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7화
금천아가 우거지상으로 대꾸했다.
“마마, 지금 농이 나오십니까. 저택에 계실 때 장군과 부인께서는 마마께 꾸중 한 번 안 하셨는데, 궁에서는 걷어차이시다니요! 황상께서는 정말…….”
사봉봉은 그녀의 입을 막으며 낮게 호통쳤다.
“아직도 더 소란을 피우고 싶은 것이야?”
금천아가 성을 내며 코를 문질렀다.
“마마 대신 소인이 화가 나 죽겠습니다.”
사봉봉이 물었다.
“어머니께서 어찌 널 궁으로 보내신 걸까?”
“마마를 지켜 주라고요.”
“네가 죽으면 날 어찌 지키려고?”
금천아는 사봉봉의 몸을 훑어보더니 시무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를 차이셨습니까?”
사봉봉이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괜찮아.”
금천아는 그녀를 데리고 안쪽 방으로 향하며 경화와 경옥에게 말했다.
“어서, 약을 가져와. 마마께서 어딜 다치셨는지 봐야 하니까.”
옷을 벗기자 사봉봉의 등 한쪽에 시퍼런 멍 자국이 보였다. 피부가 너무 하얀 탓에 작은 흔적도 유독 눈에 잘 보였다. 금천아는 아이 주먹만 한 멍을 보고 이를 갈았다.
“어찌 이리 경중도 없이 때린답니까. 황제만 아니었어도 제 발골술을 맛보여 줄 텐데 말이에요.”
“됐어.”
사봉봉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계속 그렇게 물고 늘어지지 마. 그저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 * *
세 귀인은 길을 거닐며 방금 전 일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장 귀인이 참지 못하고 혀를 내둘렀다.
“입궁하자마자 황상과 황후 마마께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저 유언비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사실일 줄이야. 황상께서 발로 걷어차실 정도라니……. 마마를 정말 싫어하시나 봅니다.”
양 귀인이 말했다.
“이런 대우를 받을 바에는 황후를 안 하는 게 낫겠습니다. 얼마나 체면이 구겨지시겠습니까.”
유 귀인은 묵용린의 귀공자 같은 인상이 줄곧 뇌리에 박혀 있었지만, 오늘 본 그는 조금 달랐다. 그가 입는 샛노란 장포에는 바다를 뛰어오르는 교룡이 발톱을 휘두르는 모양새로 자수가 수놓아져 있었고 그 눈매 또한 매서웠다. 온몸에서 제왕의 위엄 있는 기세가 흘러넘치는 게,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두려웠다. 그녀는 셋 중 유일하게 시침 시중을 들라는 명을 받았었기에 묵용린을 옹호했다.
“듣자니 황상께서는 귀비 마마를 황후로 맞고 싶어하셨다더군요. 한데 어쩐 일인지 마지막엔 사 장군 가문의 적녀를 황후로 책립하셨어요. 아마 황상께서 이 일로 황후 마마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장 귀인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유 형님 말씀은… 황상께서 자신과 귀비 사이를 황후가 갈라놓았다고 원망하신단 말이에요?”
양 귀인이 말했다.
“예전에 저도 좌상댁 적장녀가 황후로 낙점되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귀비 신분으로 입궁하게 되셨지요. 분명 황상께서도 부득이한 고충이 있으셨을 겁니다.”
장 귀인이 말했다.
“전 황상께서 대혼 날 밤 귀비 마마의 벽요궁으로 가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게다가 사고까지 났다고 하더군요.”
양 귀인이 물었다.
“무슨 사고요?”
장 귀인이 입을 가리고 웃더니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지막이 말했다.
“마상풍요.”
양 귀인은 입을 쩍 벌렸고, 유 귀인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큰일 나려고…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습니까?”
말을 기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장 귀인은 두 귀인에 비해 거침없이 말했다.
“뭐 어때서요. 궁 안에 이미 소문이 파다한데.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그 이후로 황상께서 두 번 다시 귀비 마마를 찾지 않으셨대요.”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양 귀인은 다른 이들보다 더 감수성이 뛰어나고 사색적이었다. 그녀가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 이유를 모르시겠습니까? 나그네가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올 때, 고향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혹여 고향에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두렵고 착잡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황상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보고 싶고 그리운데 차마 만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유 귀인이 물었다.
“대체 왜요? 벽요궁이 먼 것도 아니잖아요.”
“대혼 날 밤 있었던 일 때문이지요. 황상과 귀비 마마 모두 그렇게나 존귀한 분들이신데 그런… 아시겠지요?”
유 귀인과 장 귀인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으면서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양 귀인이 조금 짜증스럽게 말했다.
“정말 소 귀에 경 읽기네요.”
장 귀인이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다.
“차라리 귀비 마마께 문안을 드리러 가는 건 어때요? 황상께서 애지중지하시는 분이니까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좋잖아요. 나중에 수녀를 선발하면 새로운 사람이 우르르 들어올 텐데… 우리가 먼저 좋은 뒷배를 잘 찾아 놔야죠.”
결국 세 사람은 함께 벽요궁으로 향했다.
벽요궁은 봉명궁처럼 크진 않았지만, 더 호화롭고 화려했다. 세 귀인은 궁전 장식을 살펴보며 생각했다.
‘황상께선 역시 귀비 마마를 편애하시는구나. 벽요궁이 봉명궁보다 훨씬 화려하네.’
