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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45)화 (1,045/1,192)

제1045화

금궁에서 나온 사봉봉은 자신의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걸 깨달았다. 바람이 불어오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 또한 성장했기에 더 이상 묵용린이 두렵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도 그동안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는 걸 그녀는 깜빡했다.

게다가 그는 황위에 오른 지 이미 사 년이나 되었다. 군왕의 기세를 단련한 덕인지 무의식적으로 그를 두려워하고 복종하게 만드는 위엄이 있었다. 금천아가 궁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사봉봉이 나오는 걸 보고 얼른 다가왔다.

“아가씨, 어땠어요? 얘기는 잘 되었어요?”

사봉봉은 마치 한바탕 전투를 벌인 것처럼 피곤한 나머지 손사래를 쳤다.

“돌아가서 얘기하자.”

마차 한 대가 내내 맑은 방울 소리를 내며 유유히 사부에 이르렀다. 좋은 소식을 고대하며 기다리던 사앵앵은 멀리서 마차가 오는 걸 보고 문발을 걷었다.

“봉봉아, 어찌 되었느냐?”

사봉봉은 그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최소한 아버지의 목숨은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그제야 사앵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으로 들어가며 다시 물었다.

“언제 풀어 준다고 하시더냐?”

사봉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상은 저에게 돌아가서 소식을 기다리라고만 했고, 다른 말은 없었어요.”

사앵앵의 심장이 또 쿵쾅거렸다.

“황상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네 아버지의 목숨은 위험하지 않은 줄 어찌 아느냐?”

“국구를 죽이는 건 아무래도 보기 좋지 않잖아요.”

“그렇다는 건… 황상이 어쨌든 너를 황후로 세울 거라는 거니?”

“제가 황후가 되지 않으면 명분이 서지 않아요. 그가 어떻게 사가상점에서 돈을 가져갈 수 있겠어요.”

“황상이 그런 뜻을 분명히 내비쳤느냐?”

“네.”

사봉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분명한 게 오히려 나아요. 괜히 숨길 필요 없잖아요.”

사앵앵은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네 아버지를 죽이진 않는다면, 혹 고문을 하는 건 아닐까?”

“그러진 않을 거예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어린 황제는 늙은 황제보다 훨씬 간사하단다.”

“이미 이야기가 다 되었는데 뭐 하러 쓸데없는 짓을 더 하겠어요? 그렇지만…….”

그녀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세웠다.

“이번 일로 그의 체면이 단단히 상했으니 쉽게 용서하지는 않을 거예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해요.”

사앵앵은 탄식을 쏟아냈다.

“오히려 화를 자초했구나.”

사봉봉도 후회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통해 한 가지를 깨달았어요. 천하에 왕의 영토가 아닌 곳이 없다고 하잖아요. 황제와 맞서 봤자 손해를 보는 건 우리예요.”

사앵앵은 낙담했다.

“그러면 그가 하는 대로 당하는 수밖에 없단 말이냐?”

“제 말은 드러내고 하면 안 된다는 거죠. 하지만 몰래 하는 건…….”

사봉봉은 사앵앵에게 한쪽 눈을 깜박이며 씩 웃었다.

* * *

사장풍이 잡혀간 걸 가장 기뻐한 것은 좌상부였다. 그건 바로 황후의 자리가 다시 허설령에게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직 대혼도 올리지 않았는데, 국구 될 사람을 감옥에 잡아넣었으니 좋지 않은 소문이 나는 게 당연했다.

봄볕이 은은하게 혼례복을 비추니 더없이 아름다운 붉은 색이 화사하게 빛났다. 황제가 암시한 바가 있으니 혼례복 위에 봉황이 수놓아져 있었다. 대홍빛 바탕에 금빛으로 봉황 한 마리가 상서로운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며 최고의 존엄과 영광을 나타내고 있었다.

좌상 부인은 빙글빙글 웃으며 혼례복을 바라보다가 냄새를 맡더니 어린 여종에게 분부했다.

“향기가 옅어졌으니 햇볕을 쬐고 나면 청아한 향으로 훈향하거라.”

알겠다고 대답한 여종이 다시 물었다.

“부인, 저 염홍색의 혼례복도 같이 훈향할까요?”

연홍색의 혼례복은 궁비의 혼례복이었다. 관례에 따라 황후의 혼례복만이 대홍색 바탕에 금빛으로 봉황을 수놓았다. 아무리 지위가 높은 궁비라도 연홍색 혼례복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조서가 내려진 후, 좌상부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딸을 입궁시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황제가 허설령에게 분명 황후 다음 가는 자리를 주리라고 믿었기에 서둘러 연홍색 혼례복을 한 벌 더 준비했다. 방금 만들어서 햇볕을 쬐진 않아도 되지만 훈향은 반드시 해야 했다.

어린 여종은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가 좌상 부인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다. 부인은 고함을 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린 여종은 즉시 깨닫고 자기 뺨을 한 대 때렸다.

“우리 아가씨는 황후이시니 당연히 그럴 필요 없죠. 소인이 잠시 말실수를 했습니다. 부인께 벌을 청합니다.”

빠른 여종의 반응 때문에 좌상 부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기분이 좋았기에 더 이상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관리인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부인, 궁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좌상 부인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조서가 벌써 내려왔단 말이냐? 얼른 사람을 보내서 아가씨를 불러오너라. 조서를 직접 받아야 한다.”

관리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상을 곁에서 모시는 사희 공공께서 오셨습니다. 얼른 가 보십시오.”

