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6화
유 귀인은 한참 생각하다가 물었다.
“만약 황후 마마가 나에게 가혹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금령은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가혹했는지, 가혹하지 않았는지는 황상께서 누구의 말을 믿느냐에 달렸습니다.”
유 귀인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벽요궁을 떠날 때, 유 귀인은 조금 전까지 가득했던 울분을 털어내고 득의양양하게 돌아갔다.
금령은 유 귀인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마마,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황상께서는 유 귀인에게 전혀 마음이 없으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황후를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겁니다. 황상의 마음속에는 오직 마마뿐이에요.”
허 귀비는 생각했다. 마음속엔 오직 그녀뿐이라면서 왜 찾아오시지 않은 걸까? 그러나 그녀의 자존심에 이런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금령이 되물었다.
“마마, 황상의 마음에 유 귀인이 없다면 우리가 굳이 이럴 필요가…….”
허 귀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본궁이 그녀를 저대로 내버려 둬야 한단 말이냐?”
금령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중에는 결국 화근이 될 겁니다.”
허 귀비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금령, 본궁이 변한 것 같으냐? 음흉하고 간사한 소인배가 되었다고 생각해?”
금령은 급히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닙니다! 마마, 마마께서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세요. 궁궐에 들어오실 때 좌상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궁중은 물이 깊어 가늠할 수 없고, 군왕을 곁에서 모시는 건 맹수와 동행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후궁은 사람이 죽어도 피가 보이지 않는 곳이라 하셨죠. 우리가 상대에게 맞서지 않으면 오히려 당할 겁니다. 마마께서는 단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허 귀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 본궁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러는 거다. 황후가 언제 나를 공격할지 알 수 없으니까. 다만 유 귀인을 이용해서 그녀를 끌어내리는 건 좀 어려울 것 같구나.”
“황후의 지위는 본래 마마의 자리였잖아요. 그걸 사가에서 뺏어간 거잖아요!”
금령은 분개하며 말했다.
“비록 황후를 폐위시킬 수는 없겠지만, 기세는 꺾어 놓을 수 있을 겁니다. 황후가 직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황상께서 황후의 봉인을 회수하실 거예요. 그때가 되면 그녀는 무늬만 황후일 뿐이죠. 마마께서 하루빨리 용종을 품으시기만 하면 황후의 지위에 등극할 날이 멀지 않을 거예요.”
“황상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는데, 무슨 용종을 운운해?”
허 귀비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만 일어나거라.”
금령은 얼른 일어나서 그녀를 위로했다.
“마마,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황상께서 바쁘신 일만 끝나면 곧 마마를 찾아올 것입니다. 유 귀인이 늘 황상을 곁에서 모시고 있지만, 시침은 하지 않았습니다. 소인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황제를 모시고 바둑을 두거나 산책을 함께 했을 뿐 다른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허 귀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입궁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묵용린을 만나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비록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지만, 황제는 사석에서 그녀와 만나 줬고 그건 그녀를 남다른 눈으로 보는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줄곧 그 사실에 기뻐했지만 지금은 유 귀인이 그 영예를 누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유 귀인은 예전의 그녀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소년 황제는 준수함으로는 겨눌 대상이 없으며 더없이 존귀한 신분에, 군왕의 기세를 지녔다. 천하의 어떤 여인이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왕좌에 앉은 그 사람은 과연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의 마음속에는 과연 사랑이 있을까?
그녀는 그가 원했던 황후였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자그마한 애정이라도 있을까?
그녀는 식어 버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차는 씁쓸한 향을 남기며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가슴 깊이 그 씁쓸함이 가득 차는 것만 같았다.
* * *
이틀이 지나도 황제가 움직이지 않자 금천아는 오체투지를 할 정도로 탄복했다.
“마마, 정말 대단하세요. 황상께서 과연 아무런 트집도 잡지 않으시네요. 어떻게 이런 일까지 예상하신 거예요?”
사봉봉은 조용히 웃기만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귀비가 두고 간 구련환을 청양 전하께 전해 드려.”
금천아는 알겠다고 대꾸한 뒤, 물건을 들고 직접 공주를 찾아갔다.
요대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녀는 묵용청양을 발견했다. 금천아는 동월의 장공주가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장공주는 원래부터 예법을 잘 지키지 않았는데, 강남에 몇 년 다녀오더니 더욱 자유분방해졌고 걸음걸이도 마치 바람이 부는 것처럼 날쌨다. 금지옥엽은커녕 대갓집 규수의 자태에도 못 미쳤지만, 금천아 자신도 규칙 따윈 지키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오히려 친근함을 느꼈다.
묵용청양도 저 멀리에서 금천아가 보이자 쏜살같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궁중 사람들은 늘 헷갈리는데 오직 한 사람… 넌 절대로 헷갈리지 않아. 왜 그런지 알고 있지?”
금천아가 반문했다.
“왜 그렇습니까, 전하?”
묵용청양은 두 손으로 손짓까지 하며 말했다.
“궁에 너처럼 큰 사람이 또 어디 있어?”
