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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70)화 (1,070/1,192)

제1070화

사봉봉이 승덕전에서 나오자 금천아가 서둘러 마중을 나왔다. 그녀의 손이 다친 걸 본 금천아는 안 그래도 소처럼 커다란 눈을 더 휘둥그레 떴다.

“마마, 손이 왜 이렇게 되신 겁니까? 설마 황상께서…….”

안으로 돌진하려는 금천아를 사봉봉이 얼른 붙잡았다.

“돌아가서 얘기하자.”

“안 됩니다. 얼마나 되었다고 또 마마를 다치게 하시다니요! 소인이 황상께 가서 시시비비를 좀 따져야…….”

사봉봉이 얼른 비명을 질렀다.

“손이 너무 아파. 얼른 돌아가서 약을 더 발라야겠어.”

금천아는 그제야 더는 고집 부리지 못하고 사봉봉과 함께 봉명궁으로 얼른 돌아왔다. 그리곤 곧장 경화와 경옥을 불렀다.

“마마께서 손에 화상을 입으셨다! 어서 남원에서 보내온 옥고玉膏를 가져오너라!”

“아니, 필요 없어.”

사봉봉이 말했다.

“연고는 이미 발랐어.”

금천아가 완강히 고집을 부렸다.

“승덕전에 있는 연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만 못해요. 사가 상점이 황상皇商이라는 걸 잊으셨어요? 궁에 있는 건 다 우리 상점에서 사 간 거예요.”

금천아는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손등에 발린 연고를 닦아내고 다시 옥고를 바른 후 가볍게 불어 주었다.

“좀 어떠세요?”

옥고를 바르니 상처 부위가 차갑고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사봉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좋아졌어.”

사봉봉은 면사 금패를 꺼내서 금천아에게 던졌다.

“너에게 줄게.”

금천아는 손으로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투덜거렸다.

“순금이에요? 무게감이 좀 다른데요?”

“그게 순금이길 바라? 꿈도 크네.”

사봉봉이 덧붙였다.

“그래도 순금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거야.”

금천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그렇게 귀한 물건이에요?”

사봉봉은 금패에 써진 글자를 가리켰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임안성에 오고 나서야 글자를 배우기 시작한 금천아는 아직 아는 글자가 많지 않았지만, 금패에 쓰인 글자는 알고 있었다.

“면할 면 자잖아요.”

“이건 면사 금패라는 거야.”

사봉봉이 설명했다.

“네 성미가 갈수록 어머니를 닮아가니 언젠가 분명 황상을 화나게 할 거야. 황상께서 널 죽이시는 건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처럼 쉬우니 이것만 있으면 그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어.”

금천아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눈시울을 붉히며 무릎을 꿇었다.

“모두 소인의 불찰입니다. 비천한 소인 때문에 마마께서 손을 다치셨는데 소인이 어찌 이런 금패를 받겠습니까? 그냥 마마께서 가지고 계세요.”

사봉봉은 그녀를 째려보며 투덜거렸다.

“얼른 일어나. 손이 아파서 널 일으켜 주진 못하니까.”

금천아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말없이 일어섰다.

“안심해. 그리고 이건 우선 네가 가져. 나는 조만간 한 개 더 달라고 부탁할 거야.”

금천아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정말 황상께서 하나 더 주실까요?”

사봉봉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이제 묵용린의 약점을 알게 되었으니 얻지 못할 게 없었다. 그녀의 손이 다 나으면 승덕전에 한 번 더 다녀오면 된다.

사실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으리라. 어쨌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도 솔직히 속으로는 좀 부끄러웠다. 다 크고 나선 처음으로 낯선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그리고 벼락이라도 맞은 듯 날뛰는 심장 때문에 조금 두렵기도 했다.

* * *

사희의 말을 들은 묵용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면사 금패를 그 궁녀에게 줬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사희가 아뢰었다.

“금천아가 마마께는 충성심이 강하지만, 워낙 충동적인 성격이라 언젠가 황상의 기분을 상하게 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마마께서는 금천아가 또 사고를 칠까 봐 두려워서 면사 금패로 그녀를 보호하려는 것 같습니다.”

왕장량은 옆에서 한탄을 쏟아냈다.

“황후 마마께서 그런 점은 우리 태후 마마와 비슷하시군요. 노비들의 목숨도 중히 여기시다니.”

사희가 한마디 덧붙였다.

“맞습니다. 황후 마마께서는 우리 태후 마마처럼 마음씨가 착하십니다.”

묵용린은 언짢은 듯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감히 장사꾼 여인네와 모후를 비교하다니!”

게다가 감히 그를 협박해서 얻어낸 면사 금패를 한낱 궁녀에게 쥐어 주다니! 어찌 자신에게도 필요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걸까? 그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 사봉봉인데?

그녀가 자신을 위협했던 순간을 떠올리니 묵용린은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위풍당당한 황제가 한 여인에게 협박을 당해 벽에 바싹 붙어 있었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아무도 그걸 보지 못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그는 정말 살인멸구를 명했을 것이다.

* * *

사봉봉도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협박을 했으니 묵용린 또한 가만히 있진 않겠지.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자연히 그녀는 마음을 놓았다.

그녀는 여전히 묵용린이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손이 다 낫자마자 금천아에게 달콤한 흘탑탕을 만들게 한 후 곧장 승덕전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선 묵용린은 그녀를 발견하고는 이내 경계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긴 뭐 하러 왔소?”

“신첩이 달콤한 흘탑탕을 가져왔습니다. 서북에서 맛볼 수 있는 특이한 먹거리니, 황상께서도 한번 드셔 보시지요.”

“짐은 먹지 않겠소. 도로 가져가시오.”

