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6화
사희는 그녀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 방면에서는 그 또한 경험이 있었기에 유 귀인을 한쪽으로 끌고 와 허 귀비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읊어 주었다.
“황상께서 어젯밤 바둑을 두신 뒤 피곤하시어 바로 침소에 드셨지만, 마마의 체면 때문에 기록을 남기셨습니다. 이는 황상께서 마마를 총애하신다는 뜻이니 다른 이들에겐 말씀하지 마시고 그저 감사히 여기시면 됩니다.”
유 귀인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상으로 내린 물건들보다 사희의 말이 더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황제가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으니 그녀의 체면을 신경 쓰는 것 아니겠는가. 어젯밤 황제의 모습을 떠올린 그녀는 얼굴이 발그레 물든 채 쑥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묵용린은 유 귀인이 퍽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그와 대국할 수 있다는 건 유 귀인이 제법 똑똑하다는 걸 뜻했다. 그는 늘 똑똑한 사람을 좋아했다.
때마침, 동월에서 가장 총명한 자가 서재로 들어왔다. 묵용린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목소리엔 원망이 가득했다.
“어찌 이제 오는 것이냐. 보거라. 상주서가 산처럼 가득 쌓이질 않았느냐.”
가난청이 상주서를 훑으며 놀리듯 말했다.
“어쩐지 황상께서 대혼 이후 조금 태만해지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설마 그 시구詩句가 사실이란 말입니까?”
“어떤 시구?”
“봄밤은 지독히 짧아 금세 날이 밝으니, 이때부터 군왕이 아침 조회를 하지 못하는구나.”
묵용린이 살짝 안색을 굳혔다.
“허튼소리! 짐을 헐뜯는 것이냐. 짐이 널 벌하지 못할까 봐?”
어려서부터 묵용린과 함께 자란 가난청은 그의 말 중 어느 게 진짜고 어느 게 가짜인지 구분할 수 있었기에 겁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이왕이면 소신의 말을 다 들어 주신 뒤에 벌하십시오.”
묵용린은 경계심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할 말이 더 있단 말이냐?”
“황상께서도 소신이 누이동생 소타를 가장 아낀다는 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소타가 원한다면 소신도 차마 거절을 하지 못하지요. 비록 이 일은…….”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소신도 조금 난처합니다.”
묵용린은 조금 의아했다. 똑똑한 가난청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라니. 그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짐이 해결해 줄 테니 어디 말해 보아라. 어쨌든 짐은 소타의 오라버니가 아니더냐. 그 애의 요구라면 짐이 응당 들어 주어야지.”
가난청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을 할지 말지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묵용린이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어서 말하래도. 천하에 짐이 못 하는 일이 있단 말이냐?”
“황상께서 하실 수는 있겠지만, 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네가 하는 말이니 짐은 당연히 할 것이다.”
가난청이 웃으며 말했다.
“소신, 황상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만 기다렸습니다. 황상의 말씀은 중천금이니 번복하실 수 없습니다.”
묵용린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낌새에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가난청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는 천고의 성군이 되려는 뜻을 세우셨으니 응당 백성들의 모범이 되셔야 합니다. 백성들이 모여 가정을 이루고, 가정이 모여 강대한 대국을 이루는 법이지요. 비록 태상황처럼 애처가의 모범까진 되지 못하시더라도, 최소한 황후 마마와 서로 공경해야 마땅한 줄 압니다. 그래야 후궁이 안정되고 황상께서도 뒷일을 걱정하지 않으실 수…….”
묵용린은 말이 점점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자 손을 내저었다.
“네 말은 짐과 황후가…….”
“소타의 말입니다.”
묵용린은 의아했다.
“소타가 어찌 짐과 황후의 일에 관심을 갖는단 말이냐?”
가난청이 말했다.
“사금언을 늘 따라다니지 않습니까. 아마도 사금언에게서 무언갈 들은 것이겠지요.”
“사금언?”
묵용린은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사금언은 이등 시위라 궁에서 근무했다. 사봉봉을 보러 봉명궁에 찾아갔다가 사봉봉이 업신여김을 당했다며 남동생에게 하소연을 했을 터…….
사봉봉…….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날 밤 그녀에게 당직을 서라는 벌을 준 뒤, 그는 죄책감이 느껴져 예법을 배우라는 명을 거뒀다. 한데 사봉봉은 어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사는 게 너무 태평한 나머지 제 본분을 잊었단 말인가?
“황상.”
가난청이 묵용린의 안색을 살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묵용린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겠다. 황후와 서로 공경하고 존중하마. 맞다, 녹하 고고는 널 무슨 일로 부른 것이냐?”
가난청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혼사 때문입니다.”
묵용린은 좌절에 빠진 가난청의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기에 곧장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네 혼사 때문에? 어느 집 여인이더냐, 짐이 혼사를 내려 줄까?”
가난청은 어이가 없었다.
“황상, 소신 올해 고작 열넷입니다.”
“열넷이 어리단 말이냐? 진왕야는 열셋에 경험을 시작하고 열넷에 정혼을, 열다섯에 혼사를 올렸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기지.”
가난청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신은 모든 일에 황상을 본받고 싶습니다. 황상을 따라 약관에 혼인할 계획입니다.”
