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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58)화 (1,058/1,192)

제1058화

대청을 가득 메운 이들은 저마다 다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갑작스러운 호출에 깜짝 놀란 것 같았고, 어떤 이는 황당해 했으며, 심지어 심드렁하게 서 있는 사람도 간혹 보였다. 또, 그저 떠들썩한 소란을 구경하는 듯 잔뜩 흥분한 사람도 있었다.

영안은 뒷짐을 진 채 예리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일일이 훑어보았다. 그러곤 뒤돌아서서 의자에 앉아 있는 양해생과 양 부인을 바라보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직 한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다.”

관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영 부문주, 우리 저택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다 모였습니다.”

영안이 말했다.

“저택 사람이 아니라 제가 초대한 사람 말입니다.”

다들 영안이 무슨 생각인지 몰랐지만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다.

묵용청양은 영안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안례가 들어왔다. 양부의 하인들은 알아서 길을 터 주었고, 그는 당당하게 걸어와 영안에게 읍했다.

영안이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다들 모였으니 시작하겠습니다.”

그가 뒷짐을 지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건이 일어나던 그날, 양 노야와 차관에 갔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인 한 명이 앞으로 나오자 영안은 그를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

“양 노야 곁에 서십시오.”

그는 영안의 말대로 양해생 옆에 섰다. 영안은 또다시 무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양 부인을 곁에서 모시는 시녀는 누구입니까?”

그 말에, 튼실해 보이는 시녀가 나오더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소인입니다.”

“양 부인 곁에 서십시오.”

영안이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그날 관리와 함께 땅을 갈러 후원으로 간 사람은 누굽니까?”

그러자 두 사내가 알아서 관리 옆에 섰다.

영안은 마지막으로 다섯째 이낭의 시녀 소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택 안에 만나는 사람이 있는 걸로 아는데… 누구인지 알려 주십시오.”

그 말에 소란은 화들짝 놀랐지만 차마 영안과 눈을 마주치진 못했다. 그녀가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어, 없습니다…….”

“오늘 제가 이곳에 온 목적은 다섯째 이낭을 살해한 범인을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말을 하지 못하겠다니! 그자가 다섯째 이낭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소란이 무의식적으로 부인했다.

“그자는 아닙니다…….”

영안이 한 줄기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쨌든 만나는 사람이 있단 것이군요. 누굽니까?”

소란이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자 시종 하나가 덜덜 떨며 걸어 나왔다. 얼굴이 시뻘게진 소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뒤에서 하나둘 쑥덕대기 시작했다.

“소란이는 얌전한 애인 줄 알았더니만 몰래 만나는 애인이 있었네.”

“호자號子잖아? 둘이 언제 눈이 맞았대?”

“어쩜. 두 사람이 만나는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니까 대인이 대단하다는 거지.”

영안이 손을 내저으며 나머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제 더는 관련된 사람이 없으니 그만 돌아가세요.”

몇몇은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까 봐 서둘러 자리를 떴고, 또 일부는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꾸물거렸다. 하지만 영안의 눈짓 한 번에 곧장 물러났다.

“그럼 이제 정식으로 시작해 보죠.”

영안이 남은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 양 노야께선 수행원을 데리고 차관으로 가서 친우들과 차를 마셨습니다. 그동안 다섯째 이낭은 잠깐 잠이 들었고, 한 시진이 채 되지 않아 대들보에 목매단 채 죽어 있는 이낭을 소란이 보았지요. 소란은 곧장 소리를 질렀고 마침 하인과 함께 땅을 갈러 후원으로 향하던 관리가 달려와 서둘러 부인을 끌어 내렸습니다. 그리곤 이를 양 노야께 알렸지요. 이게 그날 있었던 일입니다. 맞습니까?”

다들 아무런 대답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안은 소란 앞으로 다가갔다.

“다섯째 이낭이 잠든 후 당신은 한 시진 만에 그 방으로 들어갔지만, 그 당시 잠기운 때문에 걸상이 넘어지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맞지요?”

소란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꾸했다.

“예, 예.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부인을 모시는 시녀로서 부인이 언제 부를지 모르니 선잠을 자는 게 보통이지요. 한데 그리 큰 소리를 듣지 못했다?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그때 누군가가 당신을 나가지 못하게 붙잡았으니까요.”

소란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들더니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아닙니다. 정말 못 들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못 들었습니다.”

옆에 서 있는 사내는 옷자락을 꽉 움켜쥔 게 무척이나 긴장한 기색이었다. 영안이 그의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호자라고 했지요? 그날 당신은 소란의 방 안에 있었습니다. 정말 아무 소리도 못 들었습니까?”

호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듯싶더니 다시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못… 못 들었습니다.”

“그 말은… 그날 소란의 방에는 있었다?”

호자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영안은 처음부터 이 대답을 듣기 위해 그를 노린 것이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안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사실대로 말했으니 되었습니다. 그날 당신이 소란의 방에 있었던 건 맞지만, 두 사람 모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지요. 왜냐면 부인은 자살한 게 아니라 살해를 당했으니까요. 살인범은 당연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을 겁니다.”