허설령은 궁 밖에선 지위가 드높은 좌상부의 천금이었고, 입궁 후에는 황후 다음으로 높은 귀비에 봉해졌다. 워낙 높은 신분 덕분인지 그녀에게서는 자연스레 존귀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그녀는 붉은색 멀구슬나무 의자에 앉아, 인사를 올리는 세 귀인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 예를 갖출 것 없어요. 입궁한 이상 자매나 마찬가지니 앞으로 자주 왕래하도록 해요.”
세 귀인은 감사 인사를 올린 뒤 자리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치레 끝에 그들은 조금 전 봉명궁에서 본 이야기를 전했다.
황제가 황후를 걷어찼다는 말을 들은 허설령은 깜짝 놀랐다. 황제가 황후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손까지 댈 줄이야. 그렇게나 싫어한단 말인가? 게다가 황제는 아무리 화가 나도 신분상 직접 손을 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 그가 황후를 걷어찼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이상했다…….
사실 고소하긴 했다. 황제가 직접 벌했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으나 그녀는 그 어떤 의아함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태도에 세 귀비 또한 오래 머무르고 있기 어색해서 그들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금방 물러났다.
장 귀인이 말했다.
“역시 좌상댁이 황후의 기준에 맞게 귀비 마마를 길러 내셨나 봅니다. 앉아 계신 모습을 보니 귀비 마마께서 황후의 모습에 더 가까우시던 걸요.”
양 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귀비 마마께서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것 같아요.”
유 귀인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전 귀비 마마가 좋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을 땐 그만한 태도도 중요하지요. 황후 마마께서는 조금 옹졸해 보이십니다. 상으로 주신 그 간식 좀 보세요.”
* * *
경화가 달콤한 간식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사봉봉이 넋을 놓고 앉아 있자 황제에게 걷어차인 일로 속상해 한다는 생각에 따뜻하게 다독였다.
“마마, 그만 생각하시어요. 금천아 언니가 특별히 달콤한 흘탑탕疙瘩湯(밀가루 반죽을 넣어 만든 탕)을 만들었어요. 마마께서 입궁 전에 좋아하시던 음식이라면서요.”
사봉봉은 탕을 받아 들고 한 숟갈 떠먹었다. 흘탑탕은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음식이었다. 예전엔 류 어멈이 해 주던 것을 금천아가 배워서 시도 때도 없이 해 주었다.
매번 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녀는 서북 지역에서 지내던 때가 떠올랐다. 몹시 추운 겨울 날씨에 떠들썩한 역참, 전국 방방곡곡의 여행객들, 각종 진귀한 여행담, 귓전을 울리는 온갖 말씨들까지. 그중에서도 그녀의 어머니인 사앵앵의 목청이 가장 카랑카랑했고, 그녀의 아버지 사장풍은 조용히 어머니 곁을 맴돌았다.
이따금 부모님이 서로 눈을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행복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도 훗날 부모님처럼 행복하길 바랐다. 그녀를 아껴 주는 부군을 만나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벌을 세우는 것이나 야간 당직을 서게 하는 건 그렇다 쳐도, 그는 이젠 하다하다 그녀에게 손까지 댔다.
그녀는 이 일로 상처를 받거나 괴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곤혹스러웠다. 야간 당직을 서던 그날 밤, 묵용린은 그녀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다시 생각했을 때, 그날은 밤이 너무 깊어 그녀도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까마득한 황제가 어찌 그녀를 무서워하겠는가?
하지만 방금 전, 그녀가 좋은 마음으로 그를 부축하려 했을 땐 분명 그의 눈빛에 당혹감이 스쳤다. 무서우니까……? 그래, 그래서 황급히 걷어찬 것이다. 그건 당황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동작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살생권을 쥐고 있는 천하의 묵용린이 도대체 왜 그녀를 무서워한단 말인가?
그녀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자 경화가 걱정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마마?”
사봉봉은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본궁은 괜찮으니 그만 나가 보거라.”
묵용린이 왜 그녀를 무서워하는지 찾아내야 했다. 그것만 알아내면 이 일의 판도가 뒤집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사봉봉이 깊은 고민에 잠겨 있을 때, 묵용린도 넋이 나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가난청에게 사봉봉과 서로 존중하며 지내겠다고 약조했는데… 도리어 그녀를 걷어차고 말았다.
사희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황상.”
“어떠하냐?”
사희가 손짓을 하며 설명했다.
“마마의 등에 아이 주먹만 한 멍이 들었다고 합니다.”
“분명 짐을 욕했겠지.”
“아닙니다. 괜찮다고 하셨답니다. 그저 책상 모서리에 부딪힌 거라고 생각하시겠답니다.”
묵용린이 잠시 침묵한 끝에 입을 열었다.
“제법 눈치는 있구나.”
사희는 바깥의 흉흉한 소문이 떠올라 황제를 반드시 일깨워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상, 만약 황상께서 누군가를 벌하신다면 그 누구도 감히 입을 놀릴 자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래도 황후 마마께는…….”
묵용린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짐도 고의가 아니었다. 황후가 짐을 만지려 하기에 찬 것이다.”
사희는 그제야 일이 벌어진 이유를 알아차리고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세 귀인께서 입궁하셨는데, 황상께선 아직…….”
묵용린이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오늘 밤, 양 귀인을 불러오너라.”
“예, 소인, 명 받잡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