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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68)화 (1,068/1,192)

제1068화

양 귀인은 예악 가문 출신이라 고금 연주에 능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고금을 가져오라고 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정말 의아했다. 설마 황상이 자기 전에 그녀의 연주를 들을 생각이란 말인가?

승덕전에 도착한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흔들리는 불빛에, 바닥에 비친 그림자가 작아졌다 커지길 반복했다. 그녀는 앞에 진 그림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제의 그림자였다.

“예를 면하노라.”

묵용린이 말했다.

“고개를 드시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복사꽃처럼 발그레한 얼굴이 드러났다. 하지만, 묵용감의 마음엔 그 어떤 파동도 일지 않았다. 그는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다. 몸뚱이는 그에게 있어 그저 허울에 불과했다. 그는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금 연주에 능하다고 하던데, 짐에게 한 곡 들려주시오.”

양 귀인은 낮에 보았던 그의 모습 때문에 줄곧 가슴이 쿵쾅거렸다. 예법을 잘 알지 못하니 혹여 황제를 화나게 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런데 미소를 지어 주는 그의 모습을 보니 금세 황송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낮에는 황후 마마가 너무 미웠던 나머지 참지 못하고 발길질을 한 것 같았다. 화를 내지 않을 땐 이렇게나 친절한 분인 것을……. 그녀는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연주를 잘해서 자신의 정성을 보여 주고 싶었다. 받침상에 올려진 고금을 연주하기 위해 다가가는데 묵용린이 입을 열었다.

“풍루를 벗으시오.”

진왕은 늘 여인의 가녀린 모습을 보게 되면 매섭게 달려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침의만 입은 여인의 모습을 두 번이나 보았지만 그런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양 귀인은 부끄러운 듯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수줍게 풍루를 벗었다. 옆에 있던 소태감이 그녀의 풍루를 받아 들고 멀찍이 물러났다.

풍루를 벗자 역시 가녀린 몸매가 드러났다. 그러나 가녀린 몸매는 그의 마음에 잔잔한 파동도 일으키지 못했다. 지금 드는 생각이라고는, 이렇게 연약한 사람이 병이라도 나면 분명 다른 이들보다 회복 속도가 더딜 거라는 것뿐이었다.

그는 사봉봉이 겉옷을 입고 당직을 서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도 겉옷을 벗으면 이렇게 가녀린 몸일까…….

양 귀인이 연주를 시작하자 그는 정신을 차렸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까닭 없이 어찌 장사꾼을 떠올린단 말인가?

양 귀인의 연주 실력은 뛰어났고, 자세 또한 빼어났다. 은은한 불빛이 그녀의 한쪽 얼굴을 비추었다. 긴 속눈썹을 낮게 드리우고 섬섬옥수로 현을 튕기니, 손가락 사이로 맑은 샘물이 흐르는 것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묵용린은 비스듬히 앉아 연주를 감상하다가, 눈을 감으면 곡조의 정취를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그리했다. 역시… 달빛처럼 은은한 가락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때론 거센 폭포처럼, 옥구슬이 쟁반 위를 구르는 것처럼, 들판에 바람이 이는 것처럼,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것처럼 그의 심금을 울렸다…….

양 귀인은 떨리는 현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누르며 그 격정적이었던 연주를 마쳤다. 저 멀리 서 있는 시종들도 취한 듯 넋을 놓은 표정이었다. 이내 모두 정신을 차린 뒤,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 있는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묵용린은 단잠에 빠져 가볍게 코를 골고 있었다.

“…….”

그녀는 막막한 얼굴로 왕장량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가 좀 알려 줄 순 없단 말인가?

왕장량은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없어 침상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묵용린을 불렀다.

“황상, 황상…….”

묵용린은 성가시다는 듯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왕장량은 어쩔 수 없이 양 귀인에게 먼저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귀인의 연주 실력이 워낙 뛰어나시어 황상께서 단잠에 빠지신 듯합니다. 밤이 깊었으니 우선 돌아가 주무시고 내일 다시 황상의 분부대로 따르시지요.”

“…….”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조금 분하기도 했다. 황상을 재워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그의 시침을 들러 온 것인데 어찌…….

이튿날 아침, 황제는 그녀에게 상을 내렸다. 유 귀인에게 내렸던 상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사희는 긴 목록을 다 읽은 뒤, 양 귀인이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그녀를 한쪽으로 데려가 속삭였다.

“소인, 마마께서 무얼 물어보실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어젯밤 황상께서 연주를 들으며 잠드셨지만, 마마의 체면을 위해 기록을 남기라 명하셨습니다. 황상께서 마마를 얼마나 총애하시면 그리하시겠습니까.”

양 귀인은 황급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마음은 더없이 불편했다. 시침을 들지 않고도 기록을 남긴 것도 모자라 그녀가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한다니. 아무래도 좀 이상한 일이었다…….

* * *

그가 사봉봉을 걷어찬 일이 알려지게 되면 분명 묵용청양이나 월규가 찾아와 그를 귀찮게 할 줄 알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막상 그를 찾아온 것은 묵용성이었다.

묵용성은 궁에서 지내고 있긴 하지만, 자주 보기 어려웠다. 그는 대개 진왕 곁을 따라다니며 진왕의 풍류와 호방한 기세를 배우기 바빴다.

