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7화
판등이 말했다.
“다섯째 이낭 사건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안 형이 진작에 알고 있을 테니 걱정할 거 없어요.”
그 말에 묵용청양은 깜짝 놀라 물었다.
“이미 알고 있다고? 그런데 왜 우리한텐 알려 주지 않는 거야? 범인이 누군지 가서 물어봐야겠다.”
영안은 탁자 앞에 앉아 무언가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를 향해 막 입을 열려던 순간, 묵용청양은 조금 전에 그와 언쟁을 벌였던 게 생각났다. 어쩐지 말을 걸기 껄끄러워진 그녀는 괜히 먼지떨이를 들고 영안의 주변을 서성였다. 힐끗힐끗 보니 영안이 보고 있는 것은 다섯째 이낭의 검시 결과지였다. 묵용청양은 결과지에 적힌 내용을 곁눈질했다.
‘허리와 허벅지에 미세한 구멍이 있음. 바늘 자국으로 의심됨…….’
그녀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다섯째 이낭이 바늘에 찔렸다고?”
영안이 고개도 들지 않고 짧게 그렇다고 대꾸하자, 묵용청양은 성을 내며 말했다.
“분명 양 부인이 한 거야.”
영안은 또다시 짧게 대꾸했다. 그의 대답에 묵용청양도 더는 따지고 들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곧장 영안에게 물었다.
“그래서 양 부인이 범인이야?”
영안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다섯째 이낭을 업신여겼다고 해서 꼭 양 부인이 그녀를 죽인 것 같아?”
“적어도 양 부인에겐 그럴 만한 동기가 있잖아.”
“양 부인 또한 다른 정실들처럼 고질병을 갖고 있던 것뿐이야. 첩의 젊음과 아름다운 외모, 지아비가 주는 총애를 질투한 거지. 단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방법을 써서 자신의 지위를 증명하고 싶었겠지. 다섯째 이낭이 오기 전엔 넷째 부인을, 넷째 부인이 오기 전엔 셋째 부인을 괴롭혔어. 하지만 누군가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을 거야. 만약 죽어 버리면 그녀 또한 괴롭히는 재미가 사라질 테니까.”
“그러니까 네 말은 양 부인이 순전히 재미로 첩들을 괴롭혔다는 거야?”
“그보다는 질투와 두려움 때문이었을 거야. 자신은 점점 늙어 가는데 첩들은 생기가 넘치고 아름다우니까. 그런 이유로 불쾌한 마음을 풀고 싶었을 뿐, 살인할 정도까진 아니라는 거야.”
묵용청양은 침묵에 잠겼다.
처첩이 많다 보면 종종 이런 문제들이 생기곤 했다. 물론 첩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정실도 있었지만, 질투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해코지하는 정실도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그럼 범인은 누구야? 유안례? 다섯째 이낭이 아이를 가지니까 홧김에 죽인 거야?”
영안은 결과지를 접더니 묵용청양을 흘겨보며 말했다.
“지금 수수께끼 풀어?”
“판등 말로는 넌 이미 범인을 안다는데? 누구야?”
“지금은 말 못 해.”
“어째서?”
“아직 때가 아니거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다섯째 이낭의 발인 날까지.”
조급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조금 우스워, 영안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사건 조사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게 아니야. 할 일이 없으면 호두나 많이 먹어 둬.”
묵용청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호두를 왜 먹어?”
“머리에 좋거든.”
말을 마친 영안은 이미 문을 나서고 있었다.
묵용청양이 뒤따라 나가며 그에게 소리쳤다.
“머리에 좋은 거 먹어야 할 사람은 너거든!”
* * *
다섯째 이낭의 발인 날은 매우 화창했다.
여전히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이는 양해생은 허리를 구부린 채 직접 다섯째 이낭의 영구를 호송하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과 수척해진 얼굴을 보면 그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 헤아릴 수 있었다. 오죽하면 뒤따라오던 이웃들도 그를 보곤 눈물을 몇 방울 흘릴 정도였다.
“양 노야께서 다섯째 이낭한테 얼마나 잘해 주셨는지 몰라요! 총애를 받던 분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가네요.”
“그러니까. 이리 좋은 세상을 모두 버리고 죽음을 택하다니 말일세. 백발노인이 젊은 사람을 먼저 보내다니… 이 얼마나 가여운 일이란 말인가.”
“듣자니 다섯째 이낭이 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니라더군.”
“정말? 아니, 누가 부인을 죽였단 말인가?”
“누가 알겠나. 잘은 모르지만 양 부인의 성격이 매서운 건 워낙 유명한 일이지.”
“…….”
성문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운구 행렬은 길게 이어졌다.
군중 속에 섞여 검은색 관을 가만히 지켜보는 묵용청양의 머릿속엔 두 장면이 교차하듯 떠올랐다. 하나는 유안례의 초상화 속 여인, 또 하나는 주검의 창백한 얼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가까운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인파 사이로 유안례의 얼굴이 보였다.
유안례는 지난번보다 더 수척해진 것 같았다. 광대는 툭 튀어나오고, 입술은 바짝 메말라 있었다. 관을 바라보는 그의 흐릿한 눈빛엔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에 묵용청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자가 범인일 리 없어. 저자는 분명 다섯째 이낭을 깊이 흠모했다고.’
