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3화
곽도는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출궁했다.
허 귀비는 문 앞까지 그를 배웅하고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걸어가던 그녀는 문득 자신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옛날에 그녀는 세상사에 무관심한 대갓집 규수였다. 보통 집안일은 어른들이 그녀와 상의 없이 처리했고, 그녀는 순순히 그걸 이행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오늘 외삼촌과 그녀는 군신의 예를 갖추고 있었다. 애매모호한 말을 몇 마디 나눴지만 그녀는 곧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음모를 꾸미는 데 이력이 난 사람처럼 대꾸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속으로 한탄했다. 사람이 이렇게 빨리 변하는구나. 이런 지위에 올라 이런 상황에 놓이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녀의 어깨에는 허씨 가문과 곽씨 가문 전체가 매달려 있었다. 그러니 그녀는 싸워야 했고, 뺏어야 했다. 원래 자신의 소유였던 것을 도로 가져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굳건한 눈빛으로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옥여의玉如意를 바라보았다. 그녀야말로 부끄럽지 않은 동월의 진정한 황후다!
* * *
유병승은 자기 형처럼 학식이나 경륜이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권세에 빌붙어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밝았다. 형은 국자감 같은 청수아문에 있었지만, 그는 다른 길을 선택해 내무부에 관직을 얻었다. 내무부가 돈을 많이 만질 수 있는 곳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특히 질녀인 유재춘이 후궁에 들어가 귀인이 된 후, 그의 목은 더 힘이 들어갔고 그의 앞에서 아첨하는 사람들 역시 더욱더 많아졌다.
유 귀인이 총애를 받는다는 소식은 당연히 내무부에도 퍼졌다.
심지어 내무부를 총괄하는 곽 대인까지 그에게 예의를 차렸다. 최근에는 그더러 함께 술을 마시자며 자리를 마련하더니, 급기야 호형호제까지 제안했다. 그도 바보가 아니기에 이번 기회에 곽 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로 했다. 비록 곽도의 생질녀는 귀비이고 그의 질녀는 귀인에 불과하지만, 현재 유 귀인은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지 않은가?
술이 몇 잔 들어가니 유병승은 곽 대인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것에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싱글벙글하고 있었지만, 곽 대인은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지난번에 황상께서 만들라고 한 구련환은 실패했네. 황후가 가지고 있는 것을 참고해 다시 만들어야 하네. 하지만, 자네도 알고 있듯이 황후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지.”
황제와 황후에 관한 소문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유병승은 얼른 물었다.
“왜 황상께서는 황후에게 직접 달라고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곽도는 너도 알고 있지 않냐는 눈빛을 보내며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유병승이 다시 물었다.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그렇게 안 좋습니까? 그런 말도 하지 못할 만큼?”
“그건 우리 신하 된 자들이 논할 바가 아니네. 내가 지금 걱정하는 건 구련환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참고 자료가 없으니 임무를 성공하지 못할까 봐 그게 걱정이네.”
“그 일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유병승은 가슴팍을 치며 장담했다.
“사흘 안에 그 구련환을 손에 넣겠습니다.”
곽도는 얼른 술을 따라 주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유 아우께 너무 감사할 것이네.”
“대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건 신하의 영광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가문의 아가씨도 궁중에서 상전 노릇을 하니, 대인과는 관계가 각별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맞네! 맞아. 유 귀인께서 황은을 듬뿍 받고 계시니, 앞으로 유 아우가 승승장구하게 되거든 나를 잊지 마시게.”
유병승은 술잔을 기울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사이입니까?”
비록 유병승이 공명심을 쫓는 소인배라지만, 그렇다고 허풍을 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닭은 닭대로, 개는 개대로 자신만의 살길이 있기 마련이다. 그는 내무부에서 몇 년 동안 인맥을 쌓아 왔다.
이틀 후, 그는 매우 복잡해 보이는 구련환을 건네주었다.
조판처에서 살펴보니 그건 구련환이 아니라 구구련환이었다. 그들은 얼른 그것을 본떠 도안을 그렸다.
* * *
황후의 구구련환이 내무부로 들어간 시점, 허 귀비가 봉명궁을 방문했다.
사봉봉은 그때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허 귀비가 왔다는 말에 의외이기는 했지만, 그대로 돌려보낼 순 없었다. 하물며 귀비는 황제가 마음을 준 사람이니 체면을 세워 주어야 했다.
허 귀비의 걸음걸이는 마치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같았다. 그녀는 그림 같은 눈썹을 살짝 들어 보이며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사봉봉은 의자에 앉아서 그런 그녀의 자태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미인에게 황제가 마음을 줬겠지. 그런데 왜 요즘에는 유 귀인과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걸까? 새것만 좋아하시나?’
이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허 귀비에게 연민이 생겼다.
허 귀비는 다가와서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예를 취했다.
“신첩, 황후 마마께 문안드립니다.”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 없어요.”
사봉봉은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걸 싫어했다.
“귀비께서 이곳까지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겠네요.”
“신첩은 이것을 마마께 드리러 왔습니다.”
허 귀비가 금령에게 눈짓하자 뒤에 있던 시녀가 공손히 다가왔다.
시녀가 건네는 물건을 힐끔 바라본 금천아가 말했다.
“이건 구련환이잖아요?”
“네, 구련환이 맞습니다.”
허 귀비는 이어서 말했다.
“며칠 전에 황상께서 신첩이 무료할까 봐 기분 전환이나 하라고 하사하셨는데, 신첩이 어찌 이런 걸 가지고 놀 줄 알겠습니까? 그런데 황후 마마께서 좋아하신다는 말을 듣고 신첩이 직접 가져왔습니다.”
