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1화
판등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대장이 남동생을 희롱하는 겁니까?”
영안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훑고는, 다시 시선을 옮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제갈이 말했다.
“엥, 대장이 남동생과 가 버렸습니다.”
그 말에 다시 고개를 돌린 영안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판등이 말했다.
“보아하니 그냥 남동생이 아닌 것 같습니다. 키도 대장보다 머리 하나 더 있고 생긴 것도 제법 늠름하던걸요? 이렇게 보니 둘이 제법 잘 어울립니다.”
“하하.”
영안은 그 말에 웃어 보였다.
“안 형, 그 웃음은 무슨 의미입니까?”
“황청양의 속은 사내라니까. 그 애가 정상적인 사내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럼 어떤 사내를 찾을 것 같은데요?”
그 물음에 영안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껏 전혀 생각해 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묵용청양이 평생 신랑감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여인의 탈을 쓰고 있지만 속엔 사내가 들어 있는데 어찌 신랑감을 찾겠는가?
* * *
묵용청양은 사금언과 주루를 나왔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들은 잠시 거리를 거닐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묵용청양이 길가의 작은 주루 앞에 켜진 등롱을 바라보았다. 일렬로 이어진 등롱 세 개에 각각 하나씩 글자가 적혀 있었다.
“청이각…….”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사금언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우리 잠깐 여기서 시간 좀 때우다 갈래?”
사금언은 그녀의 제안에 화들짝 놀랐다. 그는 묵용청양이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잘 모른다고 생각해 특별히 설명을 덧붙였다.
“여긴 점잖은 곳이 아닙니다.”
“누가 그래?”
묵용청양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영안도 가는 곳인데… 우리가 못 갈 게 뭐야.”
그녀 주위에 영안처럼 올곧은 이가 없는데 말이다.
청이각 내부엔 붉은 등롱도, 야시시한 벽화도 없었다. 그저 하얀 벽에 갈색 기둥, 평범한 탁자와 의자로 퍽 소박해 보일 뿐이었다.
대청 중간 기둥에 걸려 있는 등롱에선 주황색 불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떤 이는 홀로, 어떤 이는 벗과 함께 앉아 조용히 술을 마시며 음악만 들을 뿐, 누구도 떠들썩하게 떠들지 않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한 미인이 무대에서 고금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금언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구성진 노랫소리에 맞춰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춤도 볼 수 없었고, 사내들이 여인을 희롱하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물론 눈살이 찌푸려지는 장면도 없었다. 오히려 다루보다 더 조용한 것 같았다.
그들을 맞이한 젊은 점원이 적당한 미소를 지으며 우선 묵용청양을 한번 빠르게 훑어보더니 사금언에게 물었다.
“두 분께선 아래층에 앉으시겠습니까? 아님 위층 별실로 가시겠습니까?”
묵용청양은 위를 바라보았다. 이층에는 작은 별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난간에 기대 술을 마시면 더 편안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사금언은 이런 곳이 처음이었기에 혹여나 그를 본 누군가가 사앵앵에게 말할까 봐 걱정되어 서둘러 대꾸했다.
“우린 별실로 가겠네.”
점원은 그들을 위층으로 안내했다.
작은 방인 줄로만 알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벽 한쪽에 침상이, 다른 한쪽에는 장롱과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손을 씻을 수 있는 대야도 보였다. 또한 팔선상 주위로 의자 네 개가 둥글게 배치되었으며, 대청을 바라볼 수 있는 방향엔 작은 병풍이 자리했다. 그 때문에 난간 아래를 보려면 병풍을 돌아가야 했다.
점원은 그들이 방 안을 둘러보는 걸 보며 물었다.
“두 분께서 마음에 안 드시거든 다른 곳을 보여 드릴까요?”
묵용청양이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이곳이면 되네. 술을 가져올 필요는 없고 다과나 좀 주게.”
그러자 점원은 금세 다과를 차려 주곤, 직접 차를 우려내어 찻잔에 따랐다.
묵용청양은 차를 내려 주던 점원에게 물었다.
“여기 안월이라는 여인이 있다던데… 오늘 밤에 나오는가?”
점원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연주하는 여인이 안월입니다. 매일 밤 안월의 연주를 들으러 오는 손님들이 제법 많지요.”
묵용청양은 점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난간으로 다가가 안월이라는 여인을 유심히 살폈으나,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어서 반쪽만 겨우 볼 수 있었다.
묵용청양은 난간에 기대 안월이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월은 마치 잔물결이 일렁이는 것처럼 가볍게 손목을 움직여 현을 튕겼다. 그녀의 연주는 마치 따스한 봄날, 깊은 골짜기의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같기도, 또 산속에 이는 맑은 바람이 주변을 에워싸는 소리 같기도 했다…….
대청의 손님들도 모두 조용히 그녀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한참 동안 연주를 하던 안월은 잠시 고개를 들고 입술을 살짝 들썩이며 곡조를 읊조렸다. 그 순간, 묵용청양은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휘영청 밝은 달처럼 성스러운 빛을 머금은 그녀의 얼굴은 대청을 삽시간에 밝혔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대청 곳곳에서 나지막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저들도 묵용청양처럼 안월 때문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안월……. 과연 달빛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여인이었다.
