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9화
양 부인이 욕을 퍼부으려는데, 양해생이 어두워진 낯빛으로 다가와 그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이런 악랄한 여편네… 천여를 그렇게나 괴롭혔다니,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천여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어떻게 그렇게까지 괴롭힌단 말이야!”
양 부인은 얼굴을 감싸며 차마 믿지 못하겠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감히 내게 손찌검을 해? 우리 친정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당신이 오늘날 이 정도 위치에 오를 수 있었을 것 같아? 양해생, 나에게 구혼할 때 뭐라고 했어? 평생 잘해 주겠다며. 그런데 당신은 부귀영화를 얻자마자 첩을 들이기 바빴지. 당신한테 나는 대체 뭐야? 내가 정실로 보이긴 해?”
양해생이 성이 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첩을 들여 대를 잇는 게 뭐가 잘못되었다고? 이 천한 여편네! 마음조차 악랄하여 남을 괴롭힌 걸로도 모자라 목숨까지 해하다니! 영 부문주, 사람을 죽인 죄는 목숨으로 갚아야지요. 이 표독스러운 부인이 정신 나간 짓을 저질렀으니, 부디 영 부문주께서 데려가 처리해 주십시오. 저는 절대 비호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죽인 죄는 목숨으로 갚는다… 그렇다면 배후에서 사주한 자와 살인을 저지른 자 모두 잡아가겠습니다.”
그러자 전자는 양해생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노야, 소인에겐 노야를 향한 충심만 가득한데 소인이 어찌 감히 다섯째 이낭을 살해하겠습니까. 부디 은혜를 베풀어…….”
잠시 머뭇거리던 양해생이 영안에게 말했다.
“전자는 줄곧 저만 따르던 사람이라 저 표독스러운 부인과 손을 잡았을 리 없습니다. 영 부문주, 잘못짚으신 건 아닌지요.”
“저는 이미 조사를 마치고 모든 걸 밝혀냈습니다.”
영안이 말했다.
“전자가 차관에서 몰래 빠져나와 양부로 돌아간 걸 봤다는 이가 많습니다. 게다가 전자는 다섯째 이낭 방에 손자국까지 남겼습니다. 이처럼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절대 잘못짚었을 리 없습니다.”
그 말에 양해생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곧 전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전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바들바들 떨었다.
모든 이들이 넋 놓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때, 양해생이 갑자기 어디서 칼을 뽑아 들고는 번개처럼 전자에게 달려들었다. 전자는 눈을 부릅 뜨고 그대로 쓰러졌다.
하지만, 칼은 그에게 닿지 못했다. 영안이 두 손가락으로 칼을 붙잡은 탓이었다.
그 틈을 타 판등이 양해생의 손목을 힘껏 비틀자 그는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칼을 놓았다. 판등은 칼을 빼앗아 도로 자신의 칼집에 꽂아 넣었다. 환경문의 고수가 다른 이에게 칼을 빼앗기다니! 굴욕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영안이 매서운 얼굴로 양해생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이 노비 놈이!”
전자에게 삿대질하는 양해생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이놈이 나를 배반하여…….”
영안은 양해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쩌면 이자를 죽여 입을 막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요.”
양해생이 즉각 반박했다.
“아닙니다! 이 노비가 천여를 죽였으니 그녀 대신 복수하려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자 영안은 넋이 나가 버린 전자를 가볍게 찼다.
“하고 싶은 말 없습니까?”
멍하니 고개를 드는 전자에게 영안이 말했다.
“주모자와 공범자의 죗값은 다릅니다.”
그 말에 그는 곧장 정신을 차리고 납작 엎드렸다.
“말하겠습니다. 전부 다 말하겠습니다. 노야께서 제게 다섯째 이낭을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호자에게 소란을 붙잡고 있으라고 분부하시어 제가 일을 처리하기 쉽게 도와주셨습니다.”
“허튼소리 지껄이지 말거라!”
양해생이 호통을 내질렀다.
“저 미천한 여편네가 이자를 매수해 날 모함하는 것입니다! 내겐 천여를 아껴 주고 싶은 마음뿐인데… 어찌 그녀를 죽인다는 말입니까?”
전자도 언성을 높였다.
“예, 노야께선 다섯째 이낭을 몹시 아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다섯째 이낭과 유안례가 사적으로 왕래하는 걸 아시곤 줄곧 불만을 품으셨지요. 그러다 그분께서 회임했다는 걸 알게 되자 살해를 결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이 얻지 못하는 건 다른 이도 단념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영안이 물었다.
“다섯째 이낭이 회임한 건 좋은 일이 아닙니까. 노야께선 왜 살의를 품으신 겁니까? 설마 유안례의 아이라고 생각한 겁니까?”
“셋째 부인과 넷째 부인 모두 아이를 낳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문에 노야께서 몰래 의원을 찾아갔는데 의원 말이, 노야의 연세가 많아 더는 자식을 얻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한데 다섯째 이낭은 저택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임하셨습니다. 그러니 노야께선 그 아이가 다른 사람의 자식일 거라고 생각하셔서 살의를 품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건 당일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말해 보십시오.”
“그날, 노야께서는 자신은 현장에 없었다는 증거로 삼기 위해서 일부러 친우분들과 약속을 잡으셨지요. 소인은 측간을 간다는 핑계로 몰래 빠져나와 노야께서 차관 뒷문에 미리 준비해 두신 말을 타고 저택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후원 담벼락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호자와 소란은 방에서 몰래 정을 나누고 있었지요.
