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1화
묵용린은 한참 걸어가다가 천천히 멈추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사봉봉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그를 경악하게 했다. 이곳은 자신의 영역인데 한낱 여인네를 피해 도망간다니! 이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어지는 감정은 분노였다. 그녀가 뭔데! 그가 왜 그녀를 피해 다녀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줄곧 궁중에서 그녀를 마주쳤다. 처음에는 우연의 일치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 보니 모두 그녀가 의도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를 관망하며 그의 한계치가 어디까지인지 떠보고 있었다.
싫은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총명하다는 건 인정해 주어야 했다. 그녀는 마치 그의 몸에 밧줄을 칭칭 감은 것처럼 느슨하게 잡아당기며 그를 화가 나게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그가 답답함을 풀기 위해 바람 쐬러 나갈 때마다 사봉봉이 나타났다. 게다가 그녀는 항상 그가 예상하지 못할 때 나타나서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그 간사한 상인이 온종일 그를 따라다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왕장량에게 물었다.
“황후가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장량이 대답했다.
“후궁과 내무를 관리하고 일부 명절 축제도 황후 마마께서 주관합니다.”
“봉명궁에 말을 전해서 황후에게 내무를 정돈하게 하라. 짐은 단기간에 새로운 변화를 보길 원한다.”
왕장량은 응수하고, 친히 봉명궁에 가서 황명을 전했다.
사봉봉은 황명을 듣고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왕 총관, 황상께서 본궁에게 내무를 정비하라 하시는 게… 어떤 측면의 정비를 말하는 것인가?”
왕장량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태후 때부터 궁중의 사무는 모두 내무부의 소관이었습니다. 비록 황상께서 엄격하게 통치하시지만, 궁 안의 모든 일을 한두 마디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때문에, 일을 잘하기만 하면 어떤 일들은 예법에 맞지 않아도 황상께서 적당히 눈감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마께서 황후의 지위에 오르셨으니, 마마께서 예법에 따라 황궁의 규율을 바로 세우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황궁의 규율이 바로 서야 아랫사람들이 순종하고 따를 것입니다.”
사봉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네.”
사무를 처리하고 내부를 정돈하는 건 그녀가 제일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렇게 큰 사가 상점의 잡다한 일들도 전부 그녀가 나서서 처리했었다. 또한 잔꾀를 부리거나 무리하게 생떼를 쓰는 사람들을 일말의 관용 없이 처벌하던 것도 그녀였다.
사봉봉은 일을 하고 있을 때면 마음이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일하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사람을 시켜 내무부의 장부를 가져오게 한 뒤 그것을 자세히 살폈다.
내무부가 장부를 옮겨 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한두 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부는 금세 작은 산을 이루듯 쌓였다.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사봉봉의 시선이 수많은 장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묵용린이 그녀에게 이런 일을 맡긴 건 더 이상 그의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가 이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간은 작전상 후퇴할 생각이었다. 요 며칠 그가 항상 유 귀인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냉랭한 황제와 순종적인 유 귀인의 사이가 그리 다정해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궁녀도 곁에 두지 않은 그가 유 귀인을 곁에 두는 것만 봐도 장족의 발전 같았다.
그의 곁에 총비寵妃가 함께 있으니, 사봉봉이 아무리 낯가죽이 두껍다고 해도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건 불편했다.
반면 총비가 된 유 귀인은 모든 게 아리송했다. 그녀는 매일 승덕전에 있는 곁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황상이 밖을 걸을 때만 그의 곁을 지켜야 했다. 황상은 원래 과묵한 사람이라 항상 말이 없었고, 걸을 때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가끔 그녀를 불러 바둑을 두고 저녁이 되면 다시 처소로 돌아가게 했다.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낮의 황제와 그날 밤의 황제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밤의 황제는 상냥하고 다정했다. 하지만, 낮의 황제는 감히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차가웠다. 한번은 그녀가 조금 가까이 다가가려 하니 그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뒤로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늘 황제를 곁에서 모실 수 있다는 건 독보적인 영광이었다. 황후는 말할 것도 없고, 귀비조차도 그녀보다 못한 상황이었다. 비록 그녀의 지위는 낮지만, 시일이 지나면 비의 지위에 올라서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특히, 양 귀인이나 장 귀인의 부러워하는 눈초리를 볼 때면 그녀는 점점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껴졌다. 집안 배경이 비슷한 세 사람은 좋은 자매처럼 지냈지만, 황상의 곁을 지키게 되니 자신은 그녀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사봉봉은 꽤 오랫동안 묵용린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묵용린은 안심했지만 너무 마음이 놓인 나머지 조금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 감정은 좀 애매모호해서 뭐라 설명할 수는 없었다. 마치 세력이 엇비슷한 두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맞서 싸우려는데, 갑자기 적수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상주서를 보던 가난청은 고개를 들 때마다 묵용린의 멍한 얼굴을 봐야 했다. 가난청은 한쪽 입꼬리를 삐죽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황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가 깜짝 놀라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어필御筆이 책상에서 굴러떨어지며 방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이들이 황후가 궁중의 대소사를 관장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황제에게 수모를 당하던 황후가 갑자기 실권을 쥐게 된 것이다. 황제가 그렇게 좋아했다는 허 귀비는 딱 한 번 승은을 입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 귀인이 새롭게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각 궁주들은 현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황후 마마께서는 분주히 여러 곳을 오가는데, 소처럼 건장한 궁녀가 늘 그 곁을 지키고 있다. 허 귀비는 궁중 심처에서 바깥출입을 삼가는데, 간혹 모습을 드러내도 월한궁月寒宮에 사는 상아嫦娥(달에 사는 선녀)처럼 차가운 얼굴이다. 숙비는 번개처럼 나타났다 구름처럼 사라진다.