사봉봉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식탁 위에 찬합을 올려 두고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찬합 안에 있는 작은 그릇을 꺼내며 그녀가 말했다.

“황상, 뜨거울 때 얼른 드십시오.”

화가 난 묵용린은 고함을 질렀다.

“짐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것이오? 짐은 먹지 않겠다고 했소! 얼른 나가시오.”

그가 성질을 부렸지만, 사봉봉은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작은 수저와 그릇을 들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묵용린이 주위를 살펴보니 아랫사람들은 전부 다 사라지고 사봉봉과 그만 남아 있었다. 그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더니 고함을 질렀다.

“여봐라! 어서 황후를 끌고 나가라!”

그러나 밖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사봉봉은 스스럼없이 웃으며 말했다.

“황상, 신첩이 호의로 달콤한 탕을 가져왔는데 어찌 적을 대하듯 하십니까?”

묵용린은 그녀를 힘껏 밀어내려다가 뜨거운 음식이 담겨 있는 그릇을 들고 있는 걸 보고 겨우 화를 참았다.

“또 화상을 입고 싶지 않으려면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시오.”

“황상께서 신첩의 마음을 헤아려 주실 수만 있다면, 신첩이 또 화상을 입는 게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간사한 장사꾼! 뻔뻔스러운 무뢰한 같으니! 묵용린은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사봉봉의 얼굴에 떠오른 교활한 미소를 발견한 그는 문득 깨달았다.

“말해 보시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요?”

사봉봉은 이래서 눈치가 빠른 사람과 교제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황상, 신첩은 면사 금패를 하나 더 원합니다.”

묵용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사봉봉이 저번에 가져간 면사 금패를 금천아에게 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에 요구하는 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리라.

“지난번에 가져가지 않았소?”

그는 비꼬며 물었다.

“왜, 비싼 값에 팔기라도 했소?”

“아닙니다. 황상께서 하사하신 금패를 신첩이 어찌 감히 팔겠습니까?”

사봉봉이 이어서 말했다.

“신첩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황상께선 신첩을 이토록 싫어하시는데, 금패는 한 번의 재앙밖에 막지 못하잖습니까? 그 때문에 금패를 몇 개 더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묵용린은 냉소를 지었다.

“몇 개 안 되는 금패 중에 한 개라도 가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다니! 너무 욕심을 부리면…….”

“신첩이 어찌 감히 욕심을 부리겠습니까.”

더없이 온화한 표정을 지은 사봉봉은 수저로 탕을 저으며 책상을 돌아 그에게로 향했다.

묵용린은 여전히 화를 내며 소리쳤다.

“짐은 황후처럼 뻔뻔한 사람을 본 적이 없소. 사봉봉! 짐에게 이런 협박이 통할 거라고 착각하지 마시오! 짐은 진룡천자이며 아무것도 두렵지 않으니까! 짐, 짐, 짐이… 알았소! 내어 주면 될 것 아니오!”

사봉봉은 빙그레 웃으며 그릇을 내려놓고 깊이 감사를 표했다.

“신첩, 황상께 감사드립니다.”

묵용린은 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힘없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짐에게서 멀찍이 떨어지시오.”

* * *

이렇게 사봉봉은 묵용린에게서 연거푸 두 개의 면사 금패를 따냈지만, 그녀는 그것을 자기를 위해 쓸 생각이 없었다.

기회를 봐서 사금언을 궁으로 부른 그녀는 금패를 사앵앵에게 보냈다. 금천아를 훈육했던 게 사앵앵이었던 만큼 두 사람은 불같은 성격까지 똑같았다. 그러니 그녀는 어머니를 위해서도 금패를 준비한 것이다. 이런 물건은 많을수록 좋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녀는 아버지와 동생 것까지 준비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묵용린이 왜 자신을 두려워하는지 한참 고민했다.

한때 그녀는 그가 여자를 무서워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허 귀비와 유 귀인이 모두 승은을 입었다고 하니, 그 추측은 배제해야 했다.

결국 그녀가 내린 결론은, 그가 사실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그녀라는 것이었다!

그녀를 너무 싫어하는 마음에 두려워하는 걸까? 아니면 너무 두려워하여 싫어하는 것일까?

어찌 됐든 이제는 묵용린이 두려워하는 것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내는 게 관건이었다.

아무리 겸손하고 조용한 사봉봉이라고 해도, 위풍당당한 동월의 황제가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그녀로 하여금 살짝 우월감을 느끼게 했다. 갑자기 앞날이 확 밝아지는 것 같았고, 갑갑하고 적막하기만 했던 구중궁궐도 이젠 마냥 혐오스럽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봉명궁에만 처박혀 있지 않고 틈틈이 돌아다녔다.

초목이 푸르고 꽃향기가 퍼지는 사월, 궁중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사봉봉은 금천아를 데리고 호숫가를 걷고 있었는데, 마침 묵용린과 가난청이 옆길에서 걸어 나왔다.

가난청은 황후 마마께 공손히 예를 취하려 했지만, 묵용린이 얼른 방향을 틀어 왔던 길로 돌아가 버렸다.

“…….”

가난청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황후에게 위로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뭘 놓고 오셨나 봅니다.”

사봉봉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궁도 알고 있어요. 황상께서는 아마도 면사 금패를 깜빡하고 안 가져오셨을 거예요.”

가난청도 면사 금패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사봉봉이 면사 금패를 얻어 낸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거기다 더욱더 뜻밖인 건, 사봉봉이 이 일을 농담 삼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 모습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 진중하고 조용한 사가의 어린 주인장과 너무 달랐다.

그는 멀어져 가는 사봉봉의 뒷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실 사봉봉과 묵용린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인데… 묵용린이 왜 그렇게 그녀를 싫어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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