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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47)화 (1,047/1,192)

제1047화

묵용린이 보기에, 허설령은 천하의 모후가 될 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정하고 중후한 아름다움이 그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황후의 모습과 잘 들어맞았다. 그녀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는데, 웬일인지 순간 사봉봉이 오늘 했던 섬뜩한 귀신 분장이 떠올랐다.

“황상, 황상…….”

허설령이 두 번이나 불렀을 때, 묵용린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음?”

허설령은 잔뜩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황상께서 아주 피곤하실 테니 일찍 쉬시어요.”

묵용린도 그러고 싶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는 일을 빨리 끝내는 게 더 중요했다. 그는 짧게 대꾸하고 일어나 두 팔을 벌리고 허설령이 그의 옷을 갈아 입혀 주길 기다렸다.

허설령은 속으로 감동했다. 황제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 화원이나 달빛 아래에서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지는 않았지만, 행동으로 그녀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다. 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느린 걸음으로 황제 앞으로 다가가서 그의 목 밑에 있는 옥 단추를 풀었다.

한데 그녀가 점점 다가올수록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속에서 올라오는 불편한 감정을 애써 참으며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허설령은 내가 좋아하는 여인이다. 그녀가 친근하게 대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다…….’

옥 단추가 풀리는 순간, 허설령의 손가락이 그의 목을 살짝 스쳤다. 그때 묵용린은 가슴을 심하게 들썩이며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허설령은 너무 놀라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황상, 왜 그러십니까? 신첩이 태의를 불러올까요?”

그건 오히려 상황을 악화하는 최악의 대처 방법이었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헛구역질이 올라왔는데, 그 속을 모르는 허설령이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풍기는 짙은 향기가 그의 코를 찔렀고 속을 더 부대끼게 만들었다.

“욱, 우욱.”

안 그래도 황제의 합방을 걱정하고 있던 왕장량과 사희는 방 안의 인기척을 듣자마자 곧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내 묵용린을 귀비 마마의 손에서 서둘러 구출해 냈다.

* * *

사봉봉은 얼마 자지 못하고 일어났다. 배고픔 때문이었다. 온종일 물도 마시지 못했다. 아까는 너무 힘들어서 배고픈 줄도 몰랐지만, 조금 자고 나니 피로가 풀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금천아는 사람을 불러서 그녀에게 은사면을 한 그릇 삶아 참기름을 살짝 뿌리고, 그 위에 절인 고기를 몇 점 얹어서 가져오라고 시켰다. 순식간에 방 안에 고소한 향기로 가득 찼다. 사봉봉은 먹는 모습이 어떤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머리를 박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방금 두 젓가락을 먹었는데 금천아가 입을 열었다.

“마마, 오늘 밤 황상께서 어느 궁전에서 머무셨는지 아십니까?”

사봉봉은 입안에 국수를 가득 물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황상이 어디서 잠을 잤든지 나와는 상관없어.”

금천아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

“승덕전에서 주무셨어요.”

사봉봉은 그녀가 전해 준 소식이 조금 뜻밖이었다. 당연히 귀비 마마의 궁전에서 묵어야 하는 것 아닌가?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그런 일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기에 더 질문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금천아는 원래 뜸을 좀 들이려 했지만, 자신의 마마께서 협조하지 않으니 먼저 입을 떼야 했다. 그녀는 좌우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마마, 황상께서 하필이면 귀비와 신방에 들었을 때 병이 나서 승덕전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사봉봉은 깜짝 놀라서 무언가를 떠올렸다.

“마상풍馬上風(성행위 중 갑작스러운 심장마비)?”

금천아가 허벅지를 탁 쳤다.

“맞아요. 바로 그거였어요. 소인이 소식을 들었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병명이 안 떠올랐는데… 역시 마마께서는 식견이 남다르십니다.”

사봉봉이 물었다.

“태의는 뭐라고 했대?”

금천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의는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리 심각한 건 아닌가 봅니다. 듣자 하니,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대총관과 사희가 뛰어들어 갔고 황제의 안색이 아주 안 좋았다고 합니다. 귀비 마마께서 태의를 부르자고 했지만, 대총관이 그대로 승덕전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사봉봉은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정말 귀하디귀한 천자였다. 재채기만 해도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심각한 일인데… 마상풍을 겪을 뻔하고도 태의를 부르지 않았다고? 설사 황제가 치료를 기피하더라도 대총관은 책임을 다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의혹은 의심으로 귀결되었지만, 그녀도 괜히 깊이 캐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심력을 상관없는 사람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 * *

묵용린이 승덕전에 돌아왔을 때, 그의 헛구역질은 이미 진정된 후였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침의로 갈아입은 그는 의자에 앉아서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는 이 년의 시간을 통해 허설령과 정을 쌓았다. 그는 그녀에 대해 매우 만족했고,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가 그의 숨겨진 병을 고칠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왜 예전과 똑같은 걸까? 여자에게 다가가기만 하면 그는 극도로 속이 불편하고 메스꺼워지며 헛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노력했지만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높았던 황제에게 오늘 밤에 벌어진 일은 정말 절망이었다. 아니, 오늘은 온종일 엉망진창이었다.

