에 현판도 다 걸지 않았지. 그런데 그 아이는 정확히 장소를 찾아와서 나를 영 부문주라고 불렀어. 만약 진짜 안월이었다면 내 신원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지 않았을 거다.”
묵용청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넌 안월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구나? 그녀가 네 정체를 외부에 알리지 않을 거라는 것도, 너무 진한 향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네? 그럼, 넌 내가 무슨 향을 쓰는지도 알아?”
영안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네가 향을 쓰기는 하니? 모르고 있었네.”
“나가 죽어!”
묵용청양은 영안의 어깨를 한 대 때리고 돌아섰다.
영안은 피식 웃으며 느릿느릿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묵용청양은 잠시 앞으로 걸어가다가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생겼다. 하지만 체면이 서지 않아 망설여졌다.
그녀의 발걸음이 느려지는 걸 보고 영안이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 아이가 환경문 근처에 사는 건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싶지?”
“어떻게 알았어?”
“한 번 만난 적 있어. 그 아이한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지.”
“한 번 만나면 다 기억해?”
“우리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다 이런 버릇이 있어. 한 번 본 사람은 머릿속에 담아 두게 돼.”
묵용청양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얼마나 큰 머리를 가져야 그 많은 사람들을 다 기억할 수 있지?”
그녀의 어리벙벙한 모습에 영안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네 머리로는 안 돼.”
“왜?”
“너무 꽉 찼어.”
“너무 꽉 찼다고?”
영안은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던지듯 말했다.
“전부 돌뿐이잖아.”
묵용청양은 펄쩍 뛰면서 그를 쫓아갔고, 영안은 미꾸라지처럼 군중을 파고들며 멀리 달아났다. 묵용청양은 그런 그를 놓치지 않고 바짝 추격했다…….
연지 가게 위층에 서 있던 안월은 길거리에서 서로 쫓고 쫓기는 두 사람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시녀 소엽小葉이 다가와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놀라 말했다.
“어머! 저거 영 공자 아니에요? 어쩜 누군가에게 쫓기는 중이네요? 게다가 그게 어떤 아가씨예요! 영 공자가 어찌 아가씨를 무서워하는 거죠?”
안월은 시선을 거두며 조용히 말했다.
“남의 일에 관여하지 마.”
“영 공자가 왜 남이에요?”
소엽은 그녀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가씨,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아가씨는 너무 흉악해 보여요. 영 공자가 저런 여인을 좋아할 리가 없어요.”
화가 난 안월은 안색을 굳혔다.
“물건은 다 챙겼느냐? 다 챙겼으면 이만 돌아가자.”
묵용청양은 결국 영안을 붙잡았다. 그건 그녀의 다리가 빨라서가 아니라 영안이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 큰 사내가 여인의 추격을 당하니… 그게 무슨 추태인가? 다들 그가 무슨 치졸한 짓이라도 한 줄 알 것 아닌가?
묵용청양이 그를 때리려고 하자 영안이 그녀의 팔을 비틀었다.
“대로변에서 싸우다 지면 완전 창피할 텐데?”
“알았어! 안 때릴 테니까 어서 놔. 그리고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
영안은 그녀의 팔을 놔 주었다.
“물어봐.”
묵용청양은 구겨진 소매를 가볍게 털었다.
“안월이 보낸 서신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도 이곳에 나온 이유가 뭐야? 뭐 하러 휘어진 나무 아래에서 멍청하게 서 있었어?”
영안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나무 밑에서 바보를 구경하고 있었지.”
“잉?”
“넌 세상에서 제일 화나는 게 뭔지 알아?”
“그게 뭔데?”
“자신의 계략이 통한 줄 알고 신이 나 있다가 반대로 자신이 놀아났다는 걸 알게 되는 일.”
그의 설명이 좀 길어서 이해하기까지 약간 걸렸지만 그녀는 곧 그의 괘씸한 의도를 알아차렸다.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허세를 부렸다.
“자, 어서 덤벼! 영안, 오늘 네가 죽고 내가 살든, 어디 한번 끝까지 해 보자!”
