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2화
묵용청양은 살짝 어깨를 움츠렸지만 물러나진 않았다. 그녀 또한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전 황형을 조금 일깨워 주려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예요? 봉봉처럼 좋은 여인이 어디 있다고. 아무리 그녀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게 업신여기면 안 되죠. 봉봉이 다른 이한테 시집갔다면 분명 부군의 은애를 듬뿍 받았을 거예요!”
묵용린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묵용청양 앞으로 불쑥 다가가며 말했다.
“부군이라니! 그 애는 짐에게 시집왔다. 짐이 그 애의 부군이란 말이다. 어디 한 마디만 더 해 보거라, 네가 장공주든 아니든 짐은 널 벌할 테니까! 어서 썩 물러나지 못할까!”
부군은 무슨 뒈질 놈의 부군……. 묵용린은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으며 이를 갈았다.
그때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왕장량과 사희가 서둘러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사희는 묵용청양을 밖으로 끌고 가며 타일렀다.
“장공주 전하, 노여움 푸십시오. 황상께서는 황후 마마를 업신여기신 게 아닙니다. 마마는 정말 잘 지내고 계십니다. 정말입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내일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십시오…….”
왕장량은 묵용린을 구슬렸다.
“황상, 노여움 푸십시오. 장공주 전하는 아직 어리십니다. 전하께서는 그저 황상을 위하는 마음으로…….”
한바탕 성질을 부리던 묵용린은 그제야 냉정을 되찾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또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분명 사봉봉이 묵용청양에게 무슨 말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저 간 큰 웬수가 달려와 그를 꾸짖는 것일 터.
불의를 보지 못하는 그녀가 사봉봉을 대신해 그에게 갚아 주는 것일 테다. 자신의 여동생인데, 그가 그걸 모를까.
그는 엄한 정기 마마를 보내 사봉봉에게 예법을 배우게 했지만, 그의 생각과 다르게 사봉봉은 이를 고역이라고 여기기는커녕 매우 잘 지내고 있었다. 마치 있는 힘껏 날린 주먹이 목화솜에 파묻힌 것 같았다. 영 힘을 쓰지 못한 느낌에 기분이 적잖이 찝찝한 상태였다. 그녀와 싸울 정력이 없어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묵용청양을 움직이게 만들 줄이야.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천천히 소매를 걷고 매서운 눈빛으로 벽 모퉁이에 놓인 구리 향로를 바라보며 분부했다.
“가서 황후를 데려오너라.”
왕장량이 잠시 주저하며 말했다.
“황상, 시간이 너무 늦어 황후 마마께서도 이미 침소에 드셨을 것입니다.”
묵용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왕장량은 서둘러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소인이 바로 가 보겠습니다.”
사봉봉은 이미 잠이 든 후였다. 그녀는 금천아가 깨우는 소리에 비몽사몽 물었다.
“몇 시진이야?”
금천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는데… 황상께서 마마를 부르십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모르겠습니다. 소식을 전해 온 공공 말로는 그저 마마를 불러오라고만 하셨답니다.”
경화는 쪼그려 앉아 사봉봉에게 신발을 신겨 주며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마마를 찾으시는 걸 보니 분명 시침을 들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사봉봉은 순간 발을 움츠렸다.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건 무섭지 않았지만, 이것만큼은 두려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묵용린과 자야 한다고?! 이보다 더 공포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경화는 그런 사봉봉의 반응을 보고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사봉봉은 원치 않는다는 듯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마마, 아직도 황상께 화가 나신 겁니까? 대혼 날 밤, 황상께서 찾아오시지 않은 일로 마마께서 상처를 받으셨겠지요.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황상께서 마마를 불러 주셨으니 이만 황상과 화해하시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시답잖은 말 따위는 걱정되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쑥덕대는 걸 즐기거나 무료함을 날려버리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의 입까지 막을 수는 없기에, 사봉봉은 그런 시답잖은 말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는 황후고, 그녀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황제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황제를 떠올린 그녀는 다시 신발을 제대로 신었다. 그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묵용린에게 그 어떤 꼬투리도 잡혀선 안 되었다.
그녀는 옷을 갖춰 입고 머리카락은 대충 묶어 뒤로 늘어뜨렸다. 그리곤 경화와 경옥이 단장을 해 주겠다는 걸 거절하고선 묵용린이 있는 승덕전으로 향했다.
금천아는 걱정이 되었다.
“마마, 황상께서 정말 시침을 들라 하시면 어찌합니까?”
“그럴 리 없어.”
사봉봉이 말했다.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니까.”
금천아는 사봉봉이 크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녀를 두둔했다.
“그건 황상께서 보는 눈이 없으니까 그렇죠.”
사봉봉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담담했지만 경고가 담긴 눈빛이었다.
금천아는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닫고 잠시 구시렁거리다 곧 다물었다. 사봉봉은 부인과는 달랐다. 부인은 화를 내어 아랫사람들을 다스렸지만 사봉봉은 화가 났을 때도 침착했다. 그리고 그런 평온함이 오히려 더 위협적이었다. 그녀가 담담한 얼굴로 쳐다볼 땐 알아서 눈치껏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승덕전에 도착한 뒤, 금천아는 문밖에 대기하고 사봉봉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오자 묵용린은 예민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얇은 옷차림에 느슨하게 묶은 머리카락까지… 소박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황후가 이런 차림으로 짐을 알현한단 말이오?”
