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9화
그녀는 왕장량을 쳐다봤다. 대총관도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사봉봉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며 꿇고 앉아 있었다. 오래 꿇고 앉아 있으니 발이 저리고 허리도 아팠다. 하지만 묵용린이 그녀에게 망신을 주려 작심을 했으니 어디 쉽게 일어나란 말을 하겠는가?
사봉봉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됐다, 됐어. 그렇게 한참 동안 버티고 버텼지만 다리가 너무 저린 탓에 결국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과연 묵용린은 그제야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후가 이게 무슨 짓이오?”
“다리에 쥐가 났습니다.”
사희가 얼른 다가와 부축을 하려 했지만 묵용린의 헛기침 소리에 그 역시도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사봉봉은 스스로 일어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황상께서 신첩을 부르셨다는데…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묵용린은 그녀를 바라봤다. 과연 그녀의 패기는 탄복할 만했다. 뭇사람들 앞에서 크게 넘어졌는데도 그녀는 안색조차 바꾸지 않았다. 역시 낯가죽이 두꺼운 장사꾼이었다. 그가 말했다.
“황후는 어전에서 추태를 보였으니 석사자상 옆에서 자숙하시오.”
사봉봉은 한마디 반박도 없이 돌아서서 나갔다. 차라리 석사자상을 상대하는 것이 한결 편했다. 또한 오랫동안 꿇고 있는 것보다 서 있는 게 훨씬 나았다. 장사하는 사람은 온종일 서 있는데… 그게 뭐가 두렵겠는가?
사봉봉이 한참 벌을 받고 있을 때, 월규가 눈을 떴다. 그녀의 시야에 의정 차림의 남자가 등을 돌리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검은색 복두, 청색 장포, 넓은 소매가 살랑살랑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순간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온 건 아닌지 생각했다. 약방문을 쓰고 나서 고개를 돌린 노낙원은 월규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의아한 듯 물었다.
“월규 고고?”
월규는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노 의정이셨군요. 제가 왜 이런 거죠?”
“고고께서는 과로로 원기를 다쳐 쓰러지셨소. 해서 본관이 고고에게 비장을 보양하는 약을 처방했소. 그리고 이것.”
그는 방금 쓴 종이를 그녀에게 보였다.
“이건 원기를 보충하는 식단으로 부엌에 전달할 것이오. 모든 약에는 약간의 독성이 있소. 일단 증세가 다 나으면 약보단 식단으로 몸을 다스리는 게 고고에겐 더 유익할 것이오.”
월규가 종이를 받았다.
“수고 많으셨어요. 노 의정.”
노낙원은 손을 내저었다.
“고고, 별말씀을 다 하시오. 고고가 쓰러졌다는 말에 황상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모르오. 황상을 위해서라도 고고께서 빨리 나으셔야겠소.”
황상이라는 한마디에 월규의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이런 하찮은 일로 황상을 놀라게 했군요. 아랫사람들을 혼내야겠어요.”
미소를 지은 노낙원은 곱게 땋은 그녀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태의원에 들어갔을 때, 위중청은 이미 떠난 뒤였지만 그의 명성은 여전했다.
위중청은 대대로 의원을 배출한 가문 출신으로, 의술이 뛰어났다. 오래전 태후가 하마터면 유산할 위기에 처했을 때, 수십 명의 의원이 속수무책이었지만 위 의정이 나서서 용종을 지켜냈다. 바꿔 말하면, 위중청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황제 묵용린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위중청은 의술에 미쳐서 의정을 그만두고 만 리나 떨어진 남원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그곳의 인구가 감소하는 수수께끼를 연구하느라 아직까지 소식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그리며 월규 고고가 평생 외롭게 지냈다는 이야기 또한 많은 이의 탄식을 자아냈다.
노낙원은 월규가 어떤 사람인지 항상 궁금했다. 가까이서 보니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방금 전 그를 빤히 바라본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자신을 위 의정이라고 착각한 것일까?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노 태의의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는 어린 궁녀에게 몇 마디 당부를 건네곤 물러갔다. 어린 궁녀가 웃으며 말했다.
“고고, 노 의정께서 정말 신경을 많이 쓰시네요. 처방전뿐만 아니라 식단도 정해 주셨어요. 정말 세심한 사람이네요.”
월규가 말했다.
“의원은 세심하지 않으면 안 되지.”
어린 궁녀는 소락小諾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영특한 아이였다. 그녀는 월규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노 의정께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세심하게 대하지 않으세요. 한데 고고한테는 왜 이런 태도를 보이실까요?”
아직도 병중이라 기력이 없는 월규가 그녀를 째려봤다.
“헛소리 좀 작작 하거라. 이 고고까지 마음대로 놀려 먹으려고 드는 것이냐? 몸 상태가 좀 나아지면, 바늘로 네 입을 꿰매야겠구나.”
월규가 독설을 퍼부었지만, 내용에 비해 목소리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소락은 웃으며 용서를 빌었다.
“고고, 소인을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한참 웃고 떠들던 소락이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맞다! 고고, 황후 마마께서 석사자상이 있는 곳에 벌을 서고 있었어요.”
월규가 깜짝 놀라 물었다.
“뭐라고? 무슨 일 때문에?”
“듣자 하니 어전에서 추태를 보였다고 합니다. 황후 마마께서 황상 앞에서 넘어지셨다고 합니다.”
