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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75)화 (1,075/1,192)

제1075화

경화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마마, 방금 양 귀인과 장 귀인이 문가에서 훔쳐보고 있었습니다.”

사봉봉은 담담하게 말했다.

“차라리 잘되었어. 이제는 본궁이 만만한 황후가 아니라는 걸 알겠지.”

경옥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마마, 유 귀인이 정말 황상에게 달려가서 일러바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봉봉이 말했다.

“본궁을 탓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본궁에게 대드는데……. 본궁은 체면도 없단 말이냐?”

금천아가 말했다.

“소인은 황상께서 유 귀인의 말만 믿고 마마를 처벌할까 봐 걱정됩니다.”

사봉봉은 자신 있게 말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마마, 어찌 그리 장담하십니까?”

사봉봉은 말없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묵용린은 지금 그녀를 피하기도 바쁜데 어찌 감히 그녀를 건드릴 수 있겠는가?

* * *

잔뜩 화가 난 유 귀인은 무작정 승덕전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는 황제가 너무 두려웠지만, 그래도 그녀를 위해 뭐라도 해 줄 거라 믿었다.

그녀는 승덕전에 자주 왔다. 평소 곁방에서 자주 머물렀기에 승덕전의 아랫사람들도 그녀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유 귀인은 남서방에 들어가기 전에 살짝 망설였다. 그녀가 먼저 황후를 찾아간 건 황제보다 황후와 말이 더 잘 통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후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제 스스로 악수를 둔 격이었다. 지금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형국이었다. 반드시 앞으로 달려 나가야 했다. 그래도 날마다 황제의 곁에 있었으니… 조금은 정이 들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런 영광은 유일하게 그녀만 누린 것이었다.

책을 읽고 있던 묵용린은 누군가 들어오는 걸 알았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황상.”

억울함을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쪽 뺨이 잔뜩 부은 유 귀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묵용린은 여인을 특별히 아끼는 사내가 아니었기에 그런 모습을 보고도 안쓰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쩌다 그리 된 것이오?”

아직 어린 아가씨인 유 귀인은 그가 묻는 말에 갑자기 서러움이 물밀듯 밀려와 눈물 콧물을 쏟으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인내심이 부족한 묵용린은 호통을 쳤다.

“말을 똑바로 해 보시오.”

그의 호통에 깜짝 놀란 유 귀인은 온몸을 떨며 흐느낌을 전부 삼켰다. 잠시 흐느끼던 그녀는 마침내 정상적으로 말을 할 수 있었다.

“신첩의 얼굴은 황후궁에 있는 금천아라는 궁녀가 때려서 이렇게 된 겁니다.”

유 귀인은 무릎을 꿇었다.

“신첩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묵용린은 아랫사람들을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금천아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봉봉의 곁을 지키는 소처럼 건장한 궁녀였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소 같은 자는 지위 낮은 귀인은 물론이거니와 감히 짐까지 때리려 들 위인인 것을.

“그녀가 왜 귀인을 때렸소?”

“그건…….”

유 귀인이 입술을 깨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황후께서…….”

“황후가 때리라고 했소?”

유 귀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건 긍정과 마찬가지였다.

묵용린은 일어나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황후가 비록 여러 가지 단점이 있지만, 일 처리는 공정하게 하는 편이오. 황후가 때리라고 했다면 분명 귀인이 잘못한 게 있을 거요.”

“신첩은 신첩의 숙부를 위해 황후 마마의 선처를 바란 것뿐, 잘못한 건 없사옵니다. 황상, 신첩의 억울함을 살펴 주시옵소서.”

묵용린은 어리둥절했다.

“귀인의 숙부가 누구요?”

“내무부 관리, 유병승이라 하옵니다.”

유병승이라는 이름은 묵용린도 방금 들었지만, 그가 유 귀인의 숙부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습관적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설마 사봉봉이 유 귀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유병승에게 함정을 팠나? 유병승은 내무부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번 일에 곽도도 동참했단 말인가? 허 귀비의 외삼촌인 곽도와 황후가 연합해서 유 귀인을 대적한 것은 아닐까? 물론 허 귀비는 질투가 났을지도 모르지만, 사봉봉은 도대체 왜 그런 거지? 설마 그녀도 시기심에……?

그는 깊게 생각을 하며 복도에 섰다. 어찌나 생각에 깊이 빠졌는지 방 안에 있는 유 귀인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꿇어앉은 유 귀인은 몸을 약간 기울여 복도에 있는 황제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는 감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얌전히 꿇어앉아 있었다. 다만 오랫동안 꿇어앉아 있었더니 무릎이 너무 아팠다. 그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살그머니 움직이자 왕장량이 보다 못해 묵용린에게 귀띔을 해 주었다.

“황상, 유 귀인께서 아직도 방 안에서 무릎을 꿇고 계십니다.”

묵용린은 짧게 소리를 낸 뒤 말했다.

“그녀를 처소로 돌려보내라.”

왕장량은 서재로 들어와 유 귀인에게 말했다.

“마마, 어서 일어나십시오. 황상께서 마마께 돌아가 쉬라고 하셨습니다.”

유 귀인이 물었다.

“대총관, 황상께서 어떤 명을 내리셨나요?”

왕장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장량은 호인이었기에 옆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에게 권고했다.

“유 관리에 대한 일에는 마마께서 나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잘못하면 괜한 미움을 살 수 있습니다.”

