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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64)화 (1,064/1,192)

제1064화

사 주인장의 사나운 성향은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태상황에게마저 도전적이던 사람이니 분명 이번에도 황상을 찾아와 소란을 피울 것이다.

하지만 황상은 태상황과는 다르게 그 누구의 체면도 신경 써 주지 않았다. 그러다 정말 그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양쪽 모두에게 손해인 결과를 야기하게 될 터.

이게 끝이 아니었다. 태상황이 황상에게 사봉봉을 황후로 들이라고 한 이유를 그녀도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 만약 정말 소란이 커져서 사가 상점을 잃는다면, 그야말로 사소한 일로 엄청난 걸 잃는 셈이었다.

또한 굳이 이 일의 잘잘못을 가리자면 책임은 황상에게 있었다. 여인을 이렇게 곤궁에 빠트리다니. 품위를 잃으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법이지만, 위풍당당한 황제의 체면을 어찌 구길 수 있겠는가. 월규는 방에 있는 이들을 훑으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기록된 이상 시침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들 알아들었느냐? 만약 밖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거든, 그자는 살가죽이 남지 않을 것이다.”

월규는 황제를 모시는 사람인데다 궁에서 가장 높은 여관이기에 그녀의 말이라면 감히 거역할 이가 없었다.

그러나 사봉봉은 조금 불쾌했다.

“고고, 그건 오히려 제 명성을 먹칠하는 거예요. 그런 일이 없었는데, 기어이 그렇다고 하다니요.”

월규는 다른 이에겐 정색했지만, 사봉봉은 잘 타이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사봉봉이 굳이 분쟁을 만들고 싶어 하지는 않는, 사리에 밝은 사람인 것을 알았다. 그녀는 궁인들을 다 내보낸 뒤 사봉봉의 손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마마, 황상께서 기록하라고 하신 건 그런 의도로 하신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마마께서 당직을 선 게 사 주인장 귀에 들어가면 어찌 되겠어요? 그분의 성격은 소인보다 마마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태상황께도 덤비던 분이시니 이번에도 황상께 찾아오시겠지요. 하지만, 황상께서는 태상황과는 다르십니다.”

사봉봉은 월규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고민이 되었다. 사앵앵의 성격을 그녀가 어찌 모를까. 지금은 아버지도 안 계시니 어머니를 말릴 사람이 없었다. 정말이지 그 소식을 듣고 황궁까지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폭탄 같은 사앵앵의 성질만큼은 그녀도 무서웠다.

그리고 어쨌든 이미 묵용린에게 시집온 몸이니 그와 함께 자는 게 비정상적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록 묵용린과 동침하는 상상만으로도 그녀는 몸이 덜덜 떨렸지만, 그저 허울뿐인 가짜 기록이니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고민 끝에 사봉봉은 월규에게 말했다.

“고고 말대로 할게요.”

월규가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마마께서 큰 도리를 위해 이러신다는 거 잘 압니다. 황상께는 소인이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록이 하루빨리 현실이 되도록…….”

당황한 사봉봉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끊었다.

“고고, 제발 그러지 마시어요. 황상께선 절 싫어하십니다. 괜히 가서 미움을 사고 싶지 않습니다. 어쨌든 귀비와 숙비도 있으니 그들이 정성껏 황상을 섬길 것입니다.”

월규가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은 이미 한 식구가 되셨는데 어찌 황상께서 마마를 싫어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태상황께서야말로 태후 마마를 못 미더워하셨습니다. 두 분이 막 혼인하셨을 때, 태후께서는 태상황만 보면 멀리 도망치셨지요. 또한 태상황께서는 태후 마마만 보면 눈을 부릅뜨고 성을 내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애처가가 되셨고, 태후 마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되셨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마마와 황상께서도 그렇게 되실 것 같습니다.”

사봉봉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건 그저 월규 혼자만의 바람일 뿐이었다. 태상황은 흉악해 보여도 사실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지만, 묵용린은 뼛속까지 냉혈한이었다.

그녀는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행복과 맞바꿔 사가 상점과 가족들의 평안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 * *

월규는 봉명궁을 나와 곧장 승덕전으로 향했다.

묵용린은 조회를 마치고 돌아온 뒤, 서재에서 상주서를 보고 있었다.

월규가 차를 우린 뒤 조용히 책상 모퉁이에 찻잔을 내려놓자, 묵용린은 곁눈질로 그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이런 일을 고고가 한단 말인가. 아랫것들이 요즘 혼이 나지 않아 몸이 근질근질한가 보지?”

월규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소인은 황상께 차도 우려 드리지 못한단 말입니까. 황상께서 이것마저 못 하게 하시면 소인은 조만간 심심해 죽을 것입니다.”

묵용린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어찌 쓸데없이 그런 말을… 고고 나이면 아직 한창인 것을.”

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몸은 좀 나아졌는가.”

묵용린을 아기 때부터 돌봐 온 월규는 그를 줄곧 아이라 여겼다. 황제가 된 그는 성격도 차분했고 말투 또한 애늙은이 같았지만, 그녀의 귀에는 여전히 아이가 말한 것처럼 들렸다.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기도 했다. 자라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아이인 만큼, 지금 그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별일 아니었습니다. 며칠 약을 먹고 쉬니 싹 나았습니다.”

