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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63)화 (1,063/1,192)

제1063화

한 사람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차분해 보였고 다른 한 사람은 눈을 날카롭게 뜬 채 상대를 바라보고 있으니, 분위기는 실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사봉봉은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모를 리 없었다.

묵용린은 화를 내지 않아도 제법 위엄이 풍겼지만 사봉봉은 그의 기세에 전혀 영향을 받는 것 같지 않았다. 결계라도 치고 있는 듯싶었다. 한밤중에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이란 말인가. 그는 별안간 무기력해졌다.

“되었소. 그만 돌아가시오.”

사봉봉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묵용린이 이렇게 빨리 돌려보낼 줄은 몰랐다. 날이 밝을 때까지는 돌아가지 못할 줄 알았는데…….

묵용린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자야겠으니 그만 돌아가시오.”

그는 그녀와 달리 내일도 아침 일찍 조정에 나가야 했다. 듣자니 황후는 귀마마가 봉명궁에 와도 개의치 않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잔다고 했다.

사봉봉은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묵용린이 이불을 덮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다시 가까이 다가가 장막을 내려 주려고 하는데, 그가 또 이불을 끌어안고 호통쳤다.

“무슨 짓이오?”

“신첩, 장막을 내려 드리려 합니다.”

“필요 없소.”

묵용린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건 할 사람이 따로 있으니 어서 돌아가시오.”

사봉봉은 결국 조용히 물러났다. 복도로 나오자 금천아가 기둥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다가가 금천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천아, 가자.”

금천아는 곧장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조용히 물었다.

“괜찮으세요?”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

사봉봉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황상 곁을 잠시 지킨 것뿐인데.”

금천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부당한 일만 없었으면 그걸로 되었습니다.”

사봉봉이 나무라듯 그녀를 힐끗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런 일은 당연히 없었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녀는 조금 의아했다. 묵용린이 그녀를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서워할 만큼 싫어하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니던가…….

* * *

사봉봉은 다음날 늦은 아침에 일어났다. 눈을 뜨니 금천아가 곁에 서 있었다. 그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오늘은 귀마마 안 오셨어?”

금천아가 장막을 걷어 고리에 묶었다.

“오늘은 안 오셨습니다.”

경화가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오늘부터 더는 예법을 배우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봉봉은 흠칫 놀랐다. 묵용린이 무슨 까닭으로 저런 명을 내렸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녀로선 좋은 일이었다.

다만 어젯밤 그녀가 승덕전에 불려 갔던 일이 온 황궁에 퍼졌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황후 마마가 어젯밤 시침을 들었다는 소문이 쫙 퍼진 것이다.

그 소문을 들은 허 귀비는 마시고 있던 차를 뿜고 말았다. 금령은 서둘러 수건을 들고 그녀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마마,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겨우 시침이 뭐 그리 대수라고요. 대혼 날 밤 황상께서는 마마의 침전을 찾아 주지 않으셨습니까. 황상께서 마음이 여리시어 황후의 체면을 어느 정도 살려 주려 하신 것이겠지요.”

허설령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 아버지 말로는 사봉봉의 지위가 온전치 못하다고 했다. 한데 어젯밤 황상의 시침을 들었다면 그녀가 먼저 황손을 잉태할 가능성이 높았다. 황후인 사봉봉이 만약 남자아이를 낳는다면 바로 태자가 될 테고 그러면 자신은…….

“마마, 마마.”

금령은 허설령의 안색이 좋지 않자 서둘러 위로의 말을 전했다.

“시침 한 번으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따져 보면 마마보다는 늦은 순번이니 마마의 체면이 훨씬 더 높으시지요. 게다가 황상과 마마께서는 서로 감정도 통하셨으니 조만간 황상께서 다시 마마를 찾으실 겁니다.”

노골적인 그녀의 말에 허설령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부끄러움에 괜히 성질을 부리며 말했다.

“입조심하거라. 어디서 그리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래도 금령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마마,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면 봉명궁으로 찾아가 황후 마마를 살짝 떠보는 건 어떠신지요? 예법대로라면 대혼 후 매일 봉명궁에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문안 인사를 올리지 않으셔도 황상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니 황후도 어쩔 도리가 없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자발적으로 나서 보는 겁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허설령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매일 봉명궁에 문안 인사를 가야 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혼 날 밤 있었던 일 때문에 그녀는 일부러 사봉봉을 찾아가지 않았다. 사봉봉의 반응을 보면 괜히 마음이 불쾌할 것 같아서였다.

그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황후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게 증명된 것이다. 허설령은 그렇게 그동안 빤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자신만의 특권을 누려 왔다. 하지만…….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그쪽도 문안을 드리러 가지 않는다더냐?”

그녀가 말하는 그쪽은 숙비를 뜻했다.

좌상과 우상은 겉으로 보기엔 매우 친했지만, 사적으로는 상대하는 일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좌상이 우위를 점했기에, 그녀는 우상부의 적장녀 송교宋皎에게 일종의 우월을 느꼈다. 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황후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귀비가 되었으니 송교보다는 좀 더 나은 셈이지만, 백성들 눈에는 두 사람 모두 첩실이라 딱히 우열을 따질 게 못 되었다.

금령이 말했다.

