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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42)화 (1,042/1,192)

제1042화

사장풍이 입을 열자마자 나 감령은 곧장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황상이 조서를 내리기 전, 모든 이들은 좌승상의 딸이 황후로 책립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황상이 그런 뜻을 여러 번 내비쳤기 때문에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그러다 별안간 사 장군의 딸 사봉봉이 혜성처럼 나타나더니 허설령을 가볍게 제쳐 버렸다. 이 소식에 다들 화들짝 놀랐다. 사 장군은 무관인 데다가 성 밖에서 주둔하는 이였고, 좌승상은 황제 곁을 지키는 최측근이었다.

좌승상의 능력이라면 이 일을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에 사 장군은 분명 서둘러 대혼 날짜를 정해 달라고 청하러 온 것일 터. 대혼만 치르고 나면 사 장군의 딸은 무사히 황후가 될 것이다.

“장군, 마음 놓으세요.”

그가 손을 금덩이 위에 올려 두며 슬쩍 힐끔거렸다. 역시 그의 손바닥보다 컸다. 그가 눈이 가늘어질 만큼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일이야 쉽지요. 황상께서도 이 년 전에 대혼 준비를 마치셨으니 다른 건 전부 다 준비된 셈입니다. 흠천감에서도 진작부터 다음 달 길일을 정해 두었습니다. 장군께서 더 이른 날짜를 원하신다면 이번 달에도 가능합니다.”

그는 금덩이를 자신의 앞쪽으로 슬쩍 끌어갔다. 그때 사장풍이 그의 손을 막았다.

“잠시만, 감령. 지금 내 뜻을 오해했네. 난 자네에게 시일을 늦춰 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네.”

나 감령은 잠시 고민하다 제 무릎을 탁 쳤다. 대혼 땐 합방을 해야 하니 달거리 날짜를 피하려고 그런 거구나!

“알겠습니다. 하면 말씀하십시오. 길일을 언제쯤으로 정하면 좋겠습니까?”

사장풍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령이 보기엔 내년도 가능하겠나?”

나 감령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 내년이요?”

그제야 간단한 일이 아닌 걸 깨달은 그는 금덩이에서 곧장 손을 거두곤 파도가 치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지금은 초봄인데 내년이라니요? 황상께 어찌 그 소식을 전한단 말입니까. 소관은 못 합니다!”

사장풍이 잠시 고민하다 손바닥을 뻗으며 물었다.

“다섯 달은?”

나 감령은 번뜩이는 금덩이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최대 석 달입니다! 더는 안 됩니다.”

사장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석 달로 하지.”

나 감령이 곧장 금덩이를 끌어안았다. 사장풍의 눈빛에 나 감령은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큰 금덩이는 생전 처음 봅니다.”

나 감령의 재물욕은 모두가 다 알았다. 사장풍은 아무 말 없이 웃으며 공수를 한 뒤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가 나 감령의 욕심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나 감령은 사장풍이 어째서 길일을 미루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 일로 좌승상이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좌승상에게도 한몫 챙기려 했다.

조서가 내려진 날, 사장풍 집안도 무너져 내렸지만 좌승상의 집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허설령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흐느꼈다. 마음이 아팠던 좌승상 부인은 허장우를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쳤다. 물론 허장우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 분명 다 정해진 일 같았는데… 어찌 갑자기 일을 틀었단 말인가?

그는 황제를 찾아가지 않고 혼자 화를 삭였다. 그렇게 며칠 동안 굳은 표정으로 지내고 있는데 하인이 나 감령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했다. 그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얼 하러 왔단 말이냐? 집에 없으니 그만 돌아가라고 전하거라.”

하인이 명을 받잡고 나가려는데 다시 허장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되었다. 들어오라고 하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나 감령이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소관. 좌승상을 뵈러 왔습니다.”

허장우가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나 감령이 본관을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나 감령이 방 안의 하인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자 허장우가 서둘러 하인들을 모두 내보냈다. 문이 닫히자 허장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젠 말할 수 있겠지?”

나 감령은 우선 자신의 충심을 한바탕 읊은 뒤에야 하려던 말을 꺼냈다. 애당초 황상은 허씨 아가씨를 마음에 들어 하셨는데, 갑자기 나타난 사씨 아가씨가 황후의 자리를 빼앗다니. 제삼자인 그가 봐도 황당한 일이었다.

그는 우선 좌승상에게 충성을 다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허장우도 나 감령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공연히 아첨할 리 없으니 돈을 바라고 온 게 틀림없었다.

“해서 나 감령에게 달리 방법이라도 있는가?”

나 감령이 알랑거리며 웃었다.

“황상께서 가장 신임하시는 분이 좌승상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있단 말입니까? 조서가 내려졌지만, 되돌릴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대혼 날짜를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우선 혼사 일을 미루면 황상께서 다시 생각하실지도 모르잖습니까? 승상께서는 이 방법을 어찌 보십니까?”

허장우가 한참 고민하다 물었다.

“얼마나 미룰 수 있는데?”

나 감령이 손가락 세 개를 뻗으며 말했다.

“석 달은 미룰 수 있습니다.”

허장우가 알기로 황제는 다음 달에 대혼을 치르려 준비 중이었다. 만약 대혼을 석 달이나 미룬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했다. 그는 잠시 고민한 뒤 근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흠천감에서 이미 다음 달로 길일을 예측하지 않았는가. 황상껜 어찌 말씀드리려고?”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상께는 소관이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가에서 석 달이나 기다리려 할지 모르겠군.”

