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9화
묵용성은 탁자를 내리친 손을 감싸 쥔 채, 처량한 표정을 거두었다. 이내 안으로 들어온 묵용린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시간 훈련을 했는데 아직도 청양을 이기지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황형, 전 정말 쓸모없는 놈입니다.”
묵용린이 냉소를 지었다.
“늘 육황숙만 따라다니며 쓸모없는 것만 배우는 놈이… 그걸 이제야 안 것이냐?”
묵용성과 함께 슬퍼하던 경화와 경옥은 순식간에 상황이 변하자 어리둥절했다. 그래도 서둘러 무릎을 꿇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유일하게 금천아만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사봉봉은 서둘러 그녀 앞을 가로막으며 묵용린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황상, 오셨습니까.”
묵용린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끔거렸다.
“일어나시오.”
묵용성이 봉명궁에 갔다는 소식에 그는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직접 찾아왔다. 묵용성이 평소 여인들에게 어찌 대하는지는 묵용린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봉봉 앞에서는 그리해선 안 되었다. 자칫 잘못하다 그의 체면까지 깎여 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다.
묵용성은 황형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엿들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어찌 말이 없는 것이냐. 계속해 보거라.”
“신제, 하려던 말을 다 마쳤습니다.”
“무슨 말을 하였는데?”
“…신제는 쓸모가 없다고, 황형께서 이리 오랜 시간 가르쳐 주셨는데 아직도 청양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 말이 황후에게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이냐?”
묵용린이 그를 흘기며 말했다.
“황후가 널 도와 싸움이라도 해 줄까 봐?”
묵용성이 금천아를 가리켰다.
“화, 황수는 어렵겠지만… 천아는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묵용린도 금천아의 발골술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었다. 발골술을 떠올리니 그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가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애에게 청양의 뼈를 발라내게 하려고?”
묵용성이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신제가 어찌 감히! 신제는 그저 저 애에게 청양을 조금 놀라게 해 주라고 할 생각이었습니다.”
“청양보다 키도 큰 녀석이! 여인 하나를 이기지 못하고 남의 도움을 받는 것도 모자라 기어이 찾은 이라고는 이런…….”
그가 금천아를 힐끔거렸다. ‘아가씨’라는 말을 뱉고 싶었지만, 금천아의 체격이 그의 동생보다 더 튼실한 것 같았다.
“…궁녀라니, 짐의 체면을 참 잘도 세워 주는구나!”
묵용성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묵용린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내일부터 매일 연무장에 나와 진 사부께 두 시진씩 훈련을 받거라. 나오지 않거든 짐이 금족령을 내릴 것이니 그리 알거라.”
말을 마친 그는 성을 내며 그대로 방을 나섰다. 묵용성은 정말 울고 싶었다. 어찌 상황이 이리되었단 말인가? 그는 훈련이 싫었다. 땀을 흘려 냄새가 나는 건 더더욱 끔찍했다!
사봉봉이 묵용성에게 물었다.
“황상이 그렇게 무서워요?”
묵용성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그는 쑥스러워하며 덧붙였다.
“청양도 무서워해요. 황형은 어쨌든 황제잖아요. 누구든 죽이려고 하면 죽일 수 있는 황제.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황상께서는 무엇을 두려워하시나요?”
묵용성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형은 두려워하는 게 없어요. 귀신도 무서워하지 않아요.”
“어릴 적부터 어떤 것에도 겁을 낸 적이 없었어요?”
묵용성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황형은 그런 적 없었어요.”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왜 그렇게 그녀를 무서워했을까? 사봉봉은 스스로 답을 찾기로 결심했다.
입궁한 이후로 그녀는 줄곧 신중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사소한 행동으로 묵용린에게 꼬투리를 잡힐까 봐 더더욱 조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낼 작정이었다.
오후에 그녀는 승덕전으로 향했다. 마침 소태감이 쟁반을 들고 서재로 가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를 불러 세우며 말했다.
“본궁이 가지고 들어가겠네.”
소태감은 황후 마마인 것을 확인하고 아무 말 없이 들고 있던 쟁반을 건네주었다.
서재에 들어간 사봉봉은 책상 앞에 앉아 상주서를 보고 있는 묵용린을 지켜보았다.
그녀를 발견한 왕장량이 서둘러 황제에게 고하려는데, 사봉봉이 손짓으로 그를 말렸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녀가 살그머니 황제에게 다가가는 것을 걱정스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궁녀를 쓰지 않았다. 월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황제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황후 마마께서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지…….
왕장량은 황제가 너무 놀라지 않도록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묵용린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누군가 차를 올리는 것만 곁눈으로 확인했을 뿐. 그런데 은은한 향기가 풍겨오자 그는 즉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지척에 다가와 있는 사봉봉을 발견하고 번쩍 몸을 일으켰다.
그의 과민한 반응에 사봉봉은 찻물을 자기 손등에 끼얹고 말았다. 너무 뜨거웠던 그녀는 얼른 찻잔을 던져 버렸다.
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가난청이 쏜살같이 다가와 손수건으로 찻물을 닦아 주었다.
왕장량은 서둘러 사희에게 연고를 가져오라고 분부한 뒤, 소태감을 시켜 어질러진 자리를 치우라고 명했다.
순식간에 궁인들이 달려와 어수선한 광경이 펼쳐졌다.
오직 묵용린만 우두커니 서서 그들이 사봉봉을 둘러싸고 요란 떠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마마, 아프십니까?”
“마마, 잠시만 참으십시오. 약을 바르면 조금 나을 겁니다.”
“아니면 태의를 불러올까요?”