유 귀인은 너무 서러워서 펑펑 울고 싶었다. 그녀가 따귀를 맞고 왔는데 황제는 위로 한 마디 없었다. 오히려 옆에 있는 관리가 딱해 보였는지 그녀를 타일러 주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천천히 걸어 나가서 황제의 뒷모습을 보며 예를 취했다.

“황상, 신첩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묵용린은 그녀를 힐끔 돌아보더니 사희에게 명했다.

“창고에서 연고를 가져와 유 귀인의 얼굴에 바르라고 내주거라.”

유 귀인이 성은에 감사한다는 인사를 하자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얼굴이 너무 부어서 보기 흉측하니 당분간 승덕전에 올 필요 없소. 며칠 처소에서 쉬도록 하시오.”

낙뢰라도 맞은 듯 유 귀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건 그녀에게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황제의 곁에 있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것마저 없다면 양 귀인이나 장 귀인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묵용린은 이미 걸음을 돌려 사라져 있었다.

유 귀인은 승덕전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걸어갔다. 막 가산假山을 돌아 나오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사람은 바로 허 귀비였다. 그녀는 좀처럼 처소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한번 나왔다 하면 뭇사람들의 추앙을 받곤 했다.

유 귀인은 서둘러 예를 행하고 지나가려는데 허 귀비가 그녀를 살펴보더니 불러 세웠다.

“유 귀인, 왜 눈이 빨개졌나요? 무슨 억울한 일이라도 당하셨어요?”

유 귀인은 마음이 너무 슬프고 괴로웠다. 너무 억울해서 화가 났지만,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허 귀비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물었다.

“당신이 오늘 봉명궁에서 수모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본궁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황상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유 귀인의 눈가가 더더욱 촉촉해졌다. 평소 황제의 곁을 지켰기에 특별한 공로는 없어도 고생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황상께서는……. 생각할수록 유 귀인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억울한 게 있으면 너무 가슴에 담아 두지 말아요.”

허 귀비는 그녀에게 팔짱을 끼고 말했다.

“내 처소로 가요. 이야기를 나누면 더 나을 거예요.”

마침내 유 귀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도해 보이던 허 귀비가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주니 고마운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벽요궁에 들어와 자리에 앉은 허 귀비는 좌우를 물리고 금령만 남겨서 시중을 들게 했다. 허 귀비는 찻잔 뚜껑으로 찻잎을 걷으며 말했다.

“올해 우전에 새로 나온 찻잎이에요. 한번 맛보세요. 황상께서 보내셨는데 아까워서 마시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늘 아우님이 오셨으니 같이 맛보고 싶네요.”

유 귀인은 그녀가 황상을 언급하자 또다시 안색이 어두워졌다. 슬픔에 빠진 유 귀인은 자신의 표정을 허 귀비가 눈여겨보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허 귀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그깟 찻잎 하나쯤이 뭐라고요. 아우님이 황상을 곁에서 모시는 것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어요. 다른 건 몰라도 매일 용안을 뵐 수 있는 영광은 아우님이 유일하잖아요. 그런데…….”

허 귀비는 돌연 말머리를 돌렸다.

“아우님이 봉명궁에서 봉변을 당했는데, 황상께서는 어째서 아무런 명도 내리지 않으시는 거죠? 그래도 황상께서 곁에 둔 사람인데 왜 보호해 주지 않으시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유 귀인은 입술을 깨물며 작은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태상황의 일편단심은 천하에 소문이 자자한데… 어째서 그런 분은 대대로 한 사람밖에 나타나지 않는지…….”

허 귀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옛말에 제왕이 가장 무정하다더니, 우리 황상께서도…….”

허 귀비는 자신의 상황을 떠올리며 슬픔에 빠졌다.

일순간 커다란 궁전 안은 고요해졌다.

허 귀비와 유 귀인 모두 오랫동안 자신만의 상념에 빠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금령은 총명한 사람이었기에 적절한 순간에 입을 열었다.

“유 귀인, 황상께서 도와주지 않으신다고 하지만, 황후가 귀인 마마를 이렇게 대할 수는 없지요. 이런 울분을 그냥 삼키실 겁니까?”

유 귀인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당연히 울분을 그냥 삼킬 수 없었다. 이대로 넘어가면 그녀의 숙부가 끌려간 건 차치하고라도 그녀가 봉명궁에서 맞았던 따귀도 헛된 것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황후인데 그녀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애처롭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에게 무슨 묘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대접을 못 받는다고 하더라도 황후는 황후인걸.”

이를 들은 허 귀비가 말했다.

“황후께서 이번엔 분명 과했어요. 아우님의 뺨을 좀 보세요. 아직도 얼굴이 붓고 있어요. 본궁에게 좋은 연고가 있으니 가는 길에 가져가서 바르세요.”

유 귀인은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속에선 분노가 차올랐다.

“방법만 있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금령이 말했다.

“소인에게 방법이 있긴 한데… 귀인께서 감히 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서 말해 보게.”

“황상께서 황후를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건 금궁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다만 황후가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황상께서도 아무런 꼬투리를 잡지 못하셨지요. 그러니 황후를 상대하려고 해도 명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귀인께서 황후와 원한 관계임을 금궁에 사는 모든 이가 알게 되었어요. 만약 귀인께서 이로 인해 심신이 고달파 병으로 쓰러지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귀인께서 식음을 전폐하시어 나날이 마르고 쇠약해지면 황상께 연민의 정을 이끌어 낼 수도 있고 황후의 악독함도 낱낱이 드러날 것입니다.

황상께서는 죄를 지은 사람을 혐오하십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번 기회에 반드시 황후를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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