나머지 이들도 영안이 이렇게 말을 길게 늘어놓는 게 두 사람이 함께 있었던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영안은 또다시 호자에게 물었다.

“다른 이와 정혼을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소란과 만나는 것입니까?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요?”

소란이 화들짝 놀라 호자에게 물었다.

“정혼을 했다고요?”

호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사실 내가…….”

영안이 소란에게 물었다.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소란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 한 달입니다.”

“다섯째 이낭은 회임한 상태였습니다. 알고 있었습니까?”

소란은 잠시 주저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습니다. 다섯째 이낭께선 아직 초기라 걱정되니 세 달 정도 지나서 이야기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다섯째 이낭이 아이를 가지고 한 달 뒤 호자와 만나기 시작한 거고, 또 한 달 뒤에 다섯째 이낭은 살해를 당한 것이군요. 그리고 그날, 당신은 호자와 몰래 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고요.”

소란이 놀란 얼굴로 호자를 바라보았다. 호자는 차마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우선 누군가 다섯째 이낭이 회임한 사실을 알고, 이낭을 살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사람은 일부러 호자를 당신과 만나게 했죠. 그래야 부인의 죽음을 자살로 위장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의 말에 묵용청양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만약 영안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이 일은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 사건이었다. 그녀는 남아 있는 이들을 유심히 살폈다. 다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쪽은…….”

영안은 영해생의 수행원을 바라보았다.

“이름은 전자栓子, 호자와 사이가 좋죠. 당신은 저택 시녀들 모두 좋아할 만큼 용모가 뛰어난 호자에게 소란의 마음을 사로잡으라고 했습니다. 내 말이 맞지요?”

전자는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날, 당신은 차관에서 한시도 노야 곁을 떠난 적 없었나요?”

“예.”

“거짓말.”

영안이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도중에 측간에 가겠다며 자리를 비웠죠.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양 노야의 친우들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그들의 수행원들은 당신의 부재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더군요. 설마 그들이 전부 거짓말을 했단 말입니까?”

전자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그는 여전히 침착하게 대꾸했다.

“생각해 보니, 그날 배탈이 나서 측간에 갔었습니다.”

“또 거짓말이군요. 당신은 측간에 가지 않았어요. 차관의 뒷문으로 빠져나와 재빨리 양부로 돌아왔죠. 그리고 후원으로 몰래 침입해 다섯째 이낭을 목 졸라 죽인 후, 마치 그녀가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은 것처럼 위장했죠.”

“아뇨, 전 아닙니다. 전 그분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죽인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당신에겐 그럴 만한 동기가 없어요.”

영안이 양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인, 이곳 양부 사람들은 부인이 다섯째 이낭을 싫어하셨다는 걸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부인께선 다섯째 이낭의 회임 소식을 듣고 살의를 품었겠죠. 그래서 전자에게 다섯째 이낭을 죽이라고 한 겁니다.”

묵용청양은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영안은 분명 양 부인은 범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한데 지금은 왜 그녀를 범인으로 지목한단 말인가?

영안은 또다시 관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을 후원으로 부른 것도 양 부인이었어요. 말로는 땅을 갈기 위해서였다고 했지만, 사실은 만약 다섯째 이낭의 목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면 다시 손을 쓰려고 말이에요.”

관리는 창백해진 얼굴로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대인, 다시 명확히 조사해 주십시오. 전 정말 하인을 불러, 땅을 갈고 있었습니다…….”

양 부인도 곧장 억울함을 호소했다. 영안의 칼날이 제 목에 닿았던 게 떠올라 무섭기는 했지만, 살인은 응당 죽을죄였기에 이대로 시인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 아닙니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회임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영안은 품에서 검시 결과지를 꺼내더니 양 부인의 면전에 대고 펼쳐 보였다.

“여기 이렇게 똑똑히 쓰여 있지요. 다섯째 이낭의 몸 곳곳 바늘에 찔린 흔적이 있었다고. 이는 생전에 학대를 당했단 뜻입니다. 그리고 조사해 보니 양 부인께서도 같은 취미가 있으시군요. 바늘로 사람을 찌르는 것 말입니다. 양 부인, 차마 부인은 못 하시겠지요?”

양 부인은 웅얼거렸다.

“아, 아니, 저는…….”

영안은 그녀의 시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국취菊翠, 맞죠? 당신은 쭉 양 부인 곁에 있었으니 부인의 이런 습관을 분명 알았을 테죠?”

국취가 목을 움츠린 채 양 부인 뒤로 숨었다.

“소인은, 모… 모릅니다.”

“그럼 다섯째 이낭의 몸에 난 바늘 자국은 당신 짓이라는 뜻입니까? 주인을 향한 충심에 전자와 한패가 되어 다섯째 이낭을 죽인 겁니까?”

“아닙니다, 전 죽이진 않았습니다!”

국취가 화들짝 놀라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며 말했다.

“바, 바늘로 다섯째 이낭을 찌른 적은 있습니다. 부인께서 제게 시키셔서요. 하지만 전… 전 아닙니다. 전 죽이지 않았습니다.”

묵용청양은 이제 영안이 무얼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는 지금 다섯째 이낭이 살아생전에 학대를 받았단 사실을 밝혀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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