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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53)화 (1,053/1,192)

제1053화

영안이 푸앗 하는 소리와 함께 찻물을 쏟아냈다. 그는 연신 기침을 하며 벌개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판등은 이제야 영안이 한 말 뜻을 알았다. 평범한 아가씨라면 분명 이런 짓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영안의 기침이 멈추자 영안이 판등에게 말했다.

“소제갈은 어디 있나? 양부楊府 사건에 새로운 실마리가 생겼으니, 그에게 한번 가 보라고 해야겠네.”

판등이 말했다.

“소제갈은 말안장을 수리하러 갔어요. 아니면 제가 다녀올게요.”

“안 돼. 너에겐 다른 임무가 있어.”

묵용청양 재빨리 손을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내가 갈게! 부문주, 절 보내 주세요.”

영안은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네가 잘 할 수 있을까?”

묵용청양은 뻔뻔스럽게 큰소리를 쳤다.

“난 몸도 재빠르고, 머리도 똑똑한데… 왜 못하겠어?”

“…….”

영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럼. 그리 어렵지 않은 임무니, 뭐. 양해생의 다섯째 이낭은 시집오기 전에 연인이 있었지. 유안례劉鴈禮라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지. 그녀가 양부로 시집간 후에도 두 사람은 은밀한 왕래가 있었어.

내가 알아본 바로는 유안례가 매일 오후 신시申時(오후 3시에서 5시 사이)경이면 전문거리에 있는 휘어진 나무를 지나간다고 하니까 네가 가서 기다렸다가 그가 나타나면 어디로 가는지 조용히 따라가.”

묵양청양은 영안이 그녀에게 이런 중요한 임무를 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알겠습니다. 부문주님, 그런데 제가 유안례를 어떻게 알아보죠?”

영안은 속으로 감탄했다.

‘허, 그래도 머리는 잘 돌아가네.’

“유안례는 곱상하게 생겼고, 피부가 하얗고 깨끗해, 키가 크고 말랐으며 머리에 사각형 두건을 두르고 다닌다. 그리고 왼쪽 뺨 귀 근처에 검은 점이 있다.”

묵용청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먼저 가 볼게. 임무를 반드시 완수하겠어.”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판등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의욕이 넘치는 아가씨네요. 근데 안 형, 청양은 아직 풋내기인데 혼자 보내도 될까요?”

영안은 흥 하고 비웃음을 지었다.

“저 녀석을 따돌리지 않으면 계속 따라올 게 아니냐? 지겨운 녀석!”

판등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안 형, 정말… 못됐어요.”

영안은 말없이 피식 웃었다. 귀견수랑 겨루기를 하는데, 좀 못되지 않고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 * *

묵용청양은 얼른 전문 거리로 달려왔다. 오는 내내 두리번거리던 청양은 마침내 휘어진 나무를 발견했다. 강가에 있는 나무인데 돌다리가 이어져 있어 전경도 탁 트여 있었다. 주변에는 가옥도 없어서 비슷한 사람이 나타나면 한눈에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무 밑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사람들을 살폈다. 짐을 진 행상인, 함께 걸어가는 부인 둘, 고물을 줍는 노인 하나, 서로 때리며 장난치는 아이 셋,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젊은 부부 한 쌍, 외발 수레를 밀고 가는 백정 등등……. 하지만 네모난 두건을 쓰고 서생같이 생긴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참을성 있게 계속 기다렸다. 매서운 눈빛으로 허리에 찬 칼집에 손을 올리며 목표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협녀가 되었다고 가장했다. 이건 그녀가 처음으로 맡은 임무였다. 꼭 멋지게 해내고 싶었다.

반 시진이 지나자 발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속 정신을 집중하고 주위를 살폈다. 지평선에 깔린 구름이 마치 일부러 눌러 놓은 것처럼 두꺼워졌다. 하늘빛이 부지불식간에 어두워졌다는 건 곧 비가 쏟아진다는 불길한 전조였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 유안례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지만, 휘어진 나무 아래에 홀로 서 있는 그녀는 여전히 눈매를 매섭게 뜬 채 칼집에 손을 얹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콰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하늘을 찢고 번개가 내리쳤다. 그리곤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묵용청양은 나무 밑으로 숨었다. 하지만 가지가 무성하지 않아 그녀는 그대로 비에 맞아야 했다. 그녀는 물에 빠진 닭처럼 흠뻑 젖었다. 아직 쌀쌀한 봄에 비를 맞으니 너무 추워서 더 이상 협녀의 품격을 유지할 수 없었다. 잔뜩 몸을 웅크린 그녀는 눈 위로 흐르는 빗물을 닦아 내며 여전히 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장대비가 쏟아질 무렵, 영안, 판등 그리고 소제갈은 다루에서 양부 사건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빗물이 창문에 부딪혀 콩 볶는 소리처럼 들렸는데 갑자기 판등이 소리쳤다.

“어!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설마 아직도 청양이 휘어진 나무에서 바보처럼 기다리고 있지는 않겠죠?”

영안은 심장이 철렁 했지만,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럴 리가. 그 애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설마 비를 피할 줄도 모르겠어?”

소제갈은 판등에게서 영안이 청양을 골려 준 이야기를 듣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안 형, 아가씨를 상대로 왜 이렇게 진지해요?”

영안의 대답은 여전히 그 한마디였다.

“그 앤 아가씨가 아니래도.”

판등은 묵용청양이 영안에게 차를 타 주며 친 장난도 설명했다. 그 소리를 들은 소제갈은 더욱 껄껄 웃었다.

“정말 아가씨답진 않더군요. 그런데 그녀의 양친도 참 이상합니다. 멀쩡한 아가씨를 어찌 이렇게 키우셨을까요? 안 형, 청양의 부친은 뭐하는 사람이에요?”

