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040)화 (1,040/1,192)

제1040화

“신은 싫습니다.”

영안이 묵용린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태도는 공손해 보였지만, 표정은 몹시 고집스러웠다. 묵용린도 예상은 했던 일이기에 직접 그를 일으켰다.

“짐의 말부터 다 들은 뒤에 다시 결정하거라.”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알다시피 청양은 태상황 품 안에서 귀하게 자랐다. 태상황께서 그 애를 짐에게 맡기셨으니 이젠 짐의 품 안에…….”

영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품 안은 무슨… 그냥 그대로 내동댕이치면 얼마나 좋단 말인가?

“짐도 네 마음 다 안다. 품 안은 무슨… 차라리 아예 내동댕이치면 더 좋다고 생각할 테지?”

“…….”

“청양은 어릴 때 귀신도 무서워하는 아이라고 불렸다. 짐이 보기엔 커서도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구나. 여전히 제멋대로에 자만심이 넘치지. 그래도 그 애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게 다 태상황께서 너무 오냐오냐 키우신 탓이지. 이제 컸으니 곧 시집도 가야 하는데 훗날 어떤 부마에게 시집을 갈지 모르겠다.

사람 속은 천 길 물속이라 자신의 가족처럼 저 애를 포용하진 못할 것이다. 결국엔 저 애도 자기 자신에게 의지해야 할 거야. 태상황께서 내게 저 애를 보낸 것도 아마 저 애를 잘 단련해 주길 바라셨을 것이다.”

묵용린은 슬쩍 영안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해서 짐의 생각은 이러하다. 네가 저 애와 함께 자랐으니 청매죽마인 셈이지. 어릴 땐 천진무구하여 남녀가 함께 어울리나…….”

묵용린의 말에 영안의 입꼬리가 연신 움찔거렸다.

“물론, 네가 그 애 때문에 어릴 때 고생이 많았다는 거 잘 안다. 그 애에게 약간의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 이제 그 애가 네 도제가 된다면 이참에 어린 시절의 원한을 갚아…….”

영안이 공수하며 무표정으로 말했다.

“신이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설마 자신의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거란 말인가. 사실은 제가 묵용청양을 괴롭힐까 봐 걱정하고 계시면서. 묵용린이 웃으며 말했다.

“어릴 때 그 애가 늘 너를 괴롭혔지만, 짐은 못 본 체했다. 그러니 이제 네가 그 애를 괴롭힌다고 해도 짐은 못 본 척할 것이다.”

그가 영안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짐은 네가 분수를 아는 사람이라 믿는다.”

“…….”

분수를 지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묵용린이 뭐라 하던 영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묵용린도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네가 원치 않는다면 다른 조건도 있다. 청양 말로는 네게 사건 조사를 배우지 못하면 널 부마로 맞겠다더구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영안이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황상,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묵용린은 조금 불쾌했다.

“영안, 널 부마로 삼고 청양과 혼례를 올리는 것은 영가를 드높이는 일이다. 한데 어찌 그리 싫어하는 것이냐?”

“금지옥엽이신 공주 전하를 신이 어찌 올려다보겠나이까.”

“두 가지 조건 중에서 네가 직접 고르거라. 그 애를 데리고 다니며 일을 가르치든가, 아니면 부마가 되든가.”

영안은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자로 하겠습니다.”

묵용린이 그를 흘기며 말했다.

“되었다. 그만 일어나서 그 애에게 직접 이 희소식을 전해 주거라.”

영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낙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허, 정말 엄청난 희소식이구나…….

영안은 연무장에서 묵용청양을 찾았다. 원수는 활을 쏘는 중이었다. 소태감 한 명은 화살이 잔뜩 든 광주리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소태감은 과녁 앞에 서 있었다. 묵용청양이 활을 쏠 때마다 과녁 옆에 서 있는 소태감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전하, 정말 대단하십니다. 또 정중앙을 맞히셨습니다!”

말을 마친 소태감은 영안을 발견하고 또다시 목청을 높였다.

“영 대인, 안녕하십니까!”

묵용청양은 고개를 돌려 영안을 바라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영안, 우리 한번 겨뤄 보자.”

영안은 과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쏜 화살이 가지런히 과녁 중앙에 꽂혀 있었다. 제법 실력이 뛰어나긴 했지만 환경문의 흉악범들은 저리 얌전히 서서 과녁처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게다가 활은 너무 커서 휴대하기에도 불편했다.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무기는 수노袖弩라는 일종의 석궁 암기였다. 손목에 찰 수 있을 만큼 작은데 사정거리도 멀고 살상력도 강했다. 그는 묵용청양의 대결 요청을 거절하며 말했다.

“오늘부터 환경문의 정원 외 인원이 되었다는 걸 알려 주러 왔어.”

묵용청양이 반색하며 말했다.

“그럼 우리 둘이 짝이 되는 거야?”

영안이 그녀의 말을 고쳐 주었다.

“난 부문주, 넌 도제. 우리 환경문의 규율을 어기면 바로 쫓겨날 거야. 황상께서 사정하시더라도 소용없어. 알겠어?”

묵용청양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대답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벌써 잊었어?”

“…….”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었다. 이 원수가 순순히 말을 잘 듣는다면 그는 과녁의 화살이라도 먹어 줄 수 있었다.

“그럼 오늘부터 바로 관아에 나갈까?”

“정원 외 인원이 무슨 말인지 알아?”