영안은 그녀를 비웃었다.
“넌 이미 입으로도 이득을 보려 하는구나? 내가 못 알아들을 줄 알고?”
그가 직설적으로 말했다.
“넌 나한테 한주먹감이야. 네가 죽고 내가 산다고 말해야지.”
묵용청양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이놈이 키가 크더니 사람 화나게 하는 데 도가 튼 것 같았다. 이런 걸 대체 누구한테 배웠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안 되겠어. 오늘은 한번 붙어 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 울분을 해소하지 못할 거야!”
“그래. 좋아.”
영안이 말했다.
“단, 여기서는 싸우지 말자. 너한테 암위가 붙었는지 누가 알아? 만약 황상께서 아시게 된다면 내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어?”
“좋아! 그럼 네가 장소를 골라!”
묵용청양은 턱을 치켜들고 기세 좋게 말했다.
“내가 널 따라갈게.”
“환경문으로 돌아가자.”
영안이 말했다.
“거기가 조용하니까. 네 암위도 거긴 들어갈 수 없어.”
묵용청양은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암위 따위는 데리고 오지 않았어.”
“정말 없어?”
“정말 없어.”
그녀가 말했다.
“십구는 도성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내가 따돌려서 네 부친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지. 지금은 십삼이 호위를 맡고 있어. 내가 황형한테 그랬어. 암위를 더 붙였다간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내 무술 실력이면 임안 성내뿐만 아니라 동월 전국을 돌아다녀도 충분하잖아.”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영안이 말했다.
“넌 무술 실력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지?”
“그게 아니면?”
영안은 그녀의 이마를 쿡 찔렀다.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머리가 없으면 그걸 바보라고 하는 거다.”
“이 자식이! 네가 감히 나를 찔러?”
묵용청양은 까치발을 들고 그를 찌르려고 기를 썼지만, 영안이 가만히 찔리고 있겠는가? 그는 쏜살같이 달아났다.
두 사람은 서로 쫓고 쫓기며 환경문으로 돌아왔다.
대문으로 들어서자 묵용청양은 판등, 산응 그리고 소제갈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대화하고 있는 걸 봤다.
그들은 두 사람을 보고 즉시 영안에게 예를 취했다.
“부문주, 오셨어요?”
영안이 가볍게 응수했다.
“그래, 수고 많았다. 일은 다 끝났지?”
“네, 다 처리했어요.”
가운데 있던 사람은 묵용청양을 보고 놀라 물었다.
“이 아가씨는 뵌 적이 있는데, 저번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안이 입을 가린 채 헛기침을 하자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아, 제가 잘못 기억했군요. 이 아가씨가 아니라 다른 아가씨였어요.”
“…….”
묵용청양은 이상했다. 나와 닮은 다른 아가씨가 있다고? 판등과 산응, 소제갈 또한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영안은 계속 시치미를 떼며 헛기침을 했다.
환경문으로 돌아온 그는 마인馬印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로, 다들 그를 소마小馬라고 불렀다. 외지에서 일하고 있는 그는 일을 마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임안성 경계에서 우연히 묵용청양과 마주친 적이 있었고, 그녀에 대한 첫인상이 매우 강렬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영안과 함께 있는 걸 보면 일이 잘 해결된 줄 알았는데, 제가 입만 열면 영안이 헛기침을 하니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영안은 묵용청양이 이것저것 물어볼까 봐 얼른 마인의 어깨를 움켜쥐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묵용청양이 영안을 붙잡았다.
“제대로 겨루자고 하더니, 도망갈 생각이야?”
영안은 웃음이 삐져나왔다.
“도망이라니, 지금은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무슨 일인데?”
영안이 소마를 툭 쳤다.
“처리해야 할 사건이 있어요.”
묵용청양이 물었다.
“무슨 사건인데?”
소마가 대답했다.
“강간범 사건이에요.”
영안이 말했다.
“들었지? 먼저 일을 해야 하니까 승부는 나중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