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5화
묵용린은 초조했지만 애써 평온함을 유지했다. 그의 안색을 살피던 진왕이 웃으며 물었다.
“황상, 신과 어선을 들고 싶어 부르신 것은 아니지요?”
묵용린이 그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육황숙, 짐이 왜 황숙을 불렀는지 모르십니까?”
물론 알고 있었다. 이 일로 그 또한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묵용린은 반드시 대를 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동월의 사직과 관련된 일이자 묵용씨의 천추만대에 대한 일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애정을 논하는 건 황상께는 어려운 일이니 아예 기본부터 하시지요.”
묵용린이 물었다.
“기본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미색.”
진왕이 말했다.
“미색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법이지요. 황상께서 흥미가 없으신 건 황상의 마음을 움직이는 미색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이 황상 대신 절세가인을 찾아보겠습니다.”
묵용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짐은 외모만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왕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황상, 어떤 성격의 여인을 좋아하십니까? 성격도 좋고 여기에 얼굴까지 예쁘면 황상께서 좋아하실지도 모릅니다.”
묵용린은 젓가락을 쥔 채 고민에 잠겼다. 어찌 된 까닭인지 사봉봉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혐오스러운 마음에 눈을 힘껏 깜빡이며 말했다.
“늘 침착하기만 한 사람은 싫습니다. 좀 활발한 성격이면 됩니다.”
진왕은 눈을 반짝이더니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보아하니 그간 방향을 잘못짚었군요. 관리들 집안의 천금들은 사리에 밝고 단정하긴 하지만, 정취는 좀 부족하지요. 이번엔 집안을 따지지 않겠습니다. 황상의 요구대로 찾아볼 테니, 황상께서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 * *
진왕은 황상을 위해 미인을 찾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며칠 만에 후보 명단을 보고했다.
묵용린은 습관적으로 집안을 따졌는데, 이번 명단 속 여인들에겐 모두 조회에 나올 자격이 없었다. 전부 다 육품 이하였던 것이다.
낮은 지위의 관리들은 딸아이를 황후로 만들 기대도 없었고, 일, 이품 고관들처럼 딸아이를 엄격하게 교육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그렇게 자란 여인들은 다른 규수들보다 더 단순하고 활발하면서도, 예절이나 사리 분별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묵용린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관원의 딸들이었기에 그는 그저 예쁜 여인만 고르면 되었다. 초상화 속 여인들은 전부 다 예뻤다. 하지만, 됨됨이가 어떠한지는 직접 만나 봐야 알 수 있을 터.
그는 고르고 고른 끝에 결국 세 여인을 선택했다. 각각 국자감 감승 유병언劉柄言 집안의 둘째 딸 유재춘劉梓春, 태상사 박사 양공성楊貢聲 집안의 장녀 양산리楊珊灕, 태복사 마창협령 장례량張禮亮 집안의 딸 장완張婉이었다.
전부 칠품 소관으로, 각각 교원敎員, 예악禮樂, 마차 및 말을 돌보는 관리였다. 다들 정권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너무 많은 걸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출신이 그리 높지 않으니 묵용린은 그들을 아버지와 똑같은 품계인 칠품 귀인으로 봉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동월의 제도에 따르면 황제는 대혼이 지난 후 삼 년 뒤에야 수녀 선발을 실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법은 그저 예법일 뿐, 설령 황제가 마음이 없다고 해도 누군가 자발적으로 밀어 넣는 것까지 막진 못했다. 역대 왕조가 모두 그러했기에 비교적 지위가 낮은 세 여인을 후궁에 추가로 들이는 것도 그리 이상할 게 없었다.
이상한 일은 아닐지라도 누군가에겐 적잖이 불편한 일이었다.
허설령은 멍하니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지금껏 황제의 마음속에 자신이 있다고 여겼다. 대혼 날 밤, 중간에 실패는 했지만 황제는 그녀와의 합방을 기록해 주었다. 그녀의 체면을 위해 그리했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찾아와 놓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분명 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황제는 그녀를 부르지도, 찾아오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황제가 부끄러워 그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병이 나는 건 체면을 구기는 일이니까. 그런데 그 후 황제는 황후에게 총애를 주었고 지금은 새로운 이들을 궁에 들였다. 황제가 자신과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당혹스럽기 그지없지만, 그녀가 또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사봉봉은 이 소식에 더없이 기뻤다. 궁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으니 그녀 입장에서는 매우 좋은 일이었다. 묵용린이 많은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그녀를 잊기 십상이니, 그녀에겐 훨씬 좋은 일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두 사람은 어쨌든 부부가 되었으니 그가 대의를 위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든 받아들여야 했다.
세 미인은 궁에 들어오자마자 황제가 아닌 황후에게 먼저 인사를 올렸다. 사봉봉 눈에 세 미인은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일어나세요.”
그녀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선 그리 예를 차릴 것 없어요.”
세 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준비해 온 선물을 바쳤다. 유 귀인은 서책을, 양 귀인은 고급 신금新琴을, 장 귀인은 작은 옥불상을 준비했다. 다들 귀중한 선물은 아니고 약간의 성의만 내비쳤다. 황후의 취향을 몰랐기에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봉봉은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받고 상으로 세 사람에게 간식 한 상자를 나눠 주었다. 세 귀인은 간식 상자를 받아 들고 속으로 구시렁댔다.