그가 즐겨 입는 월백색이나 은백색 장포에는 보통 난과 국화만 점잖게 수놓아져 있었지만, 미세한 부분에서 존귀해 보이는 걸 놓치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허리춤에 값비싼 옥패를 찬다거나, 옷깃에 최상급 옥 단추를 달거나, 깔끔한 옥 반지를 끼는 식이었다. 여기에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그의 기개까지 더해지자 그는 마치 옥으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맑고 깨끗해 보였다.

성격이 온화한 묵용성은 늘 묵용린을 무서워했다. 그런데 지금은 당장이라도 그에게 죄를 물으려는 듯, 봉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황형, 꼭 그렇게 봉봉을 걷어차야 했습니까?”

묵용린은 그의 입에서 나온 봉봉이라는 말이 굉장히 불쾌했다.

“그녀는 이제 사가 상호의 어린 주인장이 아니라 황후다. 앞으로는 황수라 부르거라.”

묵용성은 내키진 않았지만, 다시 고쳐 말했다.

“황형, 왜 황수를 걷어찬 겁니까?”

“왜냐하면…….”

묵용린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묵용성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부끄러움이 느껴져 괜스레 화를 냈다.

“무엄하다. 짐이 누굴 걷어차든 너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다른 이였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봉… 황수는 안 됩니다.”

“왜?”

“저희는 벗이니까요.”

묵용린은 그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저희는? 벗? 싫긴 해도 그녀는 어쨌든 그의 황후이고, 그의 여인이었다. 어찌 다른 사내와 얽힐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게 그의 아우라면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묵용성은 조금 뒤가 켕겨서 최대한 열심히 해명했다.

“신, 신제는 청양처럼 어릴 때부터 황수와 함께 자랐습니다. 해서 황수를 누… 누이라고 여겼습니다. 만약 청양도 이 소식을 들었다면 분명 황형을 찾아와 따져 물었을 것입니다.

신제, 황형께서 황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잘 압니다. 황수를 황후로 들이는 것도 전부 부황의 뜻이었지요. 하지만 이미 묵용씨 가문에 들어온 이상… 한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겼다 한들 말로 잘 해결하면 되지, 꼭 손을 써야 한단 말입니까? 황형께선 마음 아프지 않으시더라도 신제는… 그리고 청양은…….”

묵용성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는 묵용린의 안색을 힐끔 살폈다. 묵용린의 안색이 잿빛처럼 어두워지자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묵용린도 자신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 모두 사봉봉을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개 간사한 장사꾼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들의 호감을 산 것인지 정말 궁금했다. 그가 그녀를 조금만 업신여겨도 누군가 찾아와 그에게 도리를 따져 묻곤 했다.

한참 뒤, 그가 조금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만 나가 보거라.”

묵용성은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황형, 앞으로 다시는 황수에게 그렇게…….”

묵용린이 매섭게 호통쳤다.

“나가래도!”

묵용성은 깜짝 놀라 단숨에 방을 달려 나갔다.

안을 힐끔거리던 사희와 눈이 마주치자 묵용성은 괜스레 윽박을 질렀다.

“뭘 그리 들여다보는 것이냐?”

사희가 서둘러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전하, 노여움 푸시옵소서. 소인이 어찌 감히 들여다보겠나이까.”

묵용성은 옷자락을 뿌리치며 침착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의 우아한 자태만 보면 방금 대전에서 쏜살같이 도망친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묵용성은 갈림길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봉명궁으로 향했다.

사봉봉은 묵용성이 자신을 찾아오자 너무도 반가웠다. 그녀가 묵용성을 위아래로 훑으며 웃었다.

“전하, 어쩐 일로 이곳을 찾으셨습니까?”

묵용성은 왜인지 그녀가 억지로 웃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뒷짐을 진 그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근심에 잠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봉봉, 다 들었어요. 고생을 했다고요.”

사봉봉이 그의 말을 고쳐 주었다.

“전하, 절 황수라고 부르셔야지요.”

묵용성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황형에게 시집을 갔다고 해도 내 마음속엔 영원히 봉봉이에요. 그간 찾아와 보지 못해 잘 지내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었어요.”

“전 아주 잘 지내요.”

“잘 지내긴요.”

묵용성이 슬픔에 젖은 탄식을 내뱉었다.

“황형이 누굴 아껴 줄 성격이 아니지요. 까칠하기만 하고요.”

그의 두 눈에 물빛이 반짝였다.

“다 내 탓이에요…….”

사봉봉은 팔뚝에 닭살이 돋는 것처럼 소름이 끼쳐서 팔을 움츠리며 말했다.

“전하, 그러지 마시어요. 전 정말 잘 지냅니다. 황상께서도 잘해 주시고…….”

“아뇨. 거짓말하지 마세요. 전 황형을 잘 알아요. 형은…….”

그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황형은 아껴 주는 법을 몰라요. 안타깝게도…….”

그는 별안간 감정이 격해졌는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애수에 젖은 말투, 처연한 표정, 애틋한 눈빛, 천천히 가로젓는 고개까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공자의 모습이었다.

경화와 경옥은 놀란 마음에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를 보고 있으니 그들도 절로 슬퍼졌다.

하지만 사봉봉은 달랐다. 그를 어렸을 때부터 봐 온 그녀는 그저 우스운 마음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때, 문 앞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안타깝단 말이냐?”

사봉봉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보니 언제 온 것인지, 묵용린이 문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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