좌상 부인도 사희가 황제의 측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전청前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희는 좌상 부인이 들어오자 얼른 예를 취했다.

“소인, 부인께 경하드립니다.”

그 모습을 본 좌상 부인은 반색하며 말했다.

“사희 공공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황상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까?”

사희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대혼이 앞당겨져서 사흘 후로 정해졌으니 부인께서도 준비를 서둘러 주십시오.”

좌상 부인은 기쁜 소식이 들리자 깜짝 놀랐다.

“사흘 뒤에 대혼이라니? 길일을 다시 택하셨습니까?”

“예, 황상께서 또 무슨 기괴한 일이 생길지 아예 대혼을 앞당기자고 하셨고 흠천감에서 길일을 다시 택했습니다. 어쨌든 준비할 것은 다 준비되었으니, 앞당겨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공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혼례복 준비는 진작 끝나 지금 밖에서 말리고 있습니다.”

좌상 부인은 감개무량했다.

“혼례복을 지은 게 헛수고인 줄 알았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역시 될 일은 결국 이루어지는군요. 황상의 은혜에 힘입어 마침내 우리 가문이 황후를 배출하게 됐습니다.”

사희는 그제야 좌상 부인이 자신의 말을 오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부인, 조서는 며칠 전에 사부에 계신 천금께 내려졌다는 걸 혹시 모르십니까?”

좌상 부인도 어리둥절했다.

“그건 알고 있지만… 사 장군이 대리시에 끌려 들어갔지 않습니까? 그건 왜…….”

“사 장군은 오늘 풀려나셨습니다.”

좌상 부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형형색색으로 물들었고, 잠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소인은 우상댁에도 가 봐야 하기 때문에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가 버렸다.

좌상 부인의 얼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사장풍이 잡혀갔으니 황후의 자리는 당연히 자신의 딸에게 떨어진 줄 알았다. 한데 사희는 혼기를 알렸을 뿐 조서는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녀는 체면을 단단히 구긴 셈이다.

그녀는 정말 황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국구가 될 사람을 감옥에 처넣었는데도 사가의 천금을 황후로 맞이한다고? 이미 틀어진 관계를 잘 처리할 수 있다고? 게다가 대리시에 잡아넣은 사람들은 모두 중범죄자인데, 그걸 그냥 놓아준다고? 아무리 황상이지만, 최소한 혐의 심리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좌상 부인은 한참을 침묵에 빠졌다가 호통을 쳤다.

“뒷마당에서 옷을 말리고 있는 취운翠云에게 몽둥이 이십 대를 치거라!”

이건 모두 취운 그년 때문이다. 공연히 재수 없는 말을 하다니! 천한 노비를 단단히 혼내 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끓어오르는 화를 달랠 길이 없었다.

* * *

사장풍이 풀려나자 사부의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 사앵앵은 주자에게 폭죽 만 발을 대문에 매달아 터뜨리라고 했고, 이웃집 사람들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사금언은 투덜거렸다.

“이런 일은 은근슬쩍 넘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굳이 이웃들이 다 알도록 소란을 피울 일인가.”

사앵앵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가까운 이웃뿐만 아니라 임안성 전체가 이번 일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게 뭐 어때서? 황제도 손가락질 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데 우리가 겁낼 게 뭐가 있느냐?”

그녀는 쑥잎으로 사장풍의 몸을 털더니 그에게 화롯불을 건넸다. 그리고 막 솥에서 꺼낸 따끈따끈한 두부를 그의 입에 쑤셔 넣더니 말했다.

“이제 됐어요. 얼른 씻으시고 벗은 옷은 아하에게 갖다 버리게 해요. 온몸에 붙은 불운을 그렇게라도 털어 내야지요.”

기뻐하는 식구들을 뒤로한 채 사장풍은 조용히 목욕을 하러 갔다. 목욕을 마친 후, 그는 탁자에 앉아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그들은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사앵앵이 물었다.

“왜 그래요? 거기서 괴롭힘을 당했어요?”

사장풍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사봉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딸, 준비하거라. 사흘 뒤, 대혼을 올려야 한단다.”

다들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활짝 피어났던 웃음꽃은 비바람에 흩어져 앙상하게 시들고 말았다. 어쩐지 사장풍을 쉽게 풀어 주더라니! 이제 보니 대혼을 앞당겼구나.

그제야 사봉봉은 묵용린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그는 어두운 방에 갇히는 것보다 시집을 오는 게 더 두려운 거냐고 물었었다. 그는 그녀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 위해 대혼을 앞당긴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걱정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아버지, 전부 다 말씀해 주세요. 황상의 처벌은 뭐죠?”

“황상께서 서북 주둔지로 가라고 하셨다.”

사금언은 어안이 벙벙했다.

“저에게 가라고 명하신 게 아니고요?”

“너는 아직 어려. 도성에 있거라.”

“아니요, 제가 황제를 찾아뵙고 말씀드려 아버지께서 남도록 하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사장풍이 호통을 쳤다.

“너는 어려서 걱정할 것이 못되기에 황상께서 너를 용납하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네가 도성에 남아 있을 줄 아느냐? 이 아비는 서북에 친구가 많으니 돌아가서도 금방 적응할 것이다.

이 년쯤 지나면 황상께서 노여움을 푸시고 아비를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금언아, 아비가 곁에 없으니 어머니를 잘 보살피거라. 봉봉은 궁궐에 있으니 가끔씩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잘 챙겨 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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