묵용청양은 그녀의 성씨를 곰곰이 곱씹었다. 영안의 이름이 그녀의 성이라니… 이는 우연일까 아니면 인연일까?
사금언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군요.”
그러자 묵용청양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썹을 추켜올리며 대꾸했다.
“나랑 비교했을 때 어떤 것 같아?”
“…….”
묵용청양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사금언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정말인지… 사내 같았다.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어디가 다른데?”
사금언은 겨우 결론을 내렸다.
“저 여인은 온화하고 누이는 단단합니다.”
“…단단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아주 굳세다는 뜻이지요. 호탕하고, 의리 있고…….”
그러자 묵용청양은 기분이 조금 가라앉은 듯한 얼굴로 자신의 뺨을 쓸어내렸다.
“이해했어.”
사금언은 그녀가 별로 기뻐하지 않자 서둘러 덧붙였다.
“저는 누이 같은 모습이 더 좋습니다.”
“어째서?”
“강하니까요.”
묵용청양은 그의 말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내들은 고분고분하고 제게 의지하는 여인을 좋아하지 않아?”
“전 싫습니다.”
사금언이 말했다.
“전 강한 여인이 좋습니다.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수 있는 여인요.”
“그럼 나중에 처와 매일 싸울 거니?”
“…….”
묵용청양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미없다. 난 먼저 돌아갈게. 넌 좀 더 있다 가.”
사금언도 서둘러 일어났다.
“저도 이렇게 나른한 건 별로입니다. 차라리 집에 가서 권법 연습을 하고 말죠.”
묵용청양은 그의 말에 까닭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 * *
궁문은 일찍이 잠겼지만, 작은 문은 장공주 전하를 위해 열어 두었다.
묵용청양은 입궁하자마자 곧장 승덕전으로 찾아갔다. 근면 성실한 황형은 분명 아직 취침 전일 테니 그녀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소태감 말로는 이미 침전에 든 뒤라고 했다. 그녀는 또다시 뒷전으로 들어갔다.
목욕을 마친 묵용린은 중의만 입은 채 침상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안으로 쏜살같이 들이닥치는 묵용청양의 모습을 발견한 그가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불쾌한 듯 말했다.
“어찌 한 마디 말도 없이 들어오는 것이냐. 예법이라고는 조금도 지키지 않는구나.”
묵용청양이 말했다.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군신 사이를 유지할 필욘 없잖아요.”
“…….”
군신 간의 예와 시간에 무슨 연관성이 있단 말인가? 그는 참을성을 갖고 설명했다.
“군신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너는 짐의 여동생이 아니더냐? 식구들끼리 예를 갖출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남녀는 유별한 법이다. 남녀칠세부동석도 모르는 것이냐?”
말을 마친 그는 제 말에 스스로 대답했다.
“그래, 넌 모를 테지.”
이 웬수는 자기 자신을 여인이라고 여기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영안과 매일 어울려 다니겠는가?
묵용청양은 이상하다는 눈길로 오라버니를 흘겼다.
“그게 어느 시대 얘기예요. 황형은 왜 이렇게 진부해요? 우리 강호의 여인들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고요.”
묵용린은 머리가 아파왔다. 강호의 여인이라니… 그녀는 아예 자신이 동월의 장공주라는 걸 잊었단 말인가? 그가 물었다.
“환경문에서 지내는 건 어떠하냐?”
“괜찮아요. 재미도 있고요.”
묵용청양이 양해생 사건을 알려 주자 묵용린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런 사소한 사건까지 도맡다니… 영안은 도대체 짐의 환경문을 뭐라 여기는 것이란 말이냐?”
묵용청양은 그가 혹 영안을 질책할까 봐 서둘러 해명했다.
“가 대인의 체면을 봐서 처리해 준 거예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 대인이 현장에 있었거든요. 황형이 가 대인의 따뜻한 마음씨를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묵용린은 코웃음을 치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용청양은 그제야 이곳에 온 이유를 생각해 내고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저는 지금 진지한 일로 황형을 찾아온 거예요.”
묵용린은 여동생이 모처럼 진지하게 굴자 괜스레 궁금증이 생겼다.
“무슨 진지한 일?”
묵용청양은 갑자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황형, 대혼을 했으니 황후의 침전에서 자야 하잖아요?”
“…….”
갑자기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지한 일이라는 게 이것이냐?”
묵용린이 성을 내며 말했다.
“어찌 그리 오지랖이 넓은 것이냐? 이제 하다하다 짐이 누구와 자는지도 간섭하려고?”
그가 성질을 부리자 묵용청양은 살짝 겁이 나서 한 발 물러섰다.
“알겠어요. 황형이 누구랑 자든 상관 안 할게요. 하지만 황후를 업신여기는 건 안 돼요. 부인을 업신여기는 사내를 그냥 내버려 둘 순 없거든요. 아버지를 봐요. 어머니한테 얼마나 잘해 주세요? 황형은 왜 아버지를 안 닮은 거예요?”
“무엄하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묵용린은 그녀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짐이 네게 그런 소리까지 들어야 한단 말이냐? 짐 앞에서 썩 물러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