그녀는 계속 유안례를 지켜보았다.
운구 행렬이 지나간 곳마다 하얀 지전이 가득 떨어져 있었는데, 불현듯 그가 지전 한 장을 줍더니 조심스레 품에 넣었다. 그리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대열을 따라갔다.
묵용청양은 영안의 말을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다섯째 이낭을 발인하는 날 진상을 밝힐 거라고 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진상을 알고 싶어 곧장 환경문으로 달려갔지만, 영안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녀가 판등에게 물었다.
“영안은?”
그러나 판등은 번들번들 웃기만 할 뿐 영안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묵용청양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말하면 안 되는 거라도 있어?”
그때,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산응이 피리를 만지작거리며 느긋하게 말했다.
“말 못 할 건 없지. 안 형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갔어요.”
묵용청양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 영안이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판등이 물었다.
“왜 그리 놀라요? 안 형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죠.”
묵용청양은 화단 옆에 털썩 앉았다. 조금 슬픈 기색이었다.
“난 그 애를 가장 친한 벗이라고 생각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나한테 말도 안 해 줘? 그래, 어느 집 규수인데?”
하지만 판등과 산응은 서로 눈치만 보며 시시덕거릴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여튼 꾸물거리는 게 얄밉다니까. 대장부들이 말 좀 시원하게 할 수 없어?”
그러자 판등은 가까이 다가와 돌 의자에 앉았다.
“청이각淸怡閣이라고 알아요?”
묵용청양이 고개를 저었다.
“뭐 하는 곳인데?”
“그냥 한가할 때 시간 때우는 곳이에요. 고쟁 연주도 듣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어린 기녀들이 기예는 팔지만 몸은 팔지 않는…….”
“잠깐만.”
묵용청양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영안이 어린 기녀를 좋아한다고?”
두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자 묵용청양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세상에… 영안이 기녀를 좋아한다 이거지? 어쩐지 나한테 아무 말도 없더라니. 한데 영 대인과 기홍 고고가 허락하려나? 영 대인의 성격을 봐선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영안이 기녀와 죽어도 혼인을 해야겠다고 하면 벗인 내가 도와줄 순 있지만.”
판등이 물었다.
“대장, 영 대인이 반대하는데 대장이 무슨 수로요?”
묵용청양이 어찌 말해 줄 수 있을까.
“넌 신경 쓸 거 없어. 어쨌든 나한테 다 방법이 있으니까. 아, 그 아가씨 이름이 뭔데?”
“안월이요. 청이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에요.”
묵용청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안과 어울리려면 필히 제일 예뻐야지.”
산응은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의아한 듯 물었다.
“대장, 대장이랑 안 형은 함께 자랐으니 청매죽마인 셈인데… 안 형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도 별 생각 없어요?”
묵용청양이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도 말해 주지 않아서 화가 나. 그렇지만 어쩌겠어. 어쨌든 제 인연이 생긴 거니 내가 따질 게 있나?”
판등이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대장은 마음도 넓네요.”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소어가 달려와, 산응에게 사납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자 산응은 멋쩍게 웃으며 피리를 소어에게 던졌다.
“잠깐만 가지고 놀려고 한 거야. 망가뜨리지도 않았다고.”
소어는 피리를 받고 잠시 눈을 부라리더니 자리를 떴다.
잠시 후, 묵용청양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소어는 말도 할 줄 알면서 왜 아무런 소리도 안 내는 거야?”
산응이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모르겠어요. 저 애는 속을 모르겠다니까요. 소어랑 안 형이랑 단둘이 있을 땐 더 가관이에요. 한나절을 같이 앉아 있어도 말 한마디 안 한다니까요.”
금세 후원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은은한 가락에 약간의 슬픔이 섞여 있었다. 한참 동안 듣고 있던 묵용청양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소어는 사연이 있는 사람인가 보구나.”
* * *
유시酉時(오후 다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가 되기 일각 전 들어온 영안은 음흉하게 웃고 있는 묵용청양을 마주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정성스레 차까지 내왔다. 그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한번 바라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차에 아무것도 안 넣었으니까. 찻잔도 아주 깨끗한 거고.”
영안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까닭도 없이 아첨하는 건 도적이나 간신들이 하는 짓인데.”
“무슨 도적이나 간신이야.”
묵용청양이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난 네가 힘들 것 같아서 그런 거지.”
기녀를 좋아하다니… 앞으로 고생길이 뻔히 예상됐다. 그러나 영안은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힘들어?”
“조사가 힘들잖아.”
묵용청양이 말했다.
“오늘 진상을 알려 줄 거라며. 더는 못 기다리겠어.”
영안은 차 반 잔을 한 번에 들이켜고선 입을 열었다.
“가자.”
그들이 양부에 도착하자마자 관리는 재빨리 그들을 대청으로 안내했다.
양해생은 영구를 묘지로 보내고 돌아와 쉬는 중이었다. 그는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소식에 서둘러 옷을 갖춰 입고 나와 영안에게 읍했다.
“영 부문주, 천여를 죽인 범인을 잡았습니까?”
영안이 말했다.
“예, 거의 다 잡았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관리에게 집안사람들을 모두 불러 달라고 분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 제가 누가 범인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자 양해생은 곧장 관리에게 턱짓하며 사람들을 불러 모을 것을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