‘첫 만남에 간식을 상으로 주다니… 황후 마마도 정말 인색하시네. 동월 최고 갑부라더니, 돈이 많을수록 인색하다는 말이 진짜였잖아?’
묵용린 또한 황후가 세 귀인에게 간식을 상으로 주었다는 말에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봉관을 썼어도 쩨쩨한 심성은 변하지 않았구나. 이런 옹색함으로 국모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날 밤, 황제는 갓 입궁한 유 귀인을 불러 시침을 들게 했다. 유 귀인은 향을 피우고 깨끗이 목욕을 한 뒤, 얇은 침의를 입고 풍루로 온몸을 꽁꽁 감싼 채 소태감을 따라 승덕전으로 향했다.
묵용린은 이미 목욕을 마친 뒤 새하얀 중의만 입은 채 침상에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은 은색 끈으로 느슨히 묶어 뒤로 늘어뜨렸다. 불빛 아래, 부드럽고 윤이 나는 그의 모습은 군왕이 아니라 귀공자 같았다.
유 귀인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차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 없던 그녀는 곁눈으로 탁자 위에 올려진 그의 손만 볼 수 있었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심장이 철렁였다. 손만 봐도 그의 외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묵용린이 제법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드시오.”
고개를 든 유 귀인은 묵용린과 얼굴을 마주했다. 조금 전의 떨림은 점점 더 격동적인 두근거림으로 바뀌었다. 평소 아버지는 황제 얘기를 할 때마다 그가 무시무시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 때문에 그녀의 상상 속 황제는 매우 흉악한 사람이었는데 상상과 달리 이렇게 준수한 용모일 줄이야.
묵용린은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과연 뛰어난 미인이었다. 허설령과 견주어도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빤히 바라보자 얼굴이 천천히 붉어지는 게 교태를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진왕 말로는 절색을 만나면 분명 반응이 올 거라고 했다. 하지만 묵용린은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사람의 외향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다고 생각했다. 묵용린은 오늘 밤 좋은 시작을 하고 싶었다. 그는 한층 더 화색을 띠며 말했다.
“듣자니 바둑을 잘 둔다던데?”
“황상께 아룁니다. 신첩, 그저 보잘것없는 실력입니다.”
“짐과 한판 겨뤄 보겠소?”
유 귀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그마한 탁자 위에는 이미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흑백의 바둑알은 불빛에 반짝였다. 그녀가 막 침상에 앉으려는데 묵용린이 입을 열었다.
“풍루를 벗으시오.”
유 귀인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녀가 조용히 목 아래 묶인 끈을 풀자 소태감이 다가와 그녀의 풍루를 받아 들고 한쪽으로 물러났다.
유 귀인은 다시 침상에 앉았다. 학자 집안 출신이라 책상다리를 하고 앉기 어려웠던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살짝 비뚤어진 자세로 앉았다. 침의 아래로 그녀의 늘씬한 자태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녀는 사내 앞에서 침의만 입고 있는 게 난생처음이었기에 부끄러운 나머지 목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묵용린은 그녀를 슬쩍 훑었다. 허설령이 침의를 입고 있는 모습도 봤기에 그녀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내리깔고 하얀색 바둑돌을 집으며 입을 열었다.
“짐이 검은 돌을 양보할 테니 먼저 두시오.”
멀찍이 떨어져서 시중을 들던 왕장량과 사희는 황제가 유 귀인과 침상에서 승부를 겨루자 걱정이 태산이었다. 황제가 미인을 앞에 두고도 바둑에만 흥미를 느끼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오늘 밤 묵용린이 순조롭게 인생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그리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유 귀인의 바둑 스승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녀의 아버지 유병언은 국자감의 감승일 뿐이지만, 학식도 뛰어나고 바둑도 제법 잘 두었다. 유 귀인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바둑 솜씨가 뛰어났다. 묵용린과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묵용린은 사실 대충 둘 생각이었다. 시침 들 미인을 불러다 놓고 어찌 진지하게 바둑을 둘 수 있겠는가. 그는 그저 몇 수 받아 주며 바둑알을 쥔 유 귀인의 손을 힐끔거렸다. 바둑을 핑계 삼아 조금씩 접근하려 했다. 손을 쓰다듬는 것부터 시작해서 별 반응이 없거든 그녀를 품에 안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진행하다 보면 분명 자연스럽게 흘러갈 터.
미인의 손은 매우 아름다웠다. 가늘고 긴 손가락에 쥐어진 검은 돌 덕분에 그녀의 손은 더욱더 하얗게 보였다. 그녀는 쉽사리 바둑알을 두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그녀의 손을 잡아 보려 했지만, 용기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손을 내밀지 못했다. 두 사람은 승부가 결정될 때까지 단정하게 마주 앉아 순수하게 바둑만 두었다.
* * *
이튿날, 황제가 유 귀인에게 선물을 잔뜩 내리는 바람에 사희는 정원에 서서 선물 목록을 한참 동안 낭송해야 했다. 모두가 유 귀인이 황제의 시침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양 귀인과 장 귀인은 부러움에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선물 때문이 아니라 황제의 눈에 들었다는 게 가장 부러웠다.
유 귀인은 얼떨떨했다. 그녀는 어젯밤 황제와 바둑을 두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기록을 남긴 것도 모자라 이렇게 많은 상까지 내리다니? 감사 인사를 전한 그녀는 사희를 빤히 바라보며 망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