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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39)화 (1,039/1,192)

제1039화

밥을 다 먹고 나니 날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묵용청양은 기홍에게 인사를 건넨 뒤 가부賈府에 갈 생각이었다. 기홍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영안에게 그녀를 데려다주라고 했다. 영안이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합니다. 하인한테 시키시지요.”

기홍이 그를 끌어당기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른 이들은 내가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네가 가. 전하께서 궁에 들어가시는 것까지 다 확인하고 돌아와.”

영안은 어쩔 수 없었다. 저 귀신보다 무서운 공주는 신분이 너무 존귀해서 그가 곁을 지키지 않으면 어머니는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칠칠하지 못하기까지 하니 혹여 이 웬수가 길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또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가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말을 타고 조금만 달리자 곧장 도착했다. 가부와 영부는 워낙 친밀하게 지내서 문지기는 영안을 보자마자 곧장 인사를 건넸다.

“영 공자 오셨습니까.”

“노야께선 안에 계시는가?”

“예, 공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는 묵용청양을 훑어보았다. 등롱 빛에 비춰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뱉지 못했다.

“저, 저, 저, 저, 저, 전…….”

“전은 무슨.”

묵용청양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날 몰라보는 건가? 서이徐二 나리.”

그자의 성은 서, 이름은 이였다. 가부에서 일한 지 아주 오래된 문지기인데, 묵용청양은 어릴 때부터 그를 부를 때마다 ‘나리’라는 말을 붙여 주었다. 묵용청양은 마성을 가진 사람이라 그녀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하면 가부의 모든 이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다. 가동마저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입구에 서 있는 그에게 ‘서이 나리’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 일로 웃음거리가 된 적도 있었다. 어느 날 가동이 근무를 마치고 동료와 술을 마시러 간 적 있었는데, 동료의 종복에게 대문에서 서이 나리를 찾아 집에 늦게 들어간다는 소식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가부에 도착한 종복은 입구를 지키는 서이에게 서이 나리를 찾아왔다고 했다. 서이가 자신이 서이 나리라고 하자 종복은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일개 문지기가 어찌 나리란 칭호로 불린단 말인가. 종복은 네가 나리면 난 노태야라고 비아냥댔고 하마터면 싸움으로 번질 뻔했다.

이 일이 전해지면서 서이 나리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모든 이들이 가부 대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서이 나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일부러 대문까지 찾아와 그를 보고 가곤 했다.

서이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었다. 하인인 그를 기어이 나리라고 부르다니. 공주 전하의 은혜로 나리라는 호칭을 얻었으니 그는 평생 그녀를 잊지 못할 것이다. 서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묵용청양은 깡충거리며 문턱을 넘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가 대인, 가 대인!”

익숙한 그녀의 목소리에 안에 있던 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가장 먼저 뛰어나온 사람은 가동이었다.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퇴청할 때 전하께서 출궁하셨다는 얘길 듣고 이렇게 오실 줄 알았지요. 안 그래도 기다리던 참입니다.”

묵용청양은 가동 손에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각별했다. 그땐 궁 안의 모든 시위들이 공주에게 목말을 태워 주는 가 대인의 모습을 보았다. 얼핏 보면 그의 어깨에 공주가 자라난 것 같을 정도였다.

가동은 온종일 공주와 놀러 다녔지만, 황상도 그를 내버려 두었기에 아무도 간섭하지 못했다. 묵용청양의 성격은 날로 자유분방해졌고, 바보 같은 가동과 함께 다니면서 결국 귀신도 무서워한다는 공주가 되어 버렸다.

녹하는 청양 공주의 성격을 얘기할 때면 늘 가동을 원망했다. 멀쩡했던 공주가 그와 함께 다니더니 성격이 비뚤어졌다며 백천범을 볼 낯이 없다고 했다. 가동은 녹하가 그렇게 말할 때면 자신 때문에 비뚤어진 게 아니라 황상이 너무 오냐오냐 키운 거라며 당당하게 받아쳤다. 묵용청양은 배시시 웃으며 가동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가 대인, 저 왔어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동은 몇 발짝 뒷걸음질 치며 비틀거렸다. 묵용청양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의 무술 실력이 일취월장 성장했단 말인가? 아니면 가동의 실력이 퇴보했단 말인가? 별로 힘도 주지 않았는데 몇 걸음이나 뒷걸음질 치다니. 그녀가 당황해하자 가동이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전하, 아무래도 내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묵용청양은 그가 자신을 놀린다는 걸 알아차리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가 대인, 몇 년 못 본 사이에 농간질이 더 느셨네요.”

그녀가 옷깃을 걷으며 말했다.

“어서 한번 겨뤄 봐요. 내상을 제대로 입혀 드릴 테니까요.”

한쪽에 있던 가소타가 박수를 쳤다.

“청양 언니 이겨라!”

가동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했다.

“너 내 딸 맞아?”

녹하가 앞으로 나와 묵용청양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 대인은 하루라도 장난을 안 치면 속이 불편한가 봅니다. 저이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드세요.”

묵용청양은 고개를 돌리다 복도 아래에서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 가난청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를 위아래로 훑으며 칭찬했다.

“꼬마 장원랑, 축하해!”

가난청은 작년 전시殿試에서 장원에 올라 동월 개국 이래로 최연소 장원랑이 되었다. 사실 그 전부터 일찍이 황상의 측근이었기에 장원랑이라는 신분은 그에게 그저 금상첨화일 뿐이었다. 가난청이 웃으며 예를 갖췄다.