묵용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듣자니 노 의정이 고고에게 식단을 적어 주었다던데?”

“예, 몇 가지 적어 주더군요.”

“노 의정은 마음이 세심한 사람이지.”

“의원이라는 사람이 세심하지 않으면 어찌하겠습니까?”

묵용린이 붓을 내려 두고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고고, 노 의정은 어떠한가?”

월규가 모르는 척 대꾸했다.

“의술이 나쁘지 않던 걸요.”

“짐은 사람이 어떠냐고 묻는 것이네.”

월규는 계속 모르는 척 잡아뗐다.

“인품도 괜찮다고 들었습니다.”

묵용린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고고와 잘 맞을 것 같은가?”

월규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제법 침착하게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소인은 제 손으로 머리를 올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마음은 이미 접은 지 오래입니다. 황상께서도 소인 때문에 괜히 마음 쓰지 마시어요.”

묵용린은 그녀가 혼자인 게 마음이 쓰였다.

월규에 대한 그의 감정은 각별했다. 월규는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백천범과 함께 늘 그를 돌봐 주었다. 남원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유일하게 월규만 따랐고, 밤이면 그녀와 함께 잠을 잤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그와 월규는 단순한 주종 관계가 아니라 가족 같은 사이였다.

특히 백천범이 강남으로 간 이후, 그는 갈 곳 없는 효심을 월규에게 쏟았다. 몇 년 사이에 월규의 몸은 예전과 달리 많이 쇠약해졌다. 그가 늘 신경 쓰고 있긴 해도 가까이서 그녀를 돌봐 줄 사람을 찾아 주고 싶었다. 마침 노낙원은 의원인데다 월규보다 세 살 더 어렸고 성격도 좋으니, 월규를 노 의정 손에 맡기면 그나마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고고, 아직도 그자를 기다리는 것인가?”

월규가 고개를 저었다.

“소인이 누굴 기다렸다고 그러십니까?”

한참 어린 사람과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역시나 조금 민망했다. 그녀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소인, 방금 봉명궁에 다녀왔습니다.”

봉명궁이라는 말에 묵용린은 순식간에 웃음기를 거두었다.

“소인이 마마께 백봉오계탕을 끓여 드렸습니다.”

묵용린은 굳은 얼굴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백봉오계탕이 무얼 뜻하는지 그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월에서는 여인이 처음 관계를 가졌을 때, 살뜰한 시가라면 보통 백봉오계탕을 끓여 보양을 해 주었다.

그도 월규가 아무런 까닭도 없이 이런 얘기를 하진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조금 불편했다.

역시나 월규가 웃으며 그가 예상했던 말을 꺼냈다.

“황후 마마께서 어젯밤 시침을 든 게 아니라고 하시더군요. 시침을 하지 않았는데도 문서에 기록이 남았던데… 설마 경사방에서 잘못 안 걸까요?”

묵용린이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짐이 기록하라고 했네.”

월규가 말했다.

“소인도 황상께서 황후 마마의 체면을 생각하여 그리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묵용린은 사봉봉이 아니라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 그런 것이었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그가 밤중에 황후를 불러 당직을 세운 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노골적으로 황후를 업신여겼다며 그의 명예가 실추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경사방에 시침 기록을 남기라고 분부했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대혼을 치렀는데도 문서에 남은 기록은 거의 없으니 괜스레 뭇사람들의 의심을 살 것 아니던가?

월규가 말했다.

“황상께서는 좋은 마음이셨겠지만, 실은 빈 기록일 뿐이지요. 어쨌든 두 분은 부부시니 황상께서 여유가 있으실 때 보완해 주시면 됩니다.”

묵용린은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월규는 그 눈빛에 민망했다.

“소인, 황상의 규방 일에 관여하려는 게 아니라 태후께서 계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아서…….”

그녀가 백천범을 언급하자 묵용린은 곧장 두 눈을 내리깔고 감정을 숨겼다. 백천범은 사봉봉을 좋아하니 그녀가 억울한 일을 당하게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럴 마음도, 능력도 없었다…….

“그래.”

그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짐도 알고 있네.”

목적을 이룬 월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예를 갖춘 뒤 물러났다.

월규가 떠난 후, 묵용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대혼도 그의 말 못 할 병에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의 희망이었던 허설령조차 소용없게 되었으니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방법을 찾지 못할 땐 차라리 한쪽으로 치워 버리는 게 나았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 그러나 그를 떠보러 온 월규를 떠올리니, 이 일을 해결하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규는 그의 병을 알지 못했다. 월규를 가족처럼 여기기에 그는 그녀에게 털어놓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대혼을 올렸으니 규방에서의 일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황제지, 시정 백성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사생활이라는 게 없었다. 그에겐 군왕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자손을 기대했다. 월규는 그 무리에서 선두에 서 있는 장수나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머리가 아파 왔다. 한참 동안 넋 놓고 있던 그는 목청을 높여 사희를 불렀다.

“가서 진왕야를 모셔 오너라.”

진왕은 정오가 되어서야 찾아왔다. 마침 승덕전에 어선을 차린 덕에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황제가 진왕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걸 알기에 왕장량은 대전 안에 있는 이를 전부 다 내보냈다. 그와 사희만이 한쪽에 서서 시중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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