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4화
묵용린이 한참 상주서를 읽고 있는데 누군가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러더니 아무 말도 없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시선을 살짝 든 그는 즉시 어필을 쾅 하고 탁자에 내려놓으며 고함을 쳤다.
“누가 들어오라고 했느냐?”
사봉봉과 다시 마주하게 된 건 몇 년만이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오래전 사라져 버렸지만 그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순간 화가 치솟은 그는 고함을 질렀다.
“누가 이 여인을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냐? 밖에 아무도 없느냐!”
그가 소리를 지르자 곧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한데 가장 앞에 선 사람은 묵용청양이었다. 그녀는 얼른 사봉봉 옆에 무릎을 꿇었다.
“황형, 제가 들어오게 했어요.”
영십칠과 사희도 함께 들어와서 그들 뒤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묵용청양을 제외하고 모두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다. 묵용린은 역시 청양만이 이렇게 소란을 피우며 들어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아랫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영십칠과 사희를 밖으로 내보냈다.
“너희는 나가 있어라. 너희들의 죄는 짐이 나중에 물을 것이다.”
영십칠과 사희가 물러난 후, 그가 또 묵용청양에게 말했다.
“짐이 너를 총애한다고 해서 어떤 짓을 해도 처벌을 받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는 것이냐?”
묵용청양은 큰 눈을 깜박거리며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인정했다.
“신매,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입으로만 말하면 뭐하나? 조금도 잘못을 모르는 것 같은 그녀의 태도에 묵용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그가 정작 단단히 혼을 내고 싶은 사람은 옆에 무릎을 꿇은 이였기에 지금은 여동생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잘못을 안다면 이제 일어나라.”
“일어나지 않겠어요. 신매는 황형에게 사 장군을 풀어 줄 것을 간청 드립니다.”
“무엄하다!”
이때 문발을 젖히고 또 한 사람이 들어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제가 황형에게 사 장군을 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묵용린은 남동생까지 달려와 사정하는 걸 보자 표정이 굳어졌다.
“성아, 지금 뭐하는 짓이냐?”
새하얀 장포를 입은 묵용성은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머리를 올린 후 자색 관으로 묶고 있었다. 그는 옥처럼 온화한 기질을 드러내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묵용청양은 묵용성이 사봉봉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치장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묵용성은 황제가 무서웠지만, 사봉봉 앞이기에 물러서지 않고 다시 한번 말했다.
“신제, 황형에게 사 장군의 구명을 청합니다.”
묵용청양은 동생을 향해 웃으며 슬며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묵용성은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묵용린은 화가 나서 탁자를 한 번 더 내리쳤다.
“너도 저 아이처럼 정신이 나간 것이냐?”
그는 손가락으로 묵용청양을 가리켰다. 그런데 묵용성은 사봉봉을 말하는 줄 알고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묵용린이 그들에게 한바탕 욕설을 퍼부으려던 순간, 또 다시 문발이 걷어졌다. 이번엔 가동이 들어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소신, 사 장군을 풀어 주시길 황상께 간청합니다.”
“…….”
묵용린에게 있어서 가동은 남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었고, 한때는 양아버지라 불렀다. 나중에 가난청이 그의 곁으로 왔을 때, 가난청을 친동생으로 여겼다. 그에겐 가동은 스승이며 친구인 동시에 아버지인, 정말 친밀한 사이였다.
“가 대인, 어찌…….”
“황상, 사장풍은 소신의 고향 친구로 소신과 친분이 얼마나 두터운지 황상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소신, 황상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묵용린은 좀 혼란스러웠다. 하나둘 달려와 사정하다니… 그는 참으로 황당했다.
그때, 또 문발이 걷히더니 가소타가 뛰어들어 와 주위를 멍하니 둘러봤다. 마치 자기가 어디에서 무릎을 꿇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그녀는 올해 열두 살이 되었는데,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았다. 땅딸막하고 통통한 얼굴에 포동포동한 몸매가 아직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녀는 황제를 보더니 눈웃음을 치며 활짝 웃었다.
“황제 오라버니께 문안 인사를 드려요.”
가동이 딸에게 눈짓을 보내자 가소타가 무릎을 꿇고 애교스럽게 말했다.
“황제 오라버니께서 사 장군을 풀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가동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황제 오라버니가 아니라 황상이라고 불러야 한다. 공주 전하만이 황상을 오라버니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어찌 아비의 말을 안 듣는 것이야?”
가소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깜빡 잊었어요.”
“다음엔 꼭 기억하거라.”
“네, 알겠어요.”
그들이 아무리 목소리를 낮춰도 실내가 조용했기에 다들 한 글자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묵용청양은 그들을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지금 그런 말이나 할 때예요?”
방 안은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제 더 들어올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번엔 가난청이 안으로 들어왔다. 묵용린은 다소 의아했다.
“자네도 사장풍을 위해 사정하러 온 것인가?”
가난청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버지와 여동생을 힐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소신 역시 황상께서 사 장군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가소타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가난청의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방금 전에 청양공주에게 꾸지람을 들은 가소타는 똑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고 그에게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의 눈짓을 못 알아들은 그는 여동생의 눈에 먼지가 들어간 줄 알고 허리를 굽혀 바람을 불어 주었다. 가소타는 총명한 자신의 오라버니가 이렇게 아둔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답답해하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무릎을 꿇어야죠. 부탁하는 사람은 부탁하는 태도를 보여야 해요.”