영안은 적당히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뭘 그런 걸 묻고 그래? 사건에 대한 생각이나 얼른 말해 봐.”

화제가 다시 사건으로 돌아오자 판등과 소제갈 모두 진지한 눈빛을 보였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던 두 사람은 영안이 좀처럼 집중을 못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들의 말이 다 끝냈는데도 영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판등이 손을 뻗어 그의 눈앞에 흔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안 형, 뭘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영안는 홱 일어나며 말했다.

“뒷간에 잠시 다녀와야겠다.”

말을 마친 그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가 가자마자 소제갈은 탁자를 치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판등은 그를 어리둥절해서 쳐다봤다.

“안 형이 소변 마려운 게 그렇게 웃을 일이야?”

“안 형은 소변이 급한 게 아니라 마음이 급한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소제갈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환경문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이 정도 눈치도 없다니!”

* * *

묵용청양은 흩뿌리는 빗발 너머로 마침내 저편에서 사람이 다가오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는 얼른 나무 뒤에 숨어 칼집에 손을 얹었다.

청색 지우산을 쓴 사내는 다급하게 걸어오더니 그녀 앞에 섰다. 우산 뒤에 있던 이는 영안이었다. 그는 마치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묵용청양을 바라보더니 고함을 질렀다.

“이렇게 장대비가 오는데 피할 줄도 몰라? 이래 놓고도 자기가 똑똑하다고? 내가 보기에는 완전 바보에 멍청이다.”

묵용청양은 얼른 그의 우산 아래로 들어가며 투덜거렸다.

“내가 자리를 비웠다가 혹시 유안례가 이곳을 지나가 버리면 어떻게 해?”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그가 집 밖으로 나올 것 같아?”

영안은 그녀의 이마를 때렸다.

“이런 돌대가리로 환경문에 들어오겠다고? 꿈도 꾸지 마!”

묵용청양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걸 기개라고 하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하늘에서 칼날이 내려도 난 자리를 지킬 거야!”

영안은 콧방귀를 뀌었다.

“여기에서 계속 지키고 있다가 칼날을 맞겠다? 우리가 하는 일은 임기응변이 중요해!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의 안전이라고!”

묵용청양은 계속 투덜거리며 영안에게 끌려갔다. 그녀가 있던 곳은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영안은 곧바로 묵용청양을 집으로 데려왔다. 기홍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인 장공주를 보고 경악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영안에게 한바탕 욕바가지를 쏟아냈다.

“전하께서 이렇게 젖으실 때까지 넌 뭘 하고 있었느냐? 감기라도 걸리시면 어떡하려고?”

한편으로 영안을 혼내면서 기홍은 얼른 묵용청양이 목욕할 수 있게 여종에게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소리쳤다.

영안도 미안한 마음이 있었기에 어머니의 꾸지람에도 한 마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도 묵용청양이 유안례를 기다린다고 휘어진 나무 아래에서 계속 버티고 있을 줄 몰랐다. 멍청한 짓이긴 했지만… 계집애가 일은 제법 열심히 했다.

미안한 마음에 그는 친히 부엌에 가서 묵용청양에게 줄 생강탕을 끓였다. 기홍은 평소에 물 한 방울도 손에 묻히지 않는 아들이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불을 지피니 왠지 뿌듯했다.

“그래, 이게 맞는 거지! 청양에게 좀 잘해 주거라. 여동생처럼 귀여워하면 얼마나…….”

영안이 투덜거렸다.

“만약 저에게 이런 여동생이 있었으면 진작에 던져 버렸을 겁니다.”

“말만 저리 세게 하지. 그 생강탕… 끓이는 이유가 무엇이냐?”

“…저도 비를 맞았습니다. 이건 제가 먹을 겁니다.”

* * *

이튿날, 묵용청양이 평소처럼 일찍 나오지 않자 영안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어릴 적엔 몸도 튼튼하더니만 다 크고 나니 저리 약해진 듯했다. 그때, 판등 무리가 그를 부르며 뛰어들어 왔다.

“대장, 대장!”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얼른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게 웬걸, 판등과 산응은 묵용청양에게 가서 그녀를 대장이라 부르고 있었다.

“…….”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때도 사내아이들이 묵용청양을 대장이라고 불렀었다. 그녀를 대장이라고 부르는데 내키지 않았던 건 그가 유일했다. 그는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지금 뭐라는 거야!”

묵용청양은 득의양양해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어때? 나도 이제 대장이다!”

영안은 자신의 수하들을 심각하게 바라봤다.

“왜 청양에게 대장이라고 부르지? 누가 대장인지도 모르느냐? 너희들은 자존심도 없는 것이야?”

판등이 멋쩍어하며 입을 열었다.

“안 형,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이건 청양이 자신에게 지어 준 별명이니까요.”

그는 보물을 바치듯 영안의 손에 다과를 쥐여 주며 말했다.

“안 형도 먹어 보세요. 정말 맛있네요. 이건 대장이… 아니 청양이 가져왔어요. 구여재에서 만든 것보다 더 맛있어요.”

영안은 수하들의 한심함을 한탄했다.

“다과 몇 개에 영혼을 다 팔아 버린 것이냐? 이러고도 너희들이 환경문 사람이냐?”

산응이 입 안에 다과를 가득 넣은 채 우물거리며 말했다.

“안 형, 먹어 봐요. 정말 맛있어요.”

영안은 그들을 힐끗 쳐다봤다.

“절대로 안 먹어…….”

그때 그들 손에 쥐어진 다과를 보고 영안이 버럭 화를 냈다.

“황청양, 이건 우리 집 다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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