“…….”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 가니?”
“저희 마마께서 전하께 이것을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금천아는 구련환을 건네주었다.
묵용청용은 구련환을 받아서 흔들었다. 쨍그랑거리는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싱긋 웃어 보였다.
“너희 마마께서는 정말 나를 많이 생각해 주시는구나.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이건 황상께서 귀비에게 하사하신 건데, 귀비가 가지고 놀다가 우리 마마께 선물했어요. 우리 마마는 원래 가지고 계신 게 있어서 전하께 드리라고 하셨어요.”
묵용청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무도 가지려고 하지 않아서 나한테 보냈다고?”
금천아가 다시 설명하려 하자 묵용청양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너희 마마를 말하는 게 아니라 황형을 말하는 거야. 흥! 귀비는 생각하면서 자기 여동생은 생각도 안 하지? 내가 찾아가서 좀 따져야겠어!”
놀란 금천아는 부랴부랴 그녀를 붙잡았다.
“아이고 우리 공주 전하, 그건 안 될 말이에요. 이제 겨우 황상과 마마의 사이가 좋아졌는데… 더는 소란을 피우시면 안 됩니다. 황상은 또 그걸 빌미로 마마를 탓할 거예요.”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황형은 사봉봉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니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그녀는 금천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나 대신 너희 마마께 안부 인사나 전해 줘.”
말을 마친 그녀는 구련환을 들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금천아는 공주 전하가 궁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렇게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니. 만약 우리 마마께도 저런 특권이 있었다면 집으로 돌아가 부인을 뵐 수 있었을 것이다.
노야께서는 집에 안 계시고, 아가씨는 궁중에서 나갈 수 없다. 부인은 막무가내인 성격이고, 도련님도 만만치 않았다. 밖에 있는 주인을 생각하면 절로 걱정이 들었다.
묵용청양은 구련환을 들고 거리를 걸으면서 고리를 하나씩 풀었다. 그때, 청이각清怡閣이라는 세 글자가 써진 현판이 걸린 작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더니 씩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산응은 입구에 웬 어린아이가 기웃거리는 걸 보고 눈을 부릅뜨고 매섭게 고함을 질렀다.
“어이! 꼬맹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낡은 옷을 입은 아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한 채 말했다.
“저는, 저는 영 부문주를 찾아왔어요.”
산응은 아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영 부문주는 왜 찾는데?”
아이는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안월 누님이 영 부문주께 드리는 서신이에요.”
안월의 이름을 들은 판등은 산응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씩 웃으며 서신을 받았다.
“알았다. 이건 우리가 부문주께 전해 드리마.”
아이는 빤히 그들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심, 심부름 값도 안 줘요?”
산응은 손을 휘저으며 호통 쳤다.
“심부름 값은 심부름을 시킨 사람이 주는 거지! 왜 우리한테 달라고 하느냐?”
아이는 몰래 그들을 흘겨보고 돌아서서 걸어갔다. 모퉁이까지 걸어간 아이는 아무도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골목에 있는 느릅나무 아래로 뛰어갔다. 아이는 숨을 헐떡이며 나무 위를 향해 소리쳤다.
“됐어요. 서신을 전달했어요.”
나무에서 뛰어내린 묵용청양은 은 조각을 아이에게 던져 주며 물었다.
“영 부문주에게 직접 건네준 거니?”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씀하신 것처럼 생긴 사람은 없었어요. 한 사람은 좀 까맣고 키가 컸고, 다른 한 명은 작고 통통하게 생겼어요. 그들이 영 부문주에게 전달하겠다고 했어요.”
묵용청양은 아이가 말하는 사람이 산응과 판등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들에게 전했으면 됐어.”
어린아이는 은 조각을 소매로 닦으며 중얼거렸다.
“누님은 통이 크네요. 그 두 사람은 심부름 값을 한 푼도 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묵용청양은 아이를 노려봤다.
“내가 심부름 값을 준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그들에게 돈을 달려고 했어? 이 자식! 양쪽에서 이득을 취하려 하다니…….”
그녀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아이는 즉시 도망치려 했다.
아이를 잡은 묵용청양은 은 조각을 하나 더 주며 말했다.
“가서 천을 끊어다가 새 옷을 만들어 입어. 이렇게 입고도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드니?”
아이를 보낸 그녀는 골목을 가로질러 전문 대로로 간 뒤, 휘어진 나무 맞은편에 있는 차관으로 들어갔다. 이내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만약 정말 영안이 마음을 준 사람이 안월이라면 그가 오지 않을 리 없었다.
점원이 찻물과 다과를 가져왔지만, 그녀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엎드린 채 아래층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요 며칠간 늘 마음이 좀 답답했다. 워낙 낙천적인 탓에 여태껏 별다른 걱정 없이 살아왔건만 이 우울함은 무엇인가? 뭐라도 좀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아래층은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노점상들도 기다란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장사꾼들의 호객 소리가 뒤섞여 임안성의 번화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군중 속에서 영안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얼른 창문 뒤로 숨어 그를 몰래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