사봉봉이 해명했다.
“신첩, 이미 침소에 든 상황이었습니다. 황상께서 신첩을 찾으신다는 말은 들었으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기에 차마 늦게 나올 수 없었습니다. 만약 신첩의 이런 모습이 불쾌하시다면 단장한 뒤 다시 오겠습니다.”
묵용린은 조금 짜증이 났다. 그녀는 언제나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침착하게 말해서 꼬투리를 잡을 만한 게 없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소.”
그가 말했다.
“어쨌든 야간 당직을 서는 것뿐이거늘. 밤이 어두우니 보이지도 않을 테고… 그냥 이대로 있으시오.”
사봉봉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제가 자는 동안 황후더러 당직을 서라니.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는 분명 일부러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꾸 없이 고개를 숙였다.
“신첩, 황상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녀는 온순한 양처럼 황제의 뜻을 받아들였다.
묵용린은 울화를 삼키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침상에 누웠다. 분수도 모르는 여인이니 저리 서 있으라지.
왕장량은 야간 당직을 선 황후를 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했다. 황제는 평소 시비를 분명히 따졌고 옹졸하게 행동하는 법이 없었지만, 황후에게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이번 일 또한 장공주 전하께서 황후 편을 들자 그 화를 황후에게 푸는 것이었다. 이미 침소에 든 황후를 기어이 데려와 당직을 세우는 것은 평소 그의 어른스러운 모습에 비해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쭉 내밀고 암흑 속에 서 있는 사봉봉을 바라보았다. 황후는 어린 나이임에도 황상보다 더 침착했다.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얼굴만 봤을 땐 전혀 화가 나지 않은 것 같았다. 곁눈으로 용상 앞에 드리운 장막이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황후는 화를 내지 않고도 황상을 화나게 했다.
* * *
한밤중에 잠에서 깬 묵용린이 바깥에 대고 소리쳤다.
“물 한 잔 떠오너라.”
장막 너머에서 가볍게 대꾸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세 잰걸음 소리가 침상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곤 누군가 장막을 살짝 걷고 불쑥 들어왔다.
묵용린은 가만히 누운 채 한 손을 이마에 얹고 베갯머리에 켜져 있는 등불을 가렸다.
“황상, 물을 가져왔습니다.”
그 목소리에 묵용린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는 벌떡 일어나 벽에 몸을 딱 붙이고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렸다. 평소 여인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도 익숙지 않았는데, 거기에 그가 극도로 싫어하는 여인 앞에서 구토라도 한다면 그의 체면이 어찌 되겠는가? 그가 성을 내며 물었다.
“어찌 이곳에? 여기서 무얼 하는 것이오?”
사봉봉도 그의 반응에 화들짝 놀랐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황상, 잊으셨습니까? 황상께서 신첩에게 당직을 서라고 하셨습니다.”
묵용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억을 되짚었다. 분명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사봉봉이 이렇게나 말을 잘 들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곁을 지키고 있었을 줄이야. 문득 그래도 황후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건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 묵용청양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또다시 그를 찾아와 소란을 피울 터.
조금 죄책감이 들다가도 방금 그녀 때문에 놀랐던 일을 떠올리면 또다시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래, 그녀에 대한 죄책감은 방금 자신을 놀라게 한 것과 맞바꿨다고 치자.
그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잔을 내려놓으시오.”
사봉봉은 그 말대로 그의 머리맡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묵용린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장막을 걷고 멀찍이 서 있으시오.”
사봉봉은 그의 분부대로 움직이긴 했지만 조금 의아해했다. 중의만 입은 황제가 벽에 붙어 있는 모습은 꼭… 그가 그녀를 무서워하는 것만 같았다.
묵용린은 찻잔을 들고 몇 모금 들이켰다. 조금씩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후, 졸리지 않소?”
“신첩은 졸리지 않습니다.”
“속으로 짐을 욕하고 있소?”
“신첩이 어찌 감히 폐하를 원망하겠습니까.”
묵용린은 여전히 잠잠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한참 동안 화를 억누른 뒤 입을 열었다.
“어찌 이런 이름을 지었단 말이오? 봉봉이라니… 게다가 성은 사씨고. 이어 말하면 시분屎盆(요강)과 발음이 비슷하지 않소. 황실의 권위에 먹칠하는 이름이 아닐 수 없군.”
사봉봉이 말했다.
“신첩이 어찌 감히 황실의 권위에 먹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애당초 신첩은 감히 오르지 못할 곳이라고 말씀드렸지만 황상께서 기어이 신첩을 황후로 맞으시겠다기에, 황상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슬쩍 책임을 그에게로 돌렸다. 황실에 먹칠을 하는 것은 큰 죄지만, 절대 그녀의 본의는 아니란 의미였다.
묵용린은 화를 억누르려 애썼다.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