전 곧장 다섯째 이낭의 방으로 들어가 부인을 목 졸라 죽인 뒤, 마치 그분이 자살한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차관으로 돌아갔지요. 이게 그날 있었던 모든 일들입니다.”
사건의 진상이 이럴 줄이야. 사실을 듣게 된 사람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유안례가 별안간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어찌나 크게 웃는지, 그는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양해생을 가리켰다.
“제 손으로 혈육을 죽이다니, 하늘이 노할 만도 하지! 나와 천여는 지금껏 청렴결백한 사이였소. 손끝 한번 스친 적 없단 말이오. 천여는 내게 늘 당신의 좋은 점만 말해 줬소. 나이 차이는 조금 나지만, 늘 자신을 아껴 준다고 말이오! 그런 만큼, 그녀는 당신의 아이를 낳아 주고 싶어 했소. 한데 당신은 그런 그녀를 믿어 주기는커녕 그대로 죽여 버리다니!”
그 말에, 양해생은 몽둥이로 힘껏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그는 한참이나 가만히 유안례를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내 아이라고?”
“천여가 얼마나 좋은 여인인데, 당신한테 시집갔으니 당연히 당신 아이를 가지지!”
양해생은 그대로 털썩 주저앉더니 이내 잿빛이 된 얼굴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 아이가…….”
* * *
양부에서 환경문으로 돌아가는 내내, 묵용청양은 평소와 달리 침묵에 잠겨 있었다. 영안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영 낯설어 그녀를 툭 치며 물었다.
“왜 말이 없어?”
묵용청양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믿음이 부족한 건 너무나 나쁜 일이라는 걸 깨달았거든. 부부 사이인데도 믿지 못하면 누굴 믿을 수 있겠어?”
영안이 말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잖아. 앞으로는 사람을 볼 때, 두 눈 똑바로 뜨고 제대로 봐.”
묵용청양이 말했다.
“나중에 부마는 반드시 날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찾을 거야. 온 세상 사람들이 날 나쁘다고 해도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믿어 주는 사람.”
영안이 더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자, 묵용청양이 불만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왜 웃어?”
“그냥… 네가 나중에 좀 실망할 것 같아서.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거든.”
“분명 있을 거야.”
묵용청양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꼭 찾아낼 거라고.”
“못 찾으면?”
“그럼 시집 안 갈 거야.”
묵용청양이 말했다.
“차라리 안 하고 말지! 아무한테나 시집갈 순 없어.”
영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천하의 사내들 대표로 내가 고마워해야겠네.’
그는 훗날 묵용청양의 부마가 될 사람에게 동정을 느꼈다. 그 사람 또한 자신이 어린 시절 그녀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것처럼 호되게 당할 테니 말이다. 그나마 자신은 그녀와 그저 소꿉동무였으니 빠져나갈 길이야 있다만… 부마가 된 자는 평생 공주부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한편 판등은 멀리서 두 사람을 보며 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정말 이해가 안 돼. 안 형이 오늘 왜 저러지? 평소엔 결과만 알리고 곧바로 범인을 잡았잖아. 그런데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의 개요를 설명했어. 늘 과묵하던 사람이 오늘은 나팔이라도 불듯 끊임없이 재잘댔다고. 나도 안 형이 하는 말에 빠져들지만 않았으면 누가 내 칼을 뽑아 가는지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소제갈이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네 실수인데 왜 안 형을 탓해? 안 형이 언제든 경계심을 늦추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냥 흘려들은 거야?”
판등이 화를 내며 그의 손을 치웠다.
“네가 봐도 안 형이 오늘 좀 이상하긴 했지? 평소엔 이렇지 않잖아. 내 눈엔 오늘 안 형이 뭐처럼 보였는지 알아?”
“뭐처럼 보였는데?”
“공작.”
판등이 영안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안 형은 꼭 모든 이들의 관심을 끄는 공작새 같았어. 그것도 날개를 활짝 펼친 공작새. 보니까 대장도 홀린 듯 안 형만 보던데?”
소제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형이 원하던 대로 됐네.”
판등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소제갈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안 형은 대장한테 사건을 조사하는 법을 가르치려는 거야. 이렇게 자세하게 알려 주지 않으면 대장이 이해하겠어?”
판등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네. 하지만 안 형은 대장을 싫어하던 거 아니었어? 근데 지금은 왜 또 가르쳐 주는 거래?”
“왜냐면…….”
소제갈이 그를 힐끔거리며 뜸을 들였다.
“됐어. 어차피 말해도 넌 몰라.”
성이 난 판등은 그를 때리려 했지만 소제갈은 하하 웃으며 영안 곁으로 달려갔다.
“안 형, 사건도 해결했으니 우리 술 한잔하면서 축하나 하죠!”
영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묵용청양이 곧장 대꾸했다.
“좋아, 내가 살게.”
소제갈이 웃음을 터뜨렸다.
“대장은 역시 대장이네. 앞으로 시킬 일이 있으면 말만 하세요. 이 소제갈이 언제든 달려갈 테니까요.”
영안이 코웃음을 쳤다.
“겨우 술 한 번 사는 걸로 그렇게 넘어가는 거야? 지금껏 내가 산 술이 얼만데 왜 난 네가 언제든 달려오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을까?”
소제갈이 시시덕거리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안 형, 형은 우리의 우두머리잖아요. 제가 언제 부르면 안 달려간 적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