“감사합니다, 전하.”

* * *

그렇게 묵용청양이 궁에 돌아왔을 땐 이미 제법 늦은 시간이었다. 진즉 궁문이 닫힌 시간이었지만 동월의 장공주에게 궁문을 다시 열어 주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영안은 그녀를 바래다주자마자 곧장 발걸음을 돌려세웠다. 그때, 묵용청양이 그를 불러 세웠다.

“영안, 내일 봐!”

영안은 못 들은 척 고삐를 내리치며 빠르게 앞으로 달려갔다. 묵용청양은 입궁하자마자 곧장 승덕전으로 달려갔다. 묵용린은 성실한 황제라 아직 취침 전일 것이다. 역시나 저 멀리 환하게 불이 켜진 남서방의 모습이 보였다.

사희가 기둥에 기대 꾸벅 졸고 있었다. 조용히 계단을 올라간 묵용청양은 사희의 어깨를 별안간 확 내리쳤다. 화들짝 놀란 사희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 묵용청양은 이미 남서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묵용린은 바깥에서 들리는 소란에 묵용청양이 돌아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고개를 드니 그녀가 손을 휘저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묵용린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찌 키만 크고 마음은 키우지 못한 것이냐. 아이도 아니고, 어전에서 그리 난리법석을 떨어야겠느냐?”

묵용청양은 꾸중을 들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밤새 문 앞을 지키다 보면 피곤하기 마련이죠. 정신 좀 차리라고 한 게 뭐가 잘못이에요?”

“할 말이 있단 말이냐?”

묵용청양은 서둘러 하려던 말부터 꺼냈다.

“황형, 환경문이라는 걸 새로 만들었다면서요. 영안이 부문주라고요?”

묵용린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왜 묻는 것이냐?”

묵용청양이 배시시 웃으며 책상에 엎드렸다.

“황형, 제가 환경문 문주를 하면 어떨까요?”

묵용린은 묵용청양이 조금 우스웠다.

“환경문이 무얼 하는 곳인진 아느냐?”

“알아요. 사건을 조사하는 곳이잖아요.”

“네가 사건을 조사할 수는 있고?”

“그건 배우면 되죠.”

묵용린이 그녀를 흘기며 말했다.

“사건 조사도 못하는 사람이 문주가 되고 싶다니.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묵용청양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황형은 제 오라버니니까 그런 말도 꺼낼 수 있는 거죠.”

“짐은 영민한 황제다. 혈연이 아니라 재능이 있는 자만이 짐에게 쓰일 수 있다. 게다가 환경문에는 이미 문주가 있어.”

“누군데요?”

“노도수魯濤修.

묵용청양은 눈을 가늘게 뜨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 대인은 나이가 아주 많지 않아요?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사건을 조사할 수 있어요?”

“그자가 직접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그저 명목상 환경문을 대표하는 것이지.”

묵용린이 말했다.

“영안의 실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아직 너무 어리다. 어떤 일에선 식견이 얕을 수 있어. 노 대인이 같이 살펴 줘야 짐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청양이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제게도 직위 하나만 내어 주세요. 저도 환경문에서 영안이랑 같이 사건을 조사할래요.”

“여인이 어찌 그런 곳에 있겠단 말이냐. 불편한 게 많을 거다.”

“불편할 게 뭐가 있어요?”

“관아엔 전부 다 사내들뿐인데 여인 혼자 어찌 편히 지내겠느냐?”

“그 사내들이랑 한데 뒤섞여 노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는 정당한 일을 하러 가는 거라고요.”

“…….”

네가 정당한 일을 하는 건 지금껏 본 적이 없거늘…….

“의논할 것도 없다. 짐이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이다.”

“알았어요.”

묵용청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당한 일을 하겠다는데도 못하게 하시니… 저 동월의 장공주 묵용청양, 내일부턴 부당한 일을 할 거예요.”

묵용린은 그녀의 모습이 너무 우스웠다.

“무슨 부당한 일을 하려고?”

“저도 반반한 사내들을 좀 들여야겠어요. 황형은 아리따운 여인들로 후궁을 삼천 명이나 둘 테지만, 전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 백이나 이백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

이 무슨 요망한 짓이란 말인가. 반반한 사내를 들먹이며 그를 위협하다니…….

“짐 생각엔 우선 부마부터 구해야 할 듯한데.”

“알겠어요. 부마 한 명이랑 남첩으로 잘생긴 미남 이백 명 정도 구해 볼게요.”

“진심이냐?”

“제가 거짓말을 뭐 하러 해요?”

그가 한참 침묵하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그리하면 네 낯짝이 어찌 되겠느냐?”

묵용청양이 묵용린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 낯짝은 여기 있는걸요.”

묵용린은 눈이 조금 어지러웠다. 대체 이 애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달리 방법이 없던 묵용린은 어쩔 수 없이 조건을 내걸었다.

“일단은 경험이 없으니 당분간 영안 밑에 도제로 들어가 일을 배우거라.”

묵용청양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예전엔 영안이 제 밑에서 배웠는데요.”

“그건 네가 그 애를 강제로 압박했던 것이고. 어쨌든 아직은 영안이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도 알 수 없다.”

묵용청양이 눈썹 끝을 치켜세우며 거만하게 말했다.

“제까짓 게 감히 원치 않으면 어찌할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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