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1화
사앵앵과 사장풍, 사봉봉 모두 사금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사금언은 순간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말을 마치자마자 후회가 된 그는 얼굴을 붉히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 말은… 황상께서는 무서우니 누이가 시집을 가면 힘들겠지만, 청양 전하는 좋은 분이니 그런 전하의 부마가 되는 건… 그러니까 제 말은 전 청양 공주가 겁나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되었다.”
사앵앵이 그의 말을 끊었다.
“네 말뜻은 이미 충분히 알았어. 넌 청양 공주가 좋단 말이잖니.”
귀까지 빨개진 사금언이 애써 그 말을 부인했다.
“아녜요, 제 말은…….”
“꿈도 꾸지 마.”
사앵앵이 못 박아 말했다.
“나와 네 아버지, 누이도 다 반대하는 일이니까.”
강제로 그녀와 같은 진영에 묶인 사장풍과 사봉봉은 서로를 힐끔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금언이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왜요?”
“이 어미는 널 부마로 만들 생각 없어. 평생 공주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살려고?”
사장풍은 화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목청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괜한 걸로 언쟁하지 마시오. 지금 금언이 부마가 되는 일을 상의하는 자리가 아니잖소.”
* * *
조서가 내려진 뒤에야 사앵앵은 묵용청양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녀는 대총관 왕장량이 목소리 높낮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조서를 읽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이미 새하얘져서 그저 대총관의 두 입술이 붙었다 벌어지는 모습만 지켜볼 뿐, 단 한 글자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왕장량이 조서를 다 읽자 사봉봉이 앞으로 나아가 조서를 받았다. 왕 대총관은 허리를 숙이며 사봉봉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봉봉 아가씨, 경하드립니다. 대혼이 지나면 소인이 호칭을 바꾸어 마마라고 불러 드리겠습니다.”
사봉봉은 평온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예를 갖췄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앵앵은 오랜 시간 장사를 하면서 적잖은 풍파를 겪었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충격이 강했다. 평소 호탕하고 시원시원하던 사 주인장은 굳은 얼굴로 말뚝처럼 바닥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왕장량이 사장풍에게 물었다.
“사 주인장은 너무 기뻐 저리되셨습니까?”
사장풍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게 돈 봉투를 찔러 주며 웃는 낯으로 배웅했다. 조서는 곧 탁자에 놓였다. 이제 이 일은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는 일이 된 것이다. 사앵앵은 딸을 안고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봉봉아, 어찌 이리 기구한 팔자란 말이냐!”
황후가 뭐라고… 수많은 여인과 한 사내를 두고 쟁탈을 해야 하지 않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훗날 사봉봉이 아이를 낳아 사가 상호의 대를 이을 수 있도록 데릴사위를 구해 줄 생각이었다.
한데 이젠 다 헛된 꿈이었다. 딸아이의 행복을 망친 건 물론이거니와 가게를 이을 수도 없었다. 황후가 낳은 아들은 당연히 황제가 될 테지. 어쩌면 즉위도 하기 전에 이복형제들에게 음해를 당할지도 몰랐다. 그녀의 외손자도 기구한 팔자를 타고나는 건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사앵앵은 사봉봉을 끌어안고 목 놓아 울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봉봉도 요행을 바랐지만 막상 조서가 내려지니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사앵앵을 먼저 위로했다.
“어머니, 황후가 되면 되죠. 어려울 게 뭐 있어요. 울지 마세요. 이웃들이 듣고 무슨 일 난 줄 알겠어요.”
사장풍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곧장 문을 닫았다.
“괜찮다. 울게 내버려 두거라. 울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테니까. 하인들에게 대문도 다 닫으라고 했으니 들리지 않을 거다.”
그의 말에 사앵앵은 오히려 울음을 그치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녀가 사장풍에게 물었다.
“이제 어떡할 거예요?”
사장풍이 두 손을 펼치며 말했다.
“나라고 어찌하겠소? 조서까지 내려졌는데 혼인하는 수밖에.”
“안 돼요. 봉봉이는 입궁 못 시켜요. 우리 딸을 고생길로 보낼 순 없어요.”
“어머니, 황궁이 호랑이 굴도 아닌데요, 뭐. 예전에 태후께서 계실 땐 어머니도 자주 가셨잖아요.”
“네 말대로 그건 예전이잖니. 어린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거니? 어릴 때 널 가둔 사람이야. 황제는 예전부터 널 마음에 안 들어 했잖니? 분명 태황제의 입김으로 널 황후로 맞으려는 거라고. 분명 널 업신여길 거다.
고작 우리 사이에 궁벽 하나 가로막히는 것뿐이지만, 그 궁벽은 천연의 요새나 다름없어서 이 어미와 아비는 들어갈 수도 없어. 널 도와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단 말이다. 너 홀로 그 깊은 궁 안에서 지낼 걸 생각하면 이 어미의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
게다가 넌 첩을 들이는 사내에게는 시집을 가고 싶지 않다고 했잖니. 하지만 어린 황제는 셀 수 없이 많은 부인들을 들일 거야. 부군이 널 아껴 주지도 않고, 첩은 넘쳐나서 온종일 난리를 치고. 그런 삶을 어찌 살아간단 말이야…….”
사앵앵은 또다시 한바탕 울고 싶었다. 사봉봉은 고개를 숙인 채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한테 시집을 간다고 전부 다 불행하게 사는 건 아니잖아요. 태후께서는 아주 잘 지내시는 것 같은걸요.”
“그건 경우가 다르지.”
사앵앵이 말했다.
