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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72)화 (1,072/1,192)

제1072화

묵용린이 붓을 내려놓자마자 사희가 들어와 아뢨다.

“황상, 내무부의 곽 대인께서 오셨습니다.”

“음, 들어오라고 해라.”

사희가 응수하고 명을 전했다.

잠시 후, 곽도가 몸을 구부린 채 들어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 황상께 문후 여쭙니다.”

묵용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일어나게.”

벌떡 일어난 곽도는 손에 든 물건을 황제에게 바쳤다.

“황상의 뜻을 받들어 구련환을 완성했습니다.”

왕장량이 그것을 받아 묵용린에게 전달했다.

곽도가 만들어서 온 구련환은 사봉봉이 가지고 놀던 것을 본떠 만든 것이었다. 그때 그녀가 가지고 놀던 것을 그 또한 해 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으나, 차마 체면 때문에 사봉봉에게 달라고 하지 못해서 조판처造辦處에 명하여 하나 만들게 했다.

하지만 완성된 물건을 보니 무언가 잘못 만들어진 것 같았다.

곽도는 살며시 황제의 안색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상, 뭐가 마땅치 않사옵니까?”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지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구련환을 가난청에게 주며 말했다.

“한번 풀어 보거라.”

가난청은 잠시 구련환을 보며 고민하다 금세 손가락을 움직였다. 잠시 후, 쨍그랑 소리와 함께 구련환의 모든 고리가 풀렸다.

곽도는 입이 떡 벌어진 채 아연실색했다.

“역시 동월에서 제일 총명한 분이십니다. 물건을 완성하고 여러 공인들이 도전했지만, 아무도 풀지 못했는데……. 가 대인께서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풀어 버리시는군요.”

가난청이 싱긋 웃었다.

“어린 시절에 황상과 많이 가지고 놀아서 익숙할 뿐입니다.”

가난청이 구련환을 푼 과정을 지켜본 묵용린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짐이 원했던 물건이 아니네. 다시 만들어 오게.”

갑작스러운 그 말에 곽도는 어리둥절했다.

“황상께서 원하시는 구체적인 모양이 있으신 겁니까?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조금 어려울 텐데…….”

묵용린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후궁에 있네.”

“황상, 그럼 소신이 황후 마마께 그걸 잠시 빌려도 되겠습니까?”

묵용린은 순간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은 자네가 무슨 방법을 쓰든지 상관하지 않겠네. 조판처에서는 짐에게 그것과 똑같은 것만 만들어 오면 되네.”

황제의 안색이 좋지 않자 곽도는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얼른 예를 취하더니 자리를 떠났다.

가난청은 묵용린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황상, 황후 마마의 구련환을 가지고 싶으시다면 그저 말 한마디면 될 것을요. 설마 황후 마마께서 안 주시겠습니까? 소신이 알기로, 황후 마마께서는 이런 일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묵용린은 콧방귀를 뀌었다.

“하늘 아래 짐이 가질 수 없는 게 있단 말이냐? 짐이 왜 달라고 부탁까지 해야 한단 말이냐?”

가난청은 그의 성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선 책상으로 돌아와 일을 계속했다.

묵용린은 이미 분리된 구련환을 하나씩 다시 결합해서 흔들더니 가난청에게 던졌다.

“이건 소타에게 가지고 놀라고 하거라.”

가난청이 씩 웃으며 말했다.

“소타는 청양 전하를 따라다니며 왈가닥으로 커서 창이나 몽둥이를 좋아하지, 이런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소신이 보기엔 차라리 황후 마마께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마께선 이런 놀이를 좋아하시니까요.”

묵용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이미 있대도.”

“황상께서 하사하시는 것인데 당연히 다르죠.”

묵용린은 잠시 침음을 삼키더니 사희에게 구련환을 주며 말했다.

“벽요궁으로 가서 귀비에게 주거라. 짐이 그녀가 너무 심심할까 걱정되어 보내니 기분 전환할 때 쓰라고 전하여라.”

