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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48)화 (1,048/1,192)

제1048화

황제의 대혼 때문에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월규 고고였다. 그녀는 크고 작은 일을 따지지 않고 본인이 직접 확인했다. 또 어떠한 실수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찍 일어나 온종일 노심초사하다가 늦게 잠들었다. 마음속에서 팽팽하게 긴장되었던 끈이 대혼 의식을 다 끝내고 나니 풀어졌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몸이 좀 불편하다는 걸 발견했다. 어린 궁녀가 태의를 부르겠다는 걸 그녀가 제지했다. 화촉을 밝혀야 하는 첫날밤에 괜히 자신 때문에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일찍 잠에 들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묵용린이 그날 밤 황후에게 가지 않았다는 걸 몰랐고, 묵용린이 귀비한테 가서 벌어진 일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월규는 몸이 불편했지만 제시간에 일어났다. 그녀는 사희를 통해서야 황제가 어젯밤 황후에게 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굉장히 뜻밖이었다. 묵용린은 태상황보다 더 예법을 철저히 지켰고 대의를 중시했다.

이번 대혼처럼 자기 성질대로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사봉봉을 싫어했지만 태상황의 말대로 이해득실을 따지며 그녀를 황후로 올렸다. 대의를 잇기 위해 황후에게서 자손을 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한데 첫날밤도 함께 하지 않고 황후를 독수공방하게 두다니.

하지만 월규는 묵용린을 비난할 수 없었다. 그녀가 뒤에서 황제가 놓치는 부분들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황후의 봉명궁으로 향했다.

오랜 시간 사봉봉을 만나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봐 왔던지라 낯설지 않았다. 태후께서는 사봉봉을 무척 좋아하셨다. 태상황께서도 직접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사봉봉을 보는 눈빛엔 늘 감탄이 서려 있었다.

그때, 그녀는 사봉봉이 황가에 시집올 거라는 걸 예감했다. 그 이유는 묵용성 때문이었다. 묵용성이 사봉봉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니 분명 그녀를 제 짝으로 얻을 거라 생각했건만. 사봉봉은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어 묵용린과 혼인하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월규는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묵용린이 자라는 걸 옆에서 지켜보았다. 어린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상황처럼 여인을 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이었다. 황제의 처첩이 된다면 부귀영화는 누릴 수 있겠지만 그의 차가운 마음은 감당해야 했다.

월규는 사봉봉이 의기소침한 채로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신혼 첫날밤에 독수공방하는 것은 여인에게 크나큰 상처가 될 일이었다. 그런데 사봉봉은 슬픔에 잠겨있기는커녕 오히려 맑은 기운을 잃지 않고 그녀를 웃으며 맞이했다.

“월규 고고, 오셨어요.”

월규는 그녀에게 예를 취했다.

“소인, 황후 마마께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사봉봉은 서둘러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

“앞으로 절대 이러지 마세요. 저는 월규 고고를 늘 웃어른으로 여기며 자랐어요. 이런 예는 제가 감당할 수 없어요.”

월규는 웃으며 말했다.

“궁중의 법도이니 이제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녀는 사봉봉을 훑어봤다.

“마마, 안색이 좋아 보이시네요.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는지요?”

“네, 잘 잤어요.”

사봉봉도 월규를 자세히 살폈다.

“고고께서는 안색이 별로 안 좋으세요. 어디 아프신 거 아닌지요?”

월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그동안 대혼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요. 아마 조금 피곤했나 봅니다. 며칠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기왕 대혼이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녀는 바로 그 일에 대해 언급했다.

“소인도 어젯밤에 마마께서 겪은 수모를 알고 있습니다. 황상께서는… 황상께서는 나름대로 고충이 있으십니다.”

“고고, 말할 필요 없어요. 저도 다 알고 있어요.”

월규는 조금 의아했다.

“알고 있으시다고요?”

“네.”

사봉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황상께선 제가 아닌 허씨를 황후로 생각했었잖아요. 한데 제가 그 자리에 왔으니 황상께서도 마음에 차지 않으시겠지요. 그러니 어젯밤에 황상께서 귀비 마마께 간 건 당연해요.”

“…마마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행입니다. 황상께서 좌상을 중용하시니 허씨 아가씨를 남다르게 대하시는 겁니다. 마마께서는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마께서는 황상의 정실이십니다. 미래에 황상께서 궁비를 얼마나 들이시든… 황후 마마는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마마께서는 그들과 신분이 다르십니다.

물론… 남편이 첩을 들이는 걸 좋아하는 여인은 없겠지만요. 첩을 많이 들이는 남자는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니죠. 그런데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좀 보십시오.

태상황과 태후께서는 천하의 모범이시고, 황후 마마의 부모님도 금슬이 좋으시죠. 영 대인께서도 기홍을 깊이 사랑하셨고, 가 대인은… 크흠… 그는 약간의 흠이 있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요. 그러니까… 부군을 찾으면 인품을 따져야 합니다. 새로운 것에 빠져 옛것을 버리는 그런…….”

월규 고고의 말을 듣던 사봉봉은 어리둥절했다. 이런 말씀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황제의 곁을 떠나라는 것인가? 어제 결혼했는데 오늘 당장 헤어지자는 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한편 월규는 제 말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입을 멈췄다. 사봉봉을 달래기 위해 온 것인데 왜 말이 이리로 온 것인가? 그녀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물론, 황상께서는… 보통 남자가 아니시지요. 황상의 혼인은 조정에 필요한 것이니까요. 어젯밤에 들어온 좌상과 우상의 천금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장차 다른 가문의 천금도 궁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황후로서 마마께서 너그럽게 봐주셔야 합니다. 마마, 소인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사봉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해해요.”