“옛 황상은 교활하긴 해도 일편단심이었다. 처를 목숨처럼 아끼는 걸 온 세상이 다 알았다고. 그런데 어린 황제가 그런 사람일 것 같니? 네 아비도 들었다잖니. 원래는 좌승상의 딸을 황후로 들이고 우승상의 딸을 귀비로 들이기로 했었다고 말이다. 한 번에 둘이나 들이려는 사람인데 퍽이나 속을 안 썩이겠다. 내가 볼 땐 널 황후로 책립한다고 해도 그 두 여인 또한 함께 입궁시킬 게 분명해.”
사장풍이 말했다.
“상대는 황상이요. 일반 백성들과는 비교할 수 없소.”
사앵앵이 콧방귀를 뀌었다.
“차라리 일반 백성 집안에 시집보내면 좋겠어요.”
말을 마친 그녀가 별안간 눈을 반짝였다.
“그럼 이렇게 해요. 조서를 다시 돌려보내요! 봉봉이는 이미 정혼을 했고 날까지 잡았다고요! 그리고 곧장 혼사를 치르고요. 아무리 황상이라도 강제로 빼앗진 못할 거 아니에요?”
사장풍이 말했다.
“이미 조서가 내려졌으니 만천하가 다 아는 일이요. 한데 누가 감히 봉봉이를 부인으로 맞으려 하겠소? 당신은 이 일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소. 아무리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한들, 다른 이까지 이 위험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소?”
사앵앵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제가 황상을 찾아가서 더는 황상皇商을 하지 않겠다고 할게요.”
“황상이 신경 쓰는 건 황상皇商이 아니오.”
사앵앵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럼 까짓것 황상한테 재산을 절반 나눠 주고 봉봉이를 찾아오는 걸로 해요.”
이번엔 사봉봉이 반대했다.
“안 돼요. 우리 돈을 왜 황상한테 공으로 줘요? 그럴 수는 없어요. 그렇게 절 되찾아 오신다고 하면 전 궁에 들어갈 거예요.”
“돈은 다시 벌면 되지만, 널 잃을 수는 없어.’
사봉봉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다시 생각해 봐요.”
“또 무슨 방법이 있겠어?”
사앵앵이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였다.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사봉봉이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창가를 비추며 눈부신 빛을 흩뿌렸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시간을 끌어요. 날짜가 아직 정해진 건 아니니까요. 아버지, 흠천감欽天監(천문ㆍ역수ㆍ점후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에 있는 사람한테 돈을 찔러 줘서 길일을 늦춰 달라고 해 주세요. 가장 좋은 방법은 올해 길일을 고를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시간을 벌어 놓으면 천천히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사장풍이 말했다.
“그건 해 볼 만하구나. 하지만 내년까지 미룰 수는 없을 거다. 황상께선 원래 이 년 전 대혼을 치르셨어야 해. 언관들도 오래전부터 재촉했으니 흠천감에서도 감히 오래 미룰 수는 없을 거다. 그러나 조금 미루는 건 분명 문제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이 일은 아비에게 맡겨.”
사앵앵이 말했다.
“돈은 걱정하지 말고 써요. 은자야 얼마든 있으니까요. 흠천감 사람이 승낙하지 않거든 승낙할 때까지 돈을 쏟아부어요.”
* * *
사장풍 가족이 근심에 잠겨 계획을 세우는 동안, 왕장량은 궁에 돌아와 묵용린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황상, 사씨 아가씨께서 조서를 받으셨습니다.”
당연히 받아야지. 묵용린은 사봉봉이 감히 조서를 거부할 배짱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기뻐하더냐?”
왕장량은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라 곰곰이 되짚은 끝에 대답했다.
“그래도 기뻐하신 것 같긴 합니다. 아가씨께서 워낙 침착한 성격이라 얼굴에 기쁜 기색을 드러내진 않으셨지만요.”
묵용린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웃지도 않았다는 건 분명 싫었다는 것이다.
“사 장군과 사 주인장은 뭐라더냐?”
왕장량은 황제가 묻는 말에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사 장군은 기뻐하는 기색이었습니다. 소인에게 상으로 돈 봉투까지 주었습니다. 사 주인장은 너무 기쁜지 조금 멍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장량의 말에 사앵앵도 이 혼사를 원치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묵용린은 사앵앵과 사봉봉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모녀가 다 교활하고 간사했다. 두 사람 모두 낙담했다니… 오히려 그는 마음이 더 편안해졌다.
아마 대혼 날이 되면 사앵앵 모녀는 더 낙담할 것이다. 감히 황제에게 시집오는 걸 원치 않다니! 대체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란 말인가?
* * *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더니, 사장풍이 꺼낸 건 은자가 아니라 사람도 때려죽일 수 있을 정도의 금덩이였다. 나羅 감령은 두 눈을 번득이며 슬쩍 탁자 아래에서 손을 펼쳐보았다. 금덩이는 그의 손바닥보다 더 큰 것 같았다.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누가 최고 갑부 아니랄까 봐… 단번에 금덩이를 꺼내다니 그에겐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큰 금액이라면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는 탁자 밑에서 두 손을 꽉 맞잡은 채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사 장군께서 소관에게… 맡기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감령도 알다시피 황상께서 조서를 내리셨네. 우리 딸아이가…….”
“암요, 암요.”
나 감령이 황급히 공수를 하며 말했다.
“아직 장군께 축하 인사를 못 드렸군요. 집안에서 황후 마마가 나오시다니… 가문의 영광이 아닙니까. 앞으로 소관이 장군을 국구라 불러 드려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