“마마…….”
그녀도 처음에는 놀라서 헉하고 소리를 냈지만, 금세 차분해져서 그들에게 말했다.
“괜찮네. 약을 바르면 괜찮을 것이네.”
가난청이 화상을 입은 사봉봉의 손에 가볍게 입김을 불고 있었다. 묵용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그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발이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다. 결국, 가난청의 눈짓에 모두 물러나고 묵용린과 사봉봉만 남았다.
사봉봉은 다친 손을 받치고 다소 의아한 눈빛으로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비록 약간의 대가를 치렀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녀는 묵용린이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걸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묵용린은 마음이 좀 불편했다. 정말 그와 사봉봉의 기운이 상극인 걸까? 요즘 마주치기만 하면 그녀가 부상을 당했다. 그건 절대 그의 본의가 아니었다.
그가 목청을 가다듬고 물었다.
“손은 좀 어떠시오?”
“괜찮습니다. 그저 조금 부었을 뿐입니다.”
사봉봉이 스스럼없이 다친 손을 뻗으며 그에게 다가가자 묵용린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가까이 올 필요 없소. 짐도 잘 보이오.”
그를 향해 방긋 미소를 지은 사봉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그에게 다가갔다.
“거기 서시오.”
묵용린은 다시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서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오!”
사봉봉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물었다.
“황상께서는 신첩이 두려우십니까?”
딱딱하게 굳어진 안색으로 묵용린은 시치미를 뗐다.
“그게 무슨 헛소리요? 짐이 황후를 왜 두려워하겠소?”
“두렵지 않으시다면… 그렇게 물러서지 마십시오.”
“짐이 물러서고 싶으면 물러서는 거지! 황후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오.”
“또 물러서려고 하십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황상, 뒤에는 벽입니다.”
그녀의 말대로 뒤꿈치가 벽에 닿는 게 느껴졌다. 그는 계속 다가오는 사봉봉을 보며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짐이 경고하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시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짐이 바로…….”
“황상께서 바로 어쩌실 겁니까?”
사봉봉은 손을 들었다.
“신첩은 황상께서 고의로 이러신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날, 신첩을 걷어찬 것도 의도한 일이 아니었지요? 황상께서는 단지 신첩 때문에 놀라신 겁니다. 하지만, 신첩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신첩이 흉측하게 생긴 것도 아닌데… 황상께서는 왜 신첩을 두려워하시는 겁니까?”
“헛소리!”
묵용린은 벽에 바짝 붙으며 고함을 질렀다.
“짐은 황제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짐을 두려워하지만, 짐은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아!”
“두렵지 않으시다면서 왜 벽에 붙어 계시는 겁니까? 황상, 신첩을 밀어내거나 차 버리시면 되지 않습니까?”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호흡이 그의 얼굴까지 닿았다. 묵용린은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등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머리도 어지러워지기 시작했지만, 순간 뼈가 없어진 것처럼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발을 뻗을 수도, 손으로 그녀를 밀어낼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이 온통 빨갛고 이마에 땀이 흐르는 것을 보고 얼른 한 걸음 물러섰다.
“황상, 어디 불편하신 거 아닙니까? 태의를 불러올까요?”
어찌 자신의 약점을 그녀에게 이실직고하겠는가.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서자 숨쉬기가 조금 나아졌다. 묵용린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짐은 불편한 것 없소. 그저 황후가 싫을 뿐이오.”
사봉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첩도 그건 알고 있었지만, 황상께서 이렇게까지 신첩을 싫어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알았으니 짐에게서 멀리 떨어지시오.”
묵용린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온몸에 진동하는 돈 냄새를 짐에게 옮기지 않게 조심하고.”
사봉봉은 이 말을 제일 싫어했다. 장사를 한다고 꼭 몸에서 돈 냄새가 난단 말인가. 그녀는 그렇고 그런 간사한 상인들과는 달랐다.
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가자 묵용린은 곧바로 다시 벽에 붙어 섰다.
“신첩, 황상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겠단 거요?”
“황상께서 신첩을 이렇게 싫어하시니, 황상의 그 불쾌한 마음이 언제 신첩을 죽일지 몰라 너무 불안합니다. 그러니 면사免死 금패를 받고 싶습니다.”
묵용린은 비웃었다.
“당신이 무슨 덕이 있고 어떤 능력이 있기에? 무슨 근거로 면사 금패를 받겠다는 것이오?”
사봉봉은 화상을 입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신첩이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두 번이나 다쳤습니다. 신첩은 정말 두렵습니다.”
묵용린은 단호히 거절했다.
“아니 되오.”
사봉봉은 손수건을 꺼내서 그의 이마를 닦아 주려는 자세를 취했다.
“황상, 어찌 이렇게 땀을 흘리시는지…….”
묵용린은 크게 노했다.
“사봉봉, 네가 감히 짐을 위협하다니! 감히 네가… 멈춰라! 짐에게 손대지 마라! 짐, 짐이 금패를 주겠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눈썹에 닿을 뻔하자 그 언저리가 몹시 가려웠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손가락에 집중되어 거의 사시처럼 두 눈동자가 모아졌다.
사봉봉은 그의 당황한 모습에 웃음을 참기 힘들었지만, 웃음을 터뜨리면 너무 심하게 구는 것 같아서 억지로 참았다.
“황상의 금구옥언은 번복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서 다리를 구부리며 깊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녀가 물러서자 묵용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라도 버럭 내고 싶었지만 사봉봉의 손에 발린 시퍼런 연고를 보고 그만두었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가시오. 짐은 황후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