월규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봉봉은 총명한 아가씨였다. 하나를 말해 주면 열을 깨우쳤다. 단지 좀 아쉬울 따름이다. 이렇게 좋은 아가씨에겐 사랑을 듬뿍 줄 수 있는 부군이 제격인데. 월규의 두통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사봉봉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고고, 태의를 불러 보시죠.”

월규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돌아가서 좀 쉬면 괜찮을 겁니다.”

사봉봉은 복도까지 나와 월규를 배웅했다. 옆에 서 있던 금천아가 말했다.

“월규 고고는 참 좋은 분이시네요.”

사봉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의 곁을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야. 월규 고고, 기홍 고고, 그리고 녹하 고고… 모두 좋은 사람이지.”

잠시 후, 또 한마디 덧붙였다.

“좌상 가문 사람도 좋은 사람일 거야.”

금천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좌상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사봉봉이 말했다.

“난 그의 가족에게 감사해.”

황상이 좌상을 중용하니 허설령을 다르게 대하신다. 좌상 부인은 희낭을 매수하여 화장으로 그녀의 얼굴을 망치고 황제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허설령을 만난 적은 없지만, 미인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황제가 마상풍에 걸리지도 않을 터……. 어쨌든 그의 가족은 모두 좋은 사람이다.

* * *

처소로 돌아온 월규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수발을 드는 어린 궁녀가 얼른 사람을 보내 태의를 청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묵용린은 태의 노락원이 월규를 진맥하는 걸 보고 방해가 되지 않으려 멀찌감치 서 있었다. 태의가 진맥을 마치자 그제야 그가 물었다.

“고고는 어떠한가?”

노낙원魯樂源은 황제가 왔음을 그제야 알고 즉시 예를 취했다.

“월규 고고는 과로로 원기가 상했습니다. 소신이 기를 보하고 비장을 튼튼히 하는 탕약을 처방하겠습니다. 사흘간 탕약을 먹으면 곧 좋아지겠지만,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고 쉬면서 몸조리를 해야 합니다.”

황제는 비장과 원기가 상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화를 내며 왕장량을 질책했다.

“대총관이란 작자가 그간 무얼 하고 있었느냐? 이리 기절할 정도로 과로를 하게 하다니!”

왕장량 또한 말할 수 없는 고충이 있었지만 무릎을 꿇고 사죄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 소인의 죄입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태후와 태상황께서 떠난 뒤, 월규는 어린 황제를 친아들처럼 보살폈다. 혹 못 먹고 못 잘까… 추위와 더위에 몸이 상하진 않을까… 대혼을 준비하면서도 늘 마음을 놓지 못했는데 어찌 과로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황제는 월규가 괜히 쓰러지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무언가 일이 있는 듯하여 어린 궁녀에게 물었다.

“고고가 쓰러지기 전에 뭘 했느냐?”

그러자 어린 궁녀가 대답했다.

“고고께서는 황후 마마께 다녀오시다가 기절하셨습니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드디어 화근을 찾아냈다. 이놈의 장사꾼이 감히! 그녀를 가까이하는 자는 누구든 악운을 겪어야 했다.

사봉봉은 황후로 입궁하게 됐지만, 묵용린은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그는 승덕전에서, 그녀는 봉명궁에서 각자 제 삶을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니 서로 보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난 월규 고고가 기절한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에게 본때를 단단히 보여 줘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처벌해야 한단 말인가? 묵용린은 뒷짐을 지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권모술수를 부리는 방법과 사람을 매수하고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은 알지만 어린 여인을 상대하는 방법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두 바퀴를 서성거리다 멈춘 그는 사희를 불렀다.

“가서 황후를 불러오거라.”

사희는 즉시 대답하고 곧장 봉명궁으로 향했다. 황제가 부른다는 말에 금천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마, 분명 별로 좋은 일이 아닐 거예요.”

사봉봉은 의복을 정리했다.

“상관없어. 아무리 황제라 해도 내 꼬투리를 잡으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니까. 난 어제 궁에 들어왔는데 꼬투리 잡을 일이 뭐가 있겠어?”

말은 그렇지만, 그래도 금천아는 걱정을 가득 품을 수밖에 없었다.

승덕전에 도착하자 사희는 사봉봉에게 들어가길 청했다. 그때 금천아가 따라 들어가려 하자 그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금천아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째려보았지만, 사봉봉이 눈짓하여 그녀를 제지했다.

황제의 텃밭에서 그와 완강하게 맞부딪치는 건 그녀들만 손해를 보는 일이었다. 사봉봉은 충동적으로 행동해 불필요한 손해를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묵용린은 상주서를 읽고 있었다. 그녀는 느릿느릿 걸어가서 덕담을 건넸다.

“신첩이 황상께 문안드립니다.”

묵용린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일어나란 소리가 들리지 않아 고개를 들어보니 여전히 그는 상주서만 읽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듣지 못했다고 생각해 다시 문안 인사를 올렸다.

“신첩이 황상께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사봉봉은 묵용린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외에는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즉, 그는 지금 일부러 못 들은 척하며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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