그녀의 말에 금천아는 좀 기분이 나빴다. 허 귀비가 지금 황후 마마에게 생색을 내러 왔단 말인가? 황후 마마께서 가지고 있는 건 이것보다 훨씬 더 좋거늘! 그녀는 사봉봉을 힐끔 쳐다봤다. 그러나 황후는 단정하게 앉아 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그녀가 나서서 말했다.
“어렵게 귀비 마마께서 마음을 보여 주셨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마마께서 가지고 있는 건 이것보다 훨씬 좋은 겁니다. 그러니 이건 다른 사람에게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허 귀비는 그녀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 그녀도 금천아에 대해선 조금 알고 있었다. 완력이 강하지만, 그다지 총명하지 못한 탓에 황제를 화나게 할 뻔했다고 들었다. 만약 사봉봉이 용서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미련하긴 하지만, 황후 곁에 두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했다.
“이건 황상께서 하사하신 물건으로, 유일무이한 것이에요. 이것보다 좋은 거라니 본궁은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군요.”
금천아는 또다시 사봉봉을 쳐다봤다.
사봉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금천아에게 말했다.
“그런 걸 따져서 무엇하느냐? 당연히 황상께서 하사하신 게 더 좋지.”
금천아는 비록 인정할 수 없었지만, 어떤 때는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허 귀비가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꼬투리를 잡았다.
“아닙니다, 마마. 정말 그런지 황후 마마께서 가지고 계신 그 물건을 보여 주셔서 신첩의 견문을 넓혀 주시옵소서.”
사봉봉이 말했다.
“귀비께서는 마음에 담지 말아 주세요. 저 아이는 키만 자랐지, 아직 아이같이 천방지축입니다.”
허 귀비가 웃으며 대꾸했다.
“신첩, 다른 뜻은 없사옵니다. 그냥 견문을 넓히고 싶을 뿐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니 사봉봉은 더 이상 거절하기가 어려워 경화를 불렀다.
“가서 본궁의 구구련환을 가져오너라.”
경화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경화는 당황한 얼굴로 뛰어나왔다.
“마마, 구구련환이 없어졌어요.”
사봉봉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그게 없어질 수 있단 말이야? 상자 안에 없느냐?”
“소인이 분명 상자에 넣어 두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얼마 전에 마마께서 꺼내서 놀기도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방금 상자를 열어 보니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잘못 기억한 건 아닌지 다시 잘 찾아보아라.”
“소인이 궤짝을 샅샅이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화는 울상을 지었다.
“게다가 구구련환은 소인이 직접 정리했습니다. 절대로 잘못 기억할 리 없습니다.”
금천아는 짙은 눈썹을 치켜뜨고 다른 사람들에게 명했다.
“어떻게 멀쩡하던 물건이 없어져? 다들 어서 찾아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얼른 사방으로 흩어져서 찾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허 귀비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궁에 도둑이 들었는지도 모르지요. 누가 훔쳐 갔나 봅니다.”
사봉봉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 도둑놈도 참 이상하네요. 봉명궁에는 그보다 값이 나가는 물건이 잔뜩 있는데, 굳이 돈도 안 되는 구구련환을 훔쳐 갔을까요?”
허 귀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신첩도 아무렇게나 짐작한 바를 말했을 뿐입니다. 마마께서 먼저 물건을 찾는 게 중요하니 신첩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사봉봉은 일어나 배웅하며 말했다.
“이게 다 오늘 귀비가 와 준 덕분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본궁은 봉명궁에 도둑이 들어온 것도 몰랐을 것이에요.”
허 귀비는 한쪽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뿐입니다.”
허 귀비가 떠나자 사봉봉은 경옥에게 명했다.
“다들 찾지 말라고 전하거라. 그건 이미 봉명궁에 없을 것이다.”
금천아가 놀라 소리쳤다.
“그럼 진짜 도둑맞았단 말입니까? 누가 그런 겁니까?”
“누가 그랬는지 본궁은 모르지만, 귀비는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금천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귀비가 사람을 시켜서 훔친 겁니까?”
“귀비가 시켰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귀비는 본궁에게 도둑을 잡게 하려는 것이다.”
“왜요?”
사봉봉은 눈을 깜빡이며 금천아를 쳐다봤다.
“왜일 것 같으냐?”
사봉봉은 허 귀비가 가져온 구련환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것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흉내도 제대로 내지 못한 가짜였다.
그녀는 심부름하는 소태감인 소순자를 불러서 몇 마디 귓속말을 했다.
소순자는 허리를 굽혀 대답하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금천아가 물었다.
“마마, 소순자한테 뭘 시키셨어요?”
사봉봉은 고개를 숙이고 구련환을 풀면서 대답했다.
“뭘 좀 알아보라고 시켰어.”
금천아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고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 보며 가까이 다가갔다.
“마마, 이게 우리 것보다 재미있어요?”
“우리 것보다 쉬워.”
사봉봉이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니 고리 하나가 풀렸다. 그녀는 그걸 금천아에게 던졌다.
“네가 한번 해 봐. 내가 방금 한 것처럼 하면 돼.”
금천아는 분명 그녀가 푸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막상 자기 차례가 되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써야 하는 일에는 모두 서툴렀다. 한참 동안 눈살을 찌푸리고 작은 고리를 이리저리 돌려 봤지만, 결국 하나도 풀지 못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때, 소순자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