“숙비는 가긴 갔습니다. 하지만 봉명궁 사람이 더는 오지 말라고 했다더군요. 황후 마마께서 늦게 일어나니 앞으로 문안 인사는 하지 말라고요. 그래서 숙비도 더는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허설령은 미간을 찌푸렸다. 숙비도 가지 않는다니… 그녀의 특권이 조금 우스워졌다. 그녀는 손가락에 낀 호갑투를 만지작거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황후를 반드시 보러 가야만 할 것 같았다.

* * *

사봉봉은 허 귀비가 왔다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곳엔 무슨 일로?”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데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그녀는 경화에게 고개를 까닥하며 말했다.

“귀비를 안으로 모시거라.”

안으로 들어온 허설령은 사봉봉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신첩, 황후 마마께 문안드립니다.”

“그리 예를 차릴 것 없어요.”

사봉봉이 찻잔을 쥔 채 차분하게 미소를 지었다.

“귀비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나요?”

허설령은 좌상의 천금인 반면, 사봉봉은 일개 상인이었기에 그들의 지위는 천지차이였다. 비록 사봉봉의 아버지, 사장풍이 장군이긴 했으나 지금은 서북에 있으니 허설령이 우월하다고 느낄 만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그녀는 결국 사봉봉보다 아래였다.

허설령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줄곧 공손한 미소를 지었다.

“마마께서 어젯밤 고생하셨으니 신첩이 특별히 주방에 백봉오계탕白鳳烏鷄湯을 끓이라고 분부하여 마마께 가져왔습니다.”

사봉봉은 그녀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본궁이 어젯밤 고생을요?”

“예.”

허설령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어젯밤 마마께서 승덕전에 가셨으니 당연히 고생이 많으셨을 테지요.”

사봉봉은 그제야 그녀의 의도를 깨달았다. 허설령은 지금 상황을 정탐하러 온 것이었다. 사봉봉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황상을 섬기는 것은 본궁의 본분인 것을요. 고생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허설령은 그녀가 인정하는 듯하자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금세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듣자니 한밤중에 처소로 돌아오셨다면서요. 황상도 참… 그리 늦었는데 아예 마마를 승덕전에서 쉬게 해 주지 않으시고요.”

“본궁은 잠자리를 가리는 탓에 낯선 곳에서 자는 게 익숙지 않아요. 돌아오는 게 더 좋습니다.”

허설령은 황후가 도중에 돌아온 이유를 알아내지 못하자 초조해졌다. 하지만 제대로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몇 마디 인사치레를 한 뒤 발걸음을 돌렸다.

금천아가 허설령이 두고 간 계탕을 가리키며 물었다.

“마마, 이 탕은 어찌합니까?”

“네가 먹어.”

금천아가 허리를 숙여 냄새를 맡았다.

“이상한 걸 섞은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 없어. 그렇게까지 우둔하진 않을 거야.”

사봉봉이 말했다.

“먹기 싫으면 다른 이에게 상으로 줄게.”

금천아는 두말 않고 사발을 들어 곧장 들이켰다. 단번에 반 그릇을 마셔 버린 그녀는 딸꾹질까지 하며 흐뭇해했다.

“정말 신선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월규도 탕을 가져왔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사봉봉을 바라보았다.

“마마, 소인이 백봉오계탕을 가져왔습니다. 뜨거울 때 드시지요.”

사봉봉은 이 역시 조금 의아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하나둘 찾아와 백봉오계탕을 대령하다니. 하지만 허 귀비의 것은 먹지 않는다 해도 월규의 마음을 거절할 수는 없었기에 사봉봉은 한 숟갈 떠먹었다.

“고고, 어쩐 일로 탕을 끓여 오신 거예요?”

“이 탕은 몸을 보양하는 데 아주 좋습니다. 듣자니 어젯밤 고생이 많으셨다고요.”

월규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마마께서 하루빨리 황상께 태자를 안겨 드리는 것이 올바른 도리일 테지요.”

“풉!”

그 말에 그만 사봉봉은 탕을 내뿜고 말았다. 그녀는 그제야 허 귀비가 탕을 끓여 온 이유를 제대로 깨달았다. 허 귀비와 월규 모두 그녀가 어젯밤 황상의 시침을 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고, 오해입니다.”

사봉봉은 경화가 건넨 수건을 받아 입을 닦은 뒤 말했다.

“고고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요. 시침을 들지 않았습니다.”

월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미 궁 안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제가 직접 경사방敬事房(내무부에서 황제의 침방 업무를 돌보던 곳) 사람한테도 물어보았고요. 그자 말이, 마마의 시침을 기록해 두었다고 하던데요.”

사봉봉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야간 당직도 기록을 한단 말이에요? 잘못 안 게 아니고요?”

월규가 물었다.

“마마, 야간 당직이라니요?”

“황상께서 어제 야간 당직을 서라고 부르셨습니다. 한밤중까지 곁을 지키다가 돌아왔고요.”

사봉봉이 말했다.

“못 믿으시겠으면 왕 총관한테 물어보세요. 그자도 같이 있었으니까요.”

“…….”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월규는 날아갈 듯 기뻤다. 부부가 마침내 하나가 되었으니 다시는 원수 사이가 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동침이 아니라 당직이라니.

세상에 황후에게 당직을 서게 하는 황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경우는 지금까지의 왕조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만에 하나 이 일이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황상이 황후를 업신여긴다는 얘기가 파다하게 퍼질 것이었다. 그러다 사앵앵이 알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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