사봉봉에게 놀란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또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검푸른 눈망울, 그리고 핏빛으로 물든 입가가 떠올랐다. 그가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바로 그녀였다. 그의 신방에 화촉을 밝히지 못한 건 전부 그 여자 때문이다!

“황상.”

왕장량이 살금살금 들어오더니 말했다.

“진왕야께서 오셨습니다.”

묵용린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진왕 묵용택墨容澤이 들어오고 있었다. 왕장량은 냉큼 물러났다.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진왕은 초조하게 그를 바라봤다.

“어찌 된 일입니까? 왜 아직도 그런 겁니까?”

묵용린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육황숙, 짐의 병은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인가 봅니다.”

“헛소리!”

진왕은 나지막하게 일갈한 후, 의기소침해진 황제를 보았다. 또 마음이 누그러진 그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 육황숙을 믿으십시오. 제가 정상적인 남자라고 하면 정상적인 남자가 맞습니다. 이건 마음의 병입니다. 아마도 방법을 제대로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짐은 육황숙의 말대로 다 했습니다. 허설령과도 무려 이 년 동안 정을 쌓았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요. 그런데도 왜 이러는 겁니까?”

진왕은 의원이 아니지만, 이런 감정 방면의 전문가로 손꼽혔다. 그는 묵용린에게 물었다.

“좌상댁의 천금을 정말 좋아하십니까?”

묵용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 년 동안 귀비 마마와 몇 번이나 만나셨습니까?”

묵용린은 가만히 생각을 떠올렸다.

“두세 달에 한 번꼴로 만났습니다. 몇 번인지는 사희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이 일은 그가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녀를 만나지 않을 때 그녀가 떠오릅니까?”

“…국사를 처리하느라 바쁜데 짐이 그런 생각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만나고 나면 또 생각이 나십니까?”

묵용린은 어리둥절했다.

“만나고 나서 어떻게 또 생각이 납니까? 그게 정상입니까?”

“귀비 마마께서 황상을 화나게 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기뻤던 적이 있으십니까?”

“아시다시피, 짐은 비교적 기복이 없는 성격이라 희로애락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귀비 마마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아십니까?”

“여자는 다 똑같습니다. 연지나 향이 아니면 장신구 정도죠.”

“귀비 마마께 무언가 선물을 드린 적은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묵용린이 덧붙여 말했다.

“그래야 한다는 건 짐도 알고 있습니다.”

“뭘 선물하셨습니까?”

묵용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사희에게 물어보면 알고 있을 겁니다. 그것도 그가 책임지고 했습니다.”

진왕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이고, 우리 황상, 좋아한다면서 겨우 이 정도입니까? 제가 보기에 황상께서는 사희보다도 귀비 마마를 모르고 있습니다.”

묵용린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쨌든 그녀가 싫지는 않습니다.”

“싫지 않은 게 좋은 겁니까?”

“저는 그녀가 마음에 듭니다.”

“어디가 마음에 드십니까?”

“용모, 성품, 가문, 소양 등 모두 만족스럽습니다. 황숙도 아시지 않습니까? 부황께서 반대하지 않으셨으면 원래 짐은 그녀를 황후로 세우려고 했는데…….”

그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서 한숨을 쉬며 입을 닫았다. 진왕이 물었다.

“태상황께서 고르신 황후는 어떻습니까? 싫으십니까?”

“싫습니다.”

“왜 싫으십니까?”

“짐은 장사꾼의 딸이 싫습니다. 시정잡배, 속물, 위선자, 온몸에 돈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진왕은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면 황후 마마와 감정을 좀 키워 보면 어떻습니까?”

묵용린은 눈을 부라렸다.

“짐이 미쳤습니까? 그런 짓을 하게?”

진왕은 손사래를 쳤다.

“황상, 우선 너무 흥분하지 말고 들어 보십시오. 비록 지금은 황후 마마가 싫지만, 이 미움이라는 감정은 굉장히 강렬해서 어쩌면…….”

묵용린은 확고부동했다.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진왕은 황상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자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이 황숙이 볼 때, 황상께서는 귀비 마마께 별다른 감정이 없으십니다. 사람을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숙비淑妃도 계시지 않습니까?”

묵용린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육황숙이 보기에 짐이 귀비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까?”

“네,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진왕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항상 그녀가 그립고, 그녀가 매일 시야에 있길 원하며 곁에 있어도 또 보고 싶어야 합니다. 그녀를 보면 항상 즐겁고, 그녀를 더 기쁘게 할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녀가 화가 나면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해야 합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게 뭔지 찾아 선물도 열심히 챙겨 주고, 그녀가 싫어하는 걸 알아내 항상 조심스럽게 피해야 하며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일을 다 기억해야 하고…….”

묵용린은 진왕의 말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라 참을 수가 없었다.

“육황숙, 꼭 이래야 좋아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만약 어떤 여인이 이만큼 좋아진다면.”

진왕이 입가를 올리고 씩 웃었다.

“그녀에게 욕망이 싹트고, 그녀가 보고 싶을 겁니다. 그녀랑 입도 맞추고 싶고, 안아 주고 싶어집니다. 또 그녀랑 껴안고 뒹굴고 싶어질 때면 황상의 병은 씻은 듯 깨끗하게 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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