한때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세 귀인의 사이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양 귀인과 장 귀인은 여전히 자주 동행하며 궁중의 경치를 두루 둘러보았다. 유 귀인은 황제와 동반하지 않을 때는 고독해 보이지만, 그녀의 오만한 태도는 이미 또 다른 허 귀비나 다름없었다.
오만해진 유 귀인을 보며 양 귀인과 장 귀인은 뒤에서 그녀 흉을 보곤 했다. 양 귀인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리 자기가 황상의 눈에 들었어도 우리랑 똑같은 귀인이잖아요?”
장 귀인도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이에요. 황상께서 정말 총애하신다면 왜 시침을 명하지 않겠어요? 그래 봤자 양 형님과 마찬가지로 딱 한 번뿐이었잖아요! 웃겨 정말!”
시침 이야기에 얼굴이 붉어진 양 귀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 귀인은 그녀가 수줍어하는 줄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
“황상께서는 저를 이미 잊어버린 것 같아요.”
양 귀인도 따라서 한숨을 내쉬었다.
“승은을 입는 일이라면 전 이미 마음을 비웠어요. 우리는 지금 금빛 현판과 다름없어요. 이 현판이라도 있어야 친정에서 체면도 세우고,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잖아요. 그것만 해도 어디예요. 사실 부친과 형제들이 등용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유 귀인도 종일 황상의 곁을 지키지만, 그녀의 부친이나 오라버니가 발탁되지는 않았잖아요.”
장 귀인도 투덜거렸다.
“말을 꺼내니까 하는 말인데, 우리가 입궁한 것도 사실 좀 어리둥절해요. 신분이 높지 않은 우리는 후궁을 선발에도 참가 자격이 없었잖아요. 왜 우리만 미리 입궁해서 귀인이 되었을까요?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용모로 따지면 우리가 꽤 뛰어난 편이지만, 그건 허 귀비도 빠지지 않잖아요. 게다가 허 귀비는 황상께서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두고 어찌 우리를 또 입궁시킬 수 있죠?”
“우리가 아니라도 황상께선 분명 다른 사람을 들였을 거예요. 황상은 태상황과 전혀 달라요. 태상황께선 태후를 위해 후궁을 비웠지만, 황상께서는 허 귀비를 황후 다음으로 높은 귀비에 봉하고도 우리가 입궁한 뒤로 한 번을 찾지 않으셨어요.”
“화본話本에서 제왕은 가장 무정한 사람이니 절대 사랑하지 말라고 하더니만. 입궁은 운명이지만, 그래도 마음만 잘 지켜내면 삶이 고달프지는 않을 거예요.”
“전 지금 황상이 태상황을 본받으시길 소망해요. 차라리 우리를 출궁시키면 얼마나 좋아요.”
“전 괜찮지만, 유 귀인은 시침까지 했는데 어찌 출궁할 수 있겠어요?”
“아니에요. 저도 시침 안 했…….”
순간 그날 일이 튀어나왔다. 다행히 주위에 다른 아랫사람 없이 장 귀인 혼자만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장 귀인은 놀라서 뻐끔거렸다.
“형님, 그날 승은을 입은 게 아니에요? 말도 안 돼. 어떻게…….”
더 이상 속일 수 없어서 양 귀인은 내친김에 솔직하게 말했다.
“그날 밤, 황상께서 저더러 연주를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한 곡을 다 끝내기도 전에 잠이 드셨어요. 나중에 대총관이 저에게 그냥 돌아가라고 했고요.”
“그걸 왜 경사방에 기록했어요? 하사품도 받았잖아요?”
“사희 공공께서 그랬어요. 황상께서 저의 체면을 생각해서 시침한 것으로 기록하라 명하셨다고요.”
“그렇다면 황상께서는 참 자상한 분이시네요.”
장 귀인은 여기까지 말하곤 눈동자를 빙글 굴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혹시… 유 귀인도 시침하지 않고 황상과 바둑만 두는 것 아닐까요?”
양 귀인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설마요. 황상께서 그녀를 부른 게 한두 번이 아닌데요.”
“하지만, 밤에 부르신 건 딱 한 번뿐이었죠. 나머지는 다 낮에 부르신 거잖아요. 설마 황상께서 대낮에 불러서 방사를 벌이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유 귀인이 목을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보면 금방이라도 용종을 품을 것 같았는데, 만약 시침도 하지 못했다면…….”
장 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거야말로 다시없을 우스갯소리네요.”
양 귀인도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러게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