묵용린은 자신의 앞에 펼쳐진 난리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네 오라버니는 무릎 꿇지 않아도 된다. 짐이 즉위할 때, 그에게는 짐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도록 윤허했다.”
가소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요? 우리 아버지도 무릎을 꿇으셨잖아요.”
묵용린이 말했다.
“네 오라버니는 하늘이 내린 인재이고, 그런 천재는 존중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
가동은 갑자기 부끄러워져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에 어쩔 줄 몰랐다……. 묵용청양은 황당한 듯 가소타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런 걸 논의할 때야?”
가소타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실내는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사봉봉을 빼고 모든 사람들은 묵용린만 바라보며 그의 대답만 기다렸다.
묵용린은 심정이 좀 복잡했다. 여기 꿇어앉은 사람들은 사봉봉을 제외하면 모두 자신히 지극히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그가 비록 사장풍을 하옥했지만, 정말 그를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봉봉이 이들을 부추겨서 그를 이리 압박하다니… 사봉봉에 대한 미움이 한층 깊어졌다. 심지어 다들 한마디씩 할 때 그녀 혼자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게 더 불쾌했다. 마치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듯 사봉봉이 입을 열었다.
“황상, 소녀, 황상과의 독대를 청합니다.”
묵용린은 즉시 독대를 허락했다. 많은 이들과 대치하고 있다간 저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기에 그는 얼른 이들을 물렸다.
“다들 우선 나가 있게.”
묵용청양의 목적은 사봉봉과 묵용린이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하는 것이었기에 그녀가 얼른 가동을 일으켜 세웠다.
“황형, 그러면 대화를 나누세요. 끝나면 다시 들어와서 무릎을 꿇을게요.”
묵용린은 귀찮다는 듯 어서 나가라며 손을 내저었다. 사람들이 다 나가자 의자에 앉은 묵용린이 여유를 되찾고 느긋하게 사봉봉을 바라봤다.
“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사봉봉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모든 잘못은 소녀에게 있습니다.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낸 것도 소녀입니다. 아버지와 전혀 상관없으니 제발 아버지를 풀어 주시고 소녀를 황상의 뜻대로 처벌하십시오.”
말을 마친 그녀는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리고 오래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더 없이 순종적인 태도에 묵용린의 안색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 말은 사 장군을 대신해 감옥살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사봉봉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소녀를 황상의 뜻대로 처벌하십시오.”
“감옥에 들어가고 싶은 것이냐? 짐과 혼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사봉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녀는 단지 부모님이 걱정될 뿐입니다.”
“짐이 네 어미를 잡아 가두지는 않았느니라.”
“저의 어머니 성격은 황상께서도 아마 들은 바가 있으실 겁니다. 만약 아버지께서 돌아오지 못하시면, 소녀 감히 장담하는데, 어머니께서 무슨 짓을 저지르실지 알 수 없습니다.”
묵용린이 두 눈 가늘게 뜬 채 물었다.
“지금 짐을 협박하는 것이냐?”
“소녀가 감히 어찌 황상을 협박하겠나이까.”
“네가 감히 못하는 게 어디 있느냐?”
묵용린은 콧방귀를 뀌었다.
“네 배짱이 대단하단 건 짐도 이미 알고 있다.”
사봉봉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하지 않았다. 묵용린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봄빛이 한없이 좋았지만, 그의 마음은 결코 좋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물었다.
“짐이 너를 황후로 맞이하려는 이유를 아느냐?”
“소녀도 알고 있습니다.”
묵용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면 어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겠구나.”
“황상께서 원하시면 사가상점은 전력을 다해 기꺼이 황상을 돕겠습니다.”
“좋아.”
묵용린이 말했다.
“오늘, 네가 한 말을 반드시 기억하거라.”
이야기가 끝났지만, 묵용린은 그녀에게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고개를 들거라.”
사봉봉은 그의 말대로 고개를 들었다. 비록 그녀가 그를 우러러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지극히 평온했고 비굴하지 않았다. 묵용린은 그녀가 절대로 쉽게 다룰 수 없는 여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도대체 그녀는 무슨 배짱으로 그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일까?
“넌 무엇이 제일 두려우냐?”
사봉봉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잠시 후에 대답했다.
“어두운 방에 갇히는 게 두렵습니다.”
묵용린은 피식 웃었다.
“짐이 너를 어두운 방에 가두어 보았지만, 네가 겁을 먹은 건 본 기억이 없다.”
“소녀, 애써 침착한 척한 것입니다. 사실은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녀는 주동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그의 손에 넘겨서 그가 자신을 마음대로 주무르게 했다. 그녀는 강력한 권세 앞에서는 약한 척해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묵용린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바라봤다.
“너는 어두운 방에 갇히는 것보다 짐에게 시집오는 걸 더 두려워하는구나.”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며 냉랭하게 웃었다. 사봉봉의 평온했던 얼굴에 마침내 한 가닥 균열이 생겼다. 놀라 눈을 치켜뜬 그녀는 다시 눈빛을 아래로 눌러 감정을 숨겼다.
“일어나라.”
묵용린이 마침내 말했다.
“짐은 네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돌아가서 소식을 기다리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