묵용린이 말했다.
“그 점은 짐을 본받지 말거라.”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곤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여인과 동침을 해 봐야 진정한 사내라고 할 수 있지. 그 느낌은 정말이지…….”
평소 묵용린은 농담을 던지는 법이 없었지만 가난청과 있을 땐 본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가난청이 겸허히 가르침을 청했다.
“황상, 말씀해 주십시오. 대체 무슨 느낌입니까?”
묵용린의 안색이 굳어졌다.
“…….”
그가 어찌 알겠는가. 진왕이 제법 그럴듯하게 얘기한 걸 들은 게 전부인데. 그의 병 때문에 이번 생에 그런 경험이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가난청 앞에서 체면을 잃고 싶지 않았던 그는 애써 침착한 척 입을 열었다.
“네가 직접 해 보면 알 수 있을 거다.”
가난청에게 약속을 했으니 묵용린은 봉명궁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면 사봉봉과 자신이 왕래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불식시킬 수 있겠지.
사봉봉은 구련환九連環(여러 가지 모양의 고리를 꼈다 뺐다 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구련환에 푹 빠져 묵용린이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묵용린은 일부러 그가 왔다는 사실을 통보하지 못하게 했다. 사봉봉의 꼬투리를 잡고 싶어서였다. 꼬투리를 많이 쥐면 쥘수록 좋았다. 꼬투리를 쥐고 있다가 그녀를 혼내고 싶을 때 하나씩 꺼내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사봉봉이 가지고 놀고 있는 구련환에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 그는 지도 맞추는 놀이를 가장 좋아했고, 구련환도 자주 가지고 놀았다. 머리를 쓰는 놀이라면 모든 다 좋아했다. 사봉봉이 가지고 있는 구련환은 그도 처음 보는 모양이었는데, 얼핏 봐도 매우 복잡한 생김새였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구련환을 유심히 살폈다. 보통 구련환과 달리 고리가 아홉 개가 있는 게 아니라 열 개가 넘었다. 덕분에 난이도도 높았고 그만큼 머리도 더 많이 써야 했다.
그가 물었다.
“그대가 입궁할 때 가져온 것이오?”
놀이에 완전히 몰입해 있던 사봉봉은 별안간 목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랐다. 묵용린의 얼굴을 마주한 그녀는 황급히 일어났다.
묵용린도 구련환을 유심히 보기 위해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 상태였다. 거기에 사봉봉이 몸을 벌떡 일으키자 두 사람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한 묵용린은 탁자에 부딪혀 휘청거렸다. 사봉봉은 본능적으로 그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묵용린은 그녀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지 않도록 허리를 슬쩍 틀어 그대로 탁자를 붙잡았다. 그의 허리는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지만, 자세는 매우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순간적인 일이었기에 사봉봉은 그가 일부러 그녀의 손길을 피한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앞으로 다가가 그를 부축하려 했다. 더는 피할 길 없던 묵용린은 조급한 마음에 그녀를 걷어찼다. 결국 사봉봉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황후의 비명에 바깥에 있던 시종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들었다.
가장 앞장서서 들어온 사람은 금천아였다. 그녀는 자신의 마마가 바닥에 넘어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상한 자세로 서 있던 황제. 그의 오른쪽 다리는 허공에서 막 내려오던 참이었다. 누가 봐도 황제가 황후를 걷어찼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금천아는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가 사봉봉을 일으켰고 허리춤에 찬 비수를 만지작거리며 묵용린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사봉봉은 황급히 그녀를 끌어당기며 자제하라는 뜻을 내비쳤다.
사희의 부축을 받고 자세를 가다듬은 묵용린은 투우처럼 건장한 궁녀가 자신을 노려보자 매섭게 호통쳤다.
“무엄하다!”
사봉봉이 금천아의 허리를 찌른 후에야 금천아는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물론 그녀도 황제가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봉봉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누구든 해치울 수 있었다. 설령 그게 황제라고 해도.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금천아를 걱정했다. 누가 봐도 황제에게 불경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사봉봉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기에 한 손으로 금천아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묵용린이 진노하면 곧장 무릎을 꿇고 청을 드릴 생각이었다.
묵용린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금천아를 바라보았다. 평소였다면 그는 곧장 금천아를 끌어내 곤장을 쳤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사봉봉을 걷어찬 게 마음에 걸렸다. 금천아가 마음을 다해 주인을 보호하는 것도 이해는 되니… 오늘은 이렇게 넘어가는 수밖에.
“이 일은 짐이 기억해 둘 것이다. 혹 다음에 또다시 이같은 우를 범하거든, 그때 벌을 내리겠다.”
말을 마친 묵용린은 소매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사봉봉은 그가 멀어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러다 민망한 얼굴로 복도에 서 있는 세 귀인을 발견했다. 낌새를 보아하니 그들도 조금 전 일을 전부 다 본 듯했다.
봉명궁에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온 세 귀인은 황제가 황후를 걷어차는 걸 보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차마 들어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돌아가지도 못한 채 머뭇거렸다. 사봉봉이 자신들을 바라보자 당황한 그들은 곧장 자리를 떴다.
사봉봉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본궁은 전혀 부끄럽지 않은데… 저들이 더 부끄럽다는 듯 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