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6화
유안례는 그들이 찾아온 게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 묵용청양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어제 일은 고맙습니다.”
“에이, 뭐 그런 걸 가지고.”
묵용청양이 손을 내저었다.
“한데 왜 죽으려 한 거예요?”
유안례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죽으려 한 게 아니라 너무 오래 서 있었더니 어지럽더군요. 그러다가 그만 넘어진 것입니다. 아직 누가 천여를 죽였는지 모르는데 목숨을 끊을 순 없습니다.”
묵용청양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다섯째 이낭이 살해당한 걸 알고 있었어요?”
“천여가 비록 양해생한테 시집가는 걸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그런 일로 죽을 사람은 아닙니다.”
유안례는 말을 이었다.
“천여가 얼마나 극진한 효녀인데요. 양친이 아직 살아 계시는데 어찌 제 목숨을 버리겠습니까?”
묵용청양이 물었다.
“그럼 누가 죽였을 것 같아요?”
유안례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양 부인이 그녀에게 모질게 대했다는 것만 압니다.”
묵용청양이 또다시 물었다.
“당신은 왜 그녀와 혼인하지 않았죠?”
유안례의 얼굴에 금세 그늘이 졌다.
“전 일개 가난한 화공에 불과하니까요.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데, 어찌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습니까. 게다가 천여의 아버지께선 건강이 좋지 못한 탓에 자주 약을 드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효녀는 아버지께 약을 지어 드리기 위해 양해생에게 시집을 간 겁니다.”
묵용청양이 말했다.
“고작 돈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다니요. 한평생 한으로 남지 않겠어요?”
유안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한이 남긴 하겠죠. 그래도 살다 보면 어떻게든 살아집니다. 인생이란 게 원래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요.”
유안례의 이야기에 마음이 불편해진 묵용청양은 탁자 앞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탁자 위에는 초상화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그림 속 인물의 옷이나 자세가 모두 달라서 대충 훑어보면 전부 다른 사람 같았지만 사실 모두 똑같은 사람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수줍어하거나 살짝 미소 짓는 얼굴, 생각에 잠겨 있는 등 다양한 모습들이 마치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묵용청양의 머릿속에 다섯째 이낭은 창백한 얼굴에 입술이 까맣게 변한 모습뿐이었다. 그런데 유안례의 그림 속 그녀는 정말 빼어난 미녀인 듯했다. 이렇게 보니 그와 다섯째 이낭은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았다. 하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었다. 그녀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줄곧 잠자코 있던 영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다섯째 이낭이 혼인한 뒤에도 사적으로 만나 왔습니까?”
유안례가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만났습니다. 그저 잘 지내는지 보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다섯째 이낭이 무슨 얘길 했었나요?”
“양 부인이 자기를 싫어해서, 양해생이 없을 때면 자신을 괴롭힌다고 했습니다.”
“양해생은 어떻다고 하던가요?”
“양해생은 아주 잘해 준다고 했습니다.”
영안이 말했다.
“다섯째 이낭은 회임한 지 두 달 된 몸이었습니다. 알고 있었습니까?”
화들짝 놀란 유안례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회… 회임을 했다고요?”
“그건 말 안 해 주던가요?”
유안례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해 줬습니다.”
영안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 아이입니까?”
유안례는 바늘에 찔린 듯 몸을 움찔거렸다.
“당연히 아니죠. 저와 천여는 아주 깨끗한 사이입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참,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생각할수록 화가 났는지 목까지 벌게진 그는 식식대며 영안과 묵용청양을 내보냈다.
문밖에 선 묵용청양은 북적북적한 거리를 바라보며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판등은 추측이 아니라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에 유안례는 범인이 아닌 것 같아.”
영안이 물었다.
“무엇 때문에?”
“직감이 그래.”
묵용청양이 말했다.
“다섯째 이낭을 그린 초상화를 봤어. 만약 정이 깊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예쁘게 그리진 않았을 거야. 그녀에 대한 감정이 전부 그림 속으로 녹아든 거지.”
영안이 코웃음을 쳤다.
“저자가 연기를 하는 거라면?”
“그게 가능하겠니?”
묵용청양은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넌 어떻게 그렇게 듣는 사람 기분 상하게 물어볼 수 있어? 그러니 그가 우릴 이렇게 내쫓지.”
“원래 숨기려 할수록 더 드러나는 법 아닌가?”
묵용청양이 볼을 부풀리며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영안, 네 눈엔 모두가 다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그건 아냐. 하지만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기 전까지는 누구든 혐의를 피할 순 없는 법이지.”
묵용청양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 같은 사람은 유안례와 다섯째 이낭 사이의 감정을 이해 못 하겠지. 그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어떻게 유안례가 그녀를 죽일 수 있겠니?”
“넌 꼭 이해한다는 것처럼 들리네.”
영안이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봐 황청양,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있나 봐?”
“당연히 없지.”
묵용청양은 팔짱 끼며 천천히 그를 흘겼다.
“내가 좋아하게 될 사람은 분명 듬직한 대장부일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퍽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영안, 아무래도 넌 어렵겠다.”
그 말에 멍한 얼굴을 하던 영안이 돌연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듣던 중 고마운 소리네!”
* * *
묵용청양은 양 부인이 다섯째 이낭을 죽인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영안을 끌고 또다시 양부를 찾았다.
양부에선 상을 치르고 있었다.