사희는 구련환을 들고 벽요궁으로 향했다. 그는 황제의 심부름꾼답게 신속한 걸음에 익숙했다.

잠시 걷다 보니 앞에 곽 대인이 보여 그는 큰 소리로 불렀다.

“곽 대인.”

곽도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발견하더니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

“사희 공공,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십니까?”

사희가 대답했다.

“황상께서 귀비 마마께 하사하시는 물건이 있어서 소인이 가져다드리는 중입니다.”

곽도가 웃으며 대답했다.

“공교롭게도 저 역시 귀비 마마께 가는 길입니다. 제가 대신 가져다드릴까요? 그러면 공공께서 수고를 덜 수 있지 않습니까?”

사희가 그를 못 미더워하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허 귀비의 외삼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희는 그에게 구련환을 넘겨주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다.

“황상의 명을 받드는 일에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지요.”

그는 허리를 깊게 숙이며 곽도가 먼저 걸을 수 있게 뒤로 물러났다. 사희는 비록 태감이었지만 황제의 측근이라 그를 홀대할 순 없었다.

곽도는 그의 양보를 사양하고 그와 나란히 걸었다.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품속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몰래 사희의 손에 쥐여 줬다.

“며칠 전에 얻은 것입니다. 공공께서 이것 모으는 취미가 있다고 하시기에 특별히 가지고 왔습니다. 아까는 황상 앞이라 드릴 기회가 없었는데, 지금이 적기인 듯합니다.”

사희는 볼 것도 없이 그 물건이 비연호鼻烟壺(코담배를 넣는 작은 병)라는 걸 알았다. 자그마한 것이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며 적당한 온기가 느껴지는 게, 촉감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최상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얼른 사양했다.

“소인이 어찌 대인의 물건을 사사로이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건…….”

곽도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공공, 다른 사람이 봅니다. 제발 사양치 말아 주십시오. 이건 작은 성의 표시일 뿐입니다. 귀비 마마께서 궁에 계시니 공공께서 잘 좀 보살펴 주십시오. 저뿐만 아니라 좌상 대인께서도 그 고마움을 잊지 않으실 겁니다.”

사희는 당연히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비연호를 꼭 쥐며 방긋 웃었다.

“대인, 안심하세요. 귀비 마마께서는 황상께서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라 억울함을 당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벽요궁도 황상께서 친히 하사하신 것입니다. 들어가서 한번 보시면 황상께서 얼마나 귀비 마마를 총애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불경한 말씀을 한 마디 올리자면…….”

그는 곽도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느 정도냐면, 거기 있는 것들 모두 예법에 맞지 않을 만큼 황후 마마의 봉명궁에 있는 것보다 좋은 것입니다.”

곽도는 내무부 대신이기에 사희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궁중에서 내무부를 거치지 않은 물건은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벽요궁을 단장할 때도 가장 최상품을 가려서 으리으리한 궁전을 완성했다.

하지만 벽요궁에 하사하는 물건들과 달리 황제의 발걸음은 뜸했다. 하다못해 귀비를 불러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하지도 않았다. 도무지 황제의 의중을 알 수 없어서 허 귀비의 친정 식구들은 모두 조마조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허씨 일문과 그들 곽씨 가문은 허 귀비에게 모든 걸 걸었다. 그녀가 언젠가 황후가 되어 태자를 낳기만 한다면, 두 가문 모두 무한한 영광을 얻고 백 년 동안 권세를 누리며 빛나는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웃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황상께서 정사를 돌보시느라 워낙 바쁘시니 주변을 둘러볼 겨를이 없으신 걸로 압니다. 그러니 공공께서 황상께 귀비 마마에 대한 덕담 몇 마디 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건 소인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사희가 웃으며 팔을 살짝 들자 손 안에 있던 비연호가 자연스럽게 그의 소매통 안으로 떨어졌다.