영안이 이어 말했다.

“환경문에 소속되어 있지 않단 말이야. 네가 기분 좋을 때만 나오면 돼.”

묵용청양은 눈이 다 감길 정도로 웃으며 말했다.

“나 지금 기분 되게 좋은데.”

영안은 풋풋한 눈웃음조차 무시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영안.”

묵용청양이 그를 불러 세웠다.

“황형이 어젯밤 네가 날 받아 주지 않을 거라고 했어. 하지만 난 네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

영안은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황상의 말씀대로 널 받아 주기 싫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묵용청양은 너무 기쁜 나머지 활도 더 쏘지 않고 승덕전으로 달려가 묵용린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제가 말했죠? 영안은 분명 절 받아 줄 거라니까요.”

묵용린은 자신만만한 여동생에게 충격을 줄 생각이었다.

“짐이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널 도제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부마가 되거나. 그랬더니 첫 번째 조건을 고르더구나.”

그 말을 들은 묵용청양은 귀까지 빨개졌다.

“부마 얘기는 괜히 왜 꺼낸 거예요. 제가 왜 그 애를 부마로 고르겠어요?”

묵용린이 물었다.

“안 될 게 무엇이냐? 너희는 서로 청매죽마가 아니더냐. 하지만 이제 되었다. 어차피 영안이 거절했으니.”

묵용청양이 성이 난 얼굴로 말했다.

“자기만 싫은가? 저도 싫거든요.”

묵용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네 성격으로는 부마를 고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낙심할 건 없다. 짐에게 하나뿐인 여동생이니 어떻게든 좋은 신랑감으로 골라 주마. 되었다. 이제 가서 할 일을 하거라. 계속 여기서 시간 때우지 말고.”

묵용청양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녀야말로 마음이 없는데 감히 누가 그녀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가! 그녀가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황형, 황형 걱정이나 하세요. 어제 봉봉이한테 떠봤더니 전혀 원치 않는 눈치이던 걸요.”

묵용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그리 말하더냐?”

“뭐… 대충요.”

묵용청양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사 장군과 사적으로 만나 보세요. 조서를 내린 뒤에 사봉봉이 거절하면 황형의 체면이 어찌 되겠어요.”

묵용린이 얼굴을 굳히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짐의 조서를 거부하다니… 그 애는 목숨이 여러 개라더냐!”

황제의 고조된 말투에 덜컥 겁이 난 묵용청양이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황형, 혼인은 남녀 모두가 원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원치 않은 혼인을 한다면 날마다 싸우고 다툴 텐데… 그런 일들을 버틸 수 있겠어요? 여인들은 말이에요, 잘 달래 주어야지 죽어라 소리치면 안 돼요.

게다가 사 주인이랑 우리 어머니의 관계는 황형도 잘 알잖아요. 남원의 외숙부 일도 아직 어머니한테 제대로 설명해 드리지 못했는데… 여기서 더 난처한 일이 생기면 안 되지요.”

묵용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제인 그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해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모후에게만큼은 달랐다. 서신을 보내려 몇 차례나 붓을 들었지만, 결국엔 그 일을 언급하지 못했다. 따로 시간을 내 강남으로 가 직접 부모님을 뵙고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미뤄 왔다.

그는 모후가 옛정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았다. 특히나 오랜 벗을 중시했다. 사봉봉이 설령 그의 조서를 거부해도 그는 그녀를 죽이진 못했다. 그런데 그녀를 죽이지 못할 뿐 어찌하지 못한다는 얘긴 아니었다.

그는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사봉봉을 황후로 책립하는 일을 계속 망설였지만 묵용청양의 말을 듣고 마음이 굳어졌다. 꼭, 사봉봉을 자신의 황후로 만들어야 겠다는 결심이!

* * *

묵용청양이 다녀간 이후로 사장풍의 집안은 참담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사앵앵은 어떻게 하면 딸을 궁으로 보내지 않을 수 있을지 머리를 쥐어짰다. 사장풍은 그녀가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를까 봐 성 밖 군영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계속 집에 머물렀다.

사금언은 누이가 황후로 책립되는 게 싫었다. 그에게 부귀영화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집에 돈이 넘쳐나지 않는가. 누이가 원치 않는다면 그 또한 싫었다. 그는 매일 근무를 설 때마다 이 일에 대해 어떻게든 소식을 접하려 했다. 하지만 이등 시위는 황제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데 어디에서 소식을 접하겠는가?

그렇게 네 식구는 며칠간 마음을 졸였다. 사앵앵은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아무래도 묵용청양의 말만 믿기엔 무리가 있었다. 진정 황제의 뜻은 들은 적이 없지 않은가?

“어쩌면 청양 공주가 괜히 우릴 놀라게 한 건지도 모르겠구나.”

사금언은 습관적으로 묵용청양을 감쌌다.

“어머니, 청양 전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왜 우리를 놀라게 하겠어요?”

사앵앵이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어릴 때 늘 전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더니. 이제 너도 다 컸으니 절대 그러면 안 돼!”

“왜요? 저랑 청양 전하는 친우인데요.”

“이젠 다 컸잖니. 남녀유별이라고! 만에 하나 전하가 널 마음에 들어 하셔서 부마로 삼으시겠다면, 이 어미 아비는 어찌 살라는 거니?”

사금언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 누이는 황후가 되는 걸 원치 않지만, 전 부마가 되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된다는 거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