양해생은 지난번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다. 양쪽 귀밑머리도 희끗희끗했고 이마의 주름도 몇 줄 더 패인 듯했다. 다섯째 이낭이 죽은 뒤로 그는 줄곧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양 부인을 조사하러 왔다는 말에 그는 관리에게 그녀를 데려오게 했다. 그러고선 몇 마디 인사치레를 건넨 그는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양 부인은 양해생보다 세 살이 많았고, 몸집도 뚱뚱했다. 뾰족한 눈초리와 달리 입꼬리는 축 늘어졌고,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게다가 상중인데도 그녀는 평소와 같은 복장을 입고 있었다. 짙은 비취색 머리 장신구와 금실로 화려하게 치장된 꽃무늬 치마는 그녀를 더 귀티 나 보이게 했다.
그녀는 영안을 바라보며 예를 갖추면서도 냉랭하게 말했다.
“제게 물을 것들은 이미 다 물으신 걸로 아는데, 어찌하여 오늘도 찾아오신 겁니까?”
영안이 묵용청양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이 친구가 부인께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합니다.”
묵용청양은 목청을 가다듬고 물었다.
“부인께선 다섯째 이낭이 죽기 전, 그녀가 회임한 지 두 달 된 몸이었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예. 검시관이 검시 때 알려 주었습니다.”
“그전에도 아셨습니까?”
“몰랐습니다.”
“양부의 안주인은 부인 아니십니까? 한데 어떻게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겁니까?”
양 부인이 성을 내며 말했다.
“그 비천한 것의 일을 왜 알아야 합니까?”
“부인께서는 다섯째 이낭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는 겁니까?”
“일개 소첩 따위를 예뻐해야 한단 말입니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섯째 이낭을 죽인 겁니까?”
그 말에 양 부인은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지금 내가 그 비천한 것을 죽였다고 의심하는 것입니까?”
묵용청양이 코웃음을 쳤다.
“부인께서는 세상을 떠난 다섯째 이낭을 일개 비천한 소첩이라고 표현하시는군요. 다섯째 이낭이 정말 싫으셨나 봅니다. 그렇게나 눈엣가시였으니 당연히 제거할 방법을 고민했겠지요.”
양 부인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리 악독한 말로 남을 중상모략하다니… 여인이 얼굴을 빤히 드러내고 사내들 뒤나 졸졸 따라다니는 걸로 보아, 소저도 질 나쁜…….”
그 말에 묵용청양이 버럭 성을 내려는데, 뒤에서 스륵 칼 뽑히는 소리가 나더니 어느새 날카로운 칼끝이 양 부인의 턱 밑까지 바짝 다가왔다.
“양 부인, 조정에서 명한 관리를 모욕한 죄로 이 자리에서 당신의 목을 벨 수도 있습니다.”
제아무리 양 부인일지라도 칼이 목에 닿았는데 어찌 무섭지 않을까. 그러나 목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더 무서웠던 건 영안이 내뿜고 있는 살기였다. 그 살기로 봐선, 그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이 자리에서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양 부인은 바들바들 떨며 용서를 구했다.
“대, 대인, 요, 용서해 주십시오. 순간적으로 이, 입을 잘못 놀렸습니다. 대인, 용서해…….”
영안은 냉소를 지으며 칼을 거둔 뒤, 그녀에게 경고했다.
“다음엔 혀를 조심해야 할 겁니다.”
사색이 된 양 부인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암요, 제가 어찌 감히.”
영안은 조용히 묵용청양을 끌고 나갔다. 그리곤 바깥으로 나와서야 손을 놓아 주었다.
묵용청양은 말없이 걷는 영안의 뒤를 쫓으며 물었다.
“영안, 왜 그래?”
그러자 영안이 성을 내며 말했다.
“이러니까 내가 오지 말랬지! 기어이 와서 이런 꼴을 보니 마음이 편해?”
묵용청양이 말했다.
“저 사람은 내 신분을 모르잖아. 만약 내 신분을 알았다면 감히 그런 말은 못 했을…….”
영안이 발걸음을 멈추며 소리쳤다.
“공주가 아니면 함부로 모욕해도 되고?”
“…….”
묵용청양은 의아하기만 할 뿐이었다. 왜 저렇게까지 성질을 부린단 말인가. 모욕을 당한 건 내 쪽인데…….
* * *
환경문으로 돌아온 묵용청양은 사건을 분석하고자 판등을 불렀다.
판등은 영안의 안색이 어두운 걸 보곤 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물었다.
“대장, 안 형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한 거예요?”
묵용청양이 코웃음을 쳤다.
“어릴 때부터 저랬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저 애 돈을 빌리고 안 갚고 있기라도 한 건 줄 알 거야.”
판등이 웃음을 터뜨렸다.
“안 형은 고작 돈 때문에 다른 이들과 언쟁한 성격은 아니죠.”
“비유를 들자면 그렇단 거지. 사실 저게 유전이거든. 영씨 가문 사람들은 다들 저래. 영 대인부터 영가군寧家軍까지… 다들 어찌나 표정들이 없는지.”
판등이 그녀의 말에 흥미를 느꼈다.
“대장, 영가군 사람들까지 다 알아요? 듣자니 황상의 수행 시위라던데, 그분들 얘기 좀 해 줘요.”
순간 묵용청양은 아차 싶어 얼버무렸다.
“나도 잘은 몰라. 그저 영가군이 그런 줄만 알지. 그들은 됐고… 우린 사건 이야기나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