벽요궁에 들어간 사희는 허 귀비에게 구련환을 건네며 황제가 한 말을 빠짐없이 전하고, 아첨까지 몇 마디 더 한 뒤 돌아갔다.

황제의 사람이 하사품을 전달한 건 허 귀비에게 있어 기쁜 일이지만, 그게 금을 입힌 구련환이라니……. 그녀는 곽도에게 물었다.

“외삼촌, 황상께서 이것을 왜 본궁에게 보냈다고 생각하세요? 이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곽도가 말했다.

“사희 공공께서 방금 말씀하셨잖아요. 황상께서 마마가 너무 적적하실까 봐 걱정이 되어서 특별히 기분 전환할 것을 보낸 겁니다.”

허 귀비는 어린 시절에도 이걸 가지고 놀아 본 적이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녀는 고리를 하나하나 보고 몇 번 움직여 보더니 곧바로 내려놓았다. 특별히 사람을 보내서 하사한 물건이 겨우 장난감이라니… 어쩐지 황제는 그녀에게 좀 소홀해진 것 같았다.

곽도는 그녀의 기운이 조금 빠진 듯 보이자 웃으며 말했다.

“마마, 이런 것을 우습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건 황상께서 친히 소신에게 명하여 조판처에서 며칠에 걸쳐서 만든 것입니다. 비록 장난감이지만,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허 귀비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는 외삼촌을 흘겨보며 따졌다.

“황상이 어떤 사람인지는 외삼촌이 더 잘 아실 텐데요? 본궁에게 주기 위해 조판처에 이것을 만들라고 명하셨다고요?”

곽도는 더 이상 속일 수 없어서 이실직고했다.

“…황상께서 당신을 위해 만들라고 명하셨는데, 난이도가 너무 낮아서 소신에게 다시 만들어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도 이건 유일무이한 물건으로 황상께서 마마에게만 하사하신 겁니다. 황상께서 마마를 특별하게 대하신다는 건 분명 사실입니다.”

허 귀비는 그의 말을 들으니 차라리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가 물었다.

“황상께서 왜 갑자기 이걸 가지고 놀고 싶어 하셨을까요?”

곽도는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황상께서 황후를 싫어하신다는 게 정말 사실인가 봅니다. 황상께서는 아마도 황후에게 이런 물건이 있다는 걸 알았나 봅니다. 그런데 황후에게 달라고 하는 대신, 차라리 조판처에 명하여 하나 만드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이에 소신이 황후에게 구련환을 빌려 와 똑같이 만들겠다고 하자 황상께서는 기분이 상하신 듯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방법을 쓰든 똑같은 걸 만들어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허 귀비는 호갑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외삼촌은 이제 어쩌실 건가요?”

“소신이 황상의 뜻을 헤아려 보면, 이번 일은 황후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물건은 손에 넣어야겠고…….”

곽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소신의 수하 중, 능력 있는 자가 있으니 그에게 이 일을 맡길 생각입니다.”

허 귀비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게 누구예요?”

“유병승劉柄承입니다.”

“유병승이 누구죠?”

“국자감 감승監丞 유병언의 동생입니다.”

허 귀비는 이내 그가 어떻게 할지 알아차리고 말없이 웃었다.

“외삼촌 밑에 있는 유능한 사람이니, 분명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

곽도는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마마, 안심하십시오. 궁중에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좌상 대인도 알고 계십니다. 마마께서는 진심으로 황상을 섬기기만 하시면 됩니다. 다른 일은 좌상 대인과 소신이 모두 해결할 겁니다.”

허 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안심입니다. 외삼촌과 아버지도 조심하세요.”

곽도가 장담했다.

“마마, 아직도 좌상 대인의 능력을 모르십니까? 단지 사장풍 부부와 태상황, 태후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기에 단시간 안에는 황후의 근간을 건드릴 수 없지만 곧 때가 올 것입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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