“그건 마음 푹 놓으십시오. 안 그래도 사 장군이…….”

나 감령은 순간 마음이 급해서 입을 잘못 놀릴 뻔했다. 그가 서둘러 말을 고쳤다.

“흠흠, 사실 사가에선 그리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길일은 흠천감에서 정하는 것이니 황상께서 동의하시면 사 장군도 반대하진 못할 것입니다.”

재빨리 말을 바꾸긴 했지만, 허장우 같이 노련한 사람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허장우는 나 감령이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하면 나 감령이 힘 좀 써 주게.”

허장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가 원하는 걸 내어 줘야 하는 때가 분명한데, 허장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 감령은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실은 하려면 할 수 있는 일이긴 한데… 흠천감에 사람이 많으니 워낙 의견이 분분해서…….”

허장우가 웃으며 말했다.

“암, 나 감령에게 헛고생을 시킬 순 없지.”

그가 하인을 불러 은자 스무 냥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나 감령에게 술을 사 주라고 분부했다. 나 감령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은원보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손을 내밀었다. 좌승상을 위해 이렇게 큰일을 해 주는데 고작 은자 스무 냥을 준다고?

하지만 은자를 돌려줄 패기는 없었기에 그저 자신을 위로했다. 어쨌든 사 장군에게 금덩이를 받았고 좌승상에게 스무 냥을 더 얻지 않았는가?

* * *

이튿날, 나 감령은 길일을 황제에게 내밀었다. 예전의 날짜보다 조금 미뤄지긴 했지만, 묵용린 또한 사봉봉을 세우는 게 썩 마음에 차지 않았기 때문에 대혼이 미뤄지는 걸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묵용린은 별말 없이 나 감령이 제시한 길일을 수락했고 예부로 넘기라고 분부했다.

소식을 접한 허장우는 자신의 추측에 더욱더 확신을 가졌다. 나 감령처럼 탐욕적인 자가 고작 스무 냥에 황제의 대혼 길일을 바꾸다니. 게다가 자신을 찾아온 게 어제인데 오늘 바로 날짜를 바꾸었다? 참으로 빠른 일 처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정도 일이라면 그를 찾아와 계속 은자를 요구해야 하는 게 아니던가. 평소 나 감령의 성향과는 너무 동떨어진 행태였다.

게다가 나 감령은 무의식중에 입을 잘못 놀렸다. 분명 이 일은 사씨 집안과도 관련이 있을 터. 설마 그쪽에서 날짜를 미루려는 것이란 말인가?

그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로서는 너무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좋은 일에 도리어 날짜를 미루다니? 날을 미뤘다는 건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란 말인가?

그는 방 안을 몇 바퀴나 서성인 끝에 제자리에 멈춰 섰다. 사봉봉은 그도 제법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출가를 하지 않은 여인이지만, 늘 남들에게 얼굴을 드러내며 서슴지 않고 교제했다. 설마…….

생각이 여기에 미친 그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정말 그러하다면 사봉봉은 황후에 자리에 오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미간을 느슨히 풀었다. 연일 쌓여 있던 화가 단번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증거를 찾아 황제 앞에 내밀면 자신의 딸이 황후 자리에 오를 것이다.

허장우는 좌승상의 위치에 있는 만큼 인맥이 넓었다.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사장풍이 나 감령의 저택에 찾아갔다는 걸 알아냈다. 그 말인즉슨, 나 감령은 분명 사장풍의 제안을 승낙하고 돈을 더 벌기 위해 그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 나 감령이 그렇게 빨리 일을 처리할 수밖에.

사봉봉은 여전히 거리낌 없이 밖을 돌아다녔다. 허장우는 몇 차례나 그녀를 감시했지만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사봉봉이 다른 사내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면 어째서 길일을 미룬단 말인가?

증거가 없는 한 그도 함부로 이 일을 꺼낼 수 없었다. 사실 여인의 순결을 증명하는 건 매우 쉬웠다. 궁 안에는 경험이 많은 마마嬷嬷들이 널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사씨 집안에선 군주를 기만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가? 허장우는 이리저리 고민한 끝에 길일로 구실을 잡기로 했다.

흠천감에는 감령 외에도 소감, 오관사, 감승 등이 있었다. 비록 나 감령보다 아랫사람이지만, 간지干支나 음양오행 등으로 길일을 계산하는 데는 다들 능통했다. 더구나 그런 것들은 현묘하고 신비한 것들이라 딱히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씨 집안엔 재력이 있었지만 그는 그만큼의 돈은 없었다. 하지만, 권세를 등에 업고 있으니 늘 그랬듯 누군가 그를 대신해 일을 처리해 주었다.

흠천감의 두 소감이 함께 황상을 찾아가 이 일을 고했다. 나 감령이 사씨 집안의 돈을 받아 길일을 석 달 뒤로 미루었다는 것과 함께 사실 다음 달 길일이 더 좋다는 말을 전했다.

그 말에 묵용린은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당연히 사씨 집안에서 어떤 생각으로 길일을 미뤘는지 알고 있었다. 시간부터 벌고 방법을 모색할 생각이었겠지. 무려 황제인 그가 이렇게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다니 정말인지… 구족을 멸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그는 당장 나 감령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려 두말 않고 곧장 그를 고문했다. 아무리 재물을 탐하는 나 감령이라고 한들 목숨이 더 중요했다. 그는 결국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모든 책임을 사장풍에게 떠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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