월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원수지간이 따로 없구나. 이제 막 대혼을 치르셨는데…….
* * *
사봉봉이 벌을 서고 있던 곳은 남서방과 그리 멀지 않은 탓에 오고 가는 신하들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신하들은 가만히 서 있는 황후를 보며 의아했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이가 물어보고 나서야 황후가 어전에서 추태를 보여서 벌을 서고 있다는 걸 알았다.
황제가 황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던데… 지금 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런데 황후 마마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이 벌을 받고 있는 걸 다른 이들이 알아도 아무렇지 않은 듯한 그녀의 태도는 정말 황후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가 벌을 서고 있다는 소식이 궁 안팎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 소식을 들은 허 귀비는 어리둥절해서 금령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 황후가 벌을 받고 있느냐?”
“물론 정말입니다. 바로 석사자상 있는 곳입니다. 신하들도 다 그 모습을 봤어요.”
금령金鈴은 희색이 만면했다.
“마마, 황상께서 황후 마마를 정말 싫어하시나 봅니다. 황상께서는 마마께만 잘해 주세요. 황후가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이 없으니…….”
허 귀비가 물었다.
“황후가 소란을 피웠다니?”
“당연히 어젯밤 일 때문이지요. 대혼식 날 밤에 황상께서 황후의 궁전으로 가지 않고 마마께 왔으니 분명 행패를 부렸겠지요. 황후의 패악을 부리지 않았다면 왜 석사자상에서 벌을 서고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틀림없어요.”
금령이 덧붙였다.
“황후 마마께서 이렇게 참을성이 없을 줄 몰랐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앞으로 볼거리가 많을 것 같아요.”
마침 궁에서 퍼지는 소문이 금령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참, 소인이 또 다른 소문도 들었습니다.”
무슨 소문인지 금령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어젯밤에 황상께서… 너무 격렬하게 하셔서 마상풍을 맞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대총관이 제때 뛰어들어서 화를 면했다고요.”
그 소문을 들은 허 귀비는 경악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가 그런 소문을 낸 것이냐? 죽음이 두렵지도 않단 말이냐? 황상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금령은 비록 허 귀비의 측근 대궁녀였지만, 어젯밤에 어떤 사달이 났는지 그녀가 알 길은 없었다. 그녀가 확실히 아는 건 대총관이 황상을 데려갔다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바람에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분명 황제의 안색은 좋지 않아 보였다. 근거 없는 소문이 이유 없이 퍼지지는 않는 법. 금령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마마, 뭘 그리 두려워하십니까? 어차피 우리가 퍼트린 소문이 아니잖습니까. 더군다나 소인이 보기에 이 소문은 마마께 별로 나쁠 게 없습니다. 황상이 왜 그렇게 격렬하게 했을까요? 바로 마마를 너무 좋아하시는 마음에 마상풍이 걸리셨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그 입 다물라!”
허 귀비는 낮은 목소리고 호통을 쳤다.
“본궁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만약 그런 밤을 보냈더라면 그녀 또한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손길이 닿았을 뿐인데 황제의 몸이 불편해졌다. 그녀는 그것이 아주 작은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징조가 너무 불길했기에 몹시 불안했다.
* * *
묵용린은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느라 사봉봉과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신하들이 모두 물러가자 사희가 차를 올리며 그를 일깨웠다.
“황상, 황후 마마께서 아직 석사자상 옆에 서 계십니다.”
그제야 생각난 듯 묵용린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내려놓았다. 그리고 복도로 나가 황후가 서 있는 석사자상 앞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사희에게 물었다.
“계속 저렇게 서 있었느냐? 게으름 피우지는 않았고?”
사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마께서는 몰래 게으름을 피우는 분이 아니십니다.”
묵용린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묵용린이 서 있는 구석에는 사봉봉의 옆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금봉황이 수놓아진 장포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소매 끝과 옷자락에는 용포의 색인 명황색이 둘러져 있었다. 황궁을 통틀어 황제와 황후만이 그 색깔의 천을 쓸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그녀가 황후, 즉 그의 정실이기 때문이었다.
묵용린은 갑자기 우습다고 생각했다. 태상황께서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삼았고, 그는 가장 싫어하는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
그는 눈길을 돌려서 그녀의 머리 위를 바라봤다. 그녀는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비선계로 틀어 올리고 금술이 달린 금봉 비녀를 꽂았다.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지만, 금색 봉황의 입에서부터 늘어진 가늘고 긴 금술이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눈이 부신 햇살을 반사해 반짝이는 금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어른거렸다…….
묵용린은 줄곧 사봉봉에게 천박한 돈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기에 그녀에게 황후의 의복은 어울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오늘 한참을 바라봐도 아무런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턱을 치켜들고 그녀에게 물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알고는 있소?”
“황상께 아룁니다. 신첩, 알고 있습니다.”
사봉봉는 눈을 반쯤 감고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묵용린도 무작정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의 태도가 나쁘지 않자 그는 말했다.
“됐으니 그만 돌아가시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게 하시오.”
“네, 신첩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사봉봉은 공손히 예를 취한 뒤에 돌아섰다. 묵용린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분별 있게 군다면, 그도 그녀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또 사봉봉 때문에 분노해야 했다. 그와 사봉봉은 절대 평화롭게 지낼 수 없었다. 왜냐